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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애 칼럼] 5월의 광주를 피로 물들인 광주항쟁은 부마항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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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4-05-19 11:48 조회1,3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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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애 칼럼] 5월의 광주를 피로 물들인 광주항쟁은 부마항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송영애 (미주양심수후원회)

[민족통신 편집실]


1979년 10월 16일 부산과 마산의 노동자민중, 학생들이 박정희 유신 파쇼정권에 격렬히 항거하며 일떠섰고, 부산지역에 비상계엄, 마산 창원지역에 위수령이 발동되었다.

부마항쟁이 기폭제가 되어 10월 26일 군사파쇼 박정희가 암살되었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 되었다.

이 후 전두환과 신군부는 1212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80년 4월부터 파쇼치하의 억압에 고통 받던 노동자민중들의 투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5월 15일, 서울역에 10만 명의 학생들이 집결, 계엄령 해제와 민주주의 실시를 요구했다.

그러나 시위 6일 전인 80년 5월 9일, 당시 주한 미 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은 계엄사령관 전두환을 만나 5월 15일의 대규모 시위의 군대투입 진압 계획을 막지 않겠다고 전했다.

(이는 5월 15일 유시민을 위시한 학생지도부의 결정으로 막을 내린 서울역 10만 결집학생들 자진해산의 이유가 된다.)


5월 18일 민주주의를 외치는 비무장 시민들에게 전두환이 총과 대검으로 무장한 특수부대를 투입하는 무자비한 학살로 광주의 민중봉기는 시작되었다.




5월 21일,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투입, 적과 전쟁하듯 광주시민 60명을 학살했고,

5월 22일, 미 대통령 지미 카터는 전두환에게 광주항쟁 진압의 군대투입과 미국의 지원을 승인했다. 광주항쟁 진압을 위한 미군의 직접개입계획이 논의되었고 미국의 군사력이 이남주변에 배치되었다.


광주의 시민군은 마지막 한사람까지 군사파쇼 전두환과 배후 미제에 굴복하지 않고 항거하여 자주와 민주의 제단에 숭고한 목숨을 바쳤다.





당시 카터는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 ‘공산주의 전복이나 공격’으로부터의 안보 유지라며 살인마 전두환과 입을 맞췄다.

5 18 광주항쟁을 ‘공산주의 불순세력의 선동’이라며 즉시 소탕해야한다, ‘전두환을 내세운 것은 성공한 결정’이라며 이남 민중을 쥐새끼로 비하했던 자가 80년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존 워컴이다.


광주학살의 배후는 미 제국주의이다.

조국의 분단도 이남의 노동자민중을 억누르는 민주주의 압살도 그 배후는 미제이다.

이남이 미제의 허락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던 트럼프의 발언은 허구가 아니다.

미제를 몰아내지 않고는 남과 북의 전쟁위기 해소도, 노동자민중의 인간다운 삶도 요원한 식민지 조국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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