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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79. 전남 영광 염산 상륙의 진실을 회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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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3-09-06 08:51 조회1,7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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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79

전남 영광 염산 상륙의 진실을 회고해 본다 (임복현 할머니의 증언)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1950년 5월 평남 진남포에서 출발한 33명을 실은 발동선은 어둠을 타고 서해로 향했다. 이는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처형당한 박헌영의 지시에 의해 강동 정치학원 출신으로 구성된 유격 전투 부대였으며 총책임자는 백병일과 조영표였다고 했다.


출발 당시 33명 중 현재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임복현 할머니의 증언을 들어본다.


실로 60여년이 흘러가고 있다. 당시 동아일보에만 반짝 기사가 날뿐 지금껏 내막이 밝혀지지 않고 미완의 사건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앞두고 묻혀 가고 잊혀진 사건의 진실을 단면만이라도 밝혀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하고 있는 차에 어렵사리 만나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다.

오랜 기억을 더듬어 진실을 밝힌다 해도 부정확성도 있다는 전제하에 기술하오니 참고해 주기 바란다고 했다.


백병일과 조영표의 지도하에 33 명의 유격부대를 실은 배가 어쩐 일인지 서해 공해로 나갔다가 산동 반도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유는 배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만 알고 산동 반도 어느 항구에 정박했다.

여기서 일 개월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행 중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도 있었다. 그중 김도연이란 부대원과 왜 가지 않고 여기서 세월만 보내고 있는가 하고 수근거릴 뿐 지도자들에게 한마디도 당당하게 제기 하지 못했다.

지도자들은 대원들의 여론을 눈치챈 것 인지 일개월이 지난 후 공해상으로 나와 남쪽으로 항해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배가 고장 났다고 해서 일개월간 공해상에서 표류했다. 그간에 가지고 온 식량도 다 떨어졌다 . 배고픔도 견뎌내야 했다.

십여 일이면 목적지에 상륙 할 시간 거리인데.. 드디어 7월10일 경에 영광 염산면 얼패부락 앞 만에 도착했다.

배는 우리 일행을 내려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일행 중 차oo 씨가 얼패마을 뒷산 기슭의 독립가옥에 살고 있는 누나의 집을 찾았다. 일행은 누나의 집 헛간에 짐을 풀었다.

답사팀은 바다를 끼고 마지막 부락인 얼패마을을 찾았으나 임할머니의 말과는 다른 변모를 하고 있었다. 수소문 끝에 홀로 사는 80대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사건 날 때 17세의 소녀였다고 하면서 총소리 나고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내막은 전혀 모른다고 했다. 그 외 다른 부락 60-70대 노인들 몇 사람을 만나 문의했으나 금시 초문이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상륙한 일행들은 배가 고팠다. 부산하게 밥을 했다. 이 와중에 차씨는 자기 매형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몰라도 바로 집을 나갔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일행들은 지은 밥을 속성으로 다 먹은 사람도, 아직 먹고 있는 사람도, 아직 먹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이 중에 임복현 할머니는 아직 먹지 않고 있었다.

사실 매형은 그 길로 나가 경찰에 신고 한 것이었다.(나중 알고 보니)

당시 신고자는 6.25 합법 세상이 되었을 때 체포되었다는 소식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 인솔자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전투태세를 갖출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바로 초병 2명을 전방에 내 보내면서 만일 적들이 처들어 오면 자폭으로 신호할 것을 명령했다. 비상 대기 와중에 새벽 날이 밝기 시작하자 총성이 울렸다. 내 중에 알고 보니 초병 2명은 자폭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초병 2명은 얼패 마을 뒷산에서 일행 중 제일 먼저 한줌의 흙으로 산화하여 간 것이다. 지금도 잊지 않고 마음속에 되새기고 있다고 했다.

초병의 총성을 듣고 우리 전투 부대는 일제히 부락 뒤 능선을 점령하기 위한 돌격 전투가 시작 되었다. 능선 점령 전투 중에 한 동지가 중상을 당했다.

목적지인 불갑산을 향해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데 도저히 중상자와 함께 갈 수 없었다. 중상자는 “나 때문에 동지들이 피해를 입으면 안되니 쏟고 빨리 포위망을 벗어나야 한다고 간곡히 호소했다” 인솔자는 불기피한 상황 속에서 눈물을 머금고 평안히 잠들게 하고 목적지를 향해 포위망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투 중에 지휘관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눈에 보이지 않았다.

강동 정치학원시절에 부대 편제로 분대장도 했고 송학산 유격전투 훈련 중에 소대장까지 한 전투 경험을 살려 남은 전투부대를 총 지휘했다. 3명의 희생자만 내고 불갑산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

불갑산에서 대오를 재점검 해 보니 전남 출신이 11명 전북출신이 11명이었다. 나머지 10명은 분산 되었다.

백병일과 조영표 지휘관은 어디서 분산 되었는지, 살아 있는지 여부도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6.25 합법 때 살았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살아 집결된 우리 일행은 전남 출신(영광, 해남, 영암) 11명은 임복현 동지가, 전북출신 11명은 소 oo여성동지가 지휘하기로 하고 서로 분산해서 활동하기로 합의했다. 그 후 전북 동지 11명은 생사여부조차 모르고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 전남 출신 11명은 또다시 한 사람이라도 살아 남기 위하여 분산 잠복 투쟁하기로 했다. 그 후 무사히 광주에 입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일행들은 염산 상륙 후 신문을 보고 전쟁이 발발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상륙 후 10여일 만에 광주가 인민군에 의해 해방되었음을 알고 광주에 입성했을 때 백병일과 조영표동지가 살아 돌아왔음을 알고 분노가 치밀어 오기도 했다. 자기들만 살기 위해서 대원들을 떼어 놓고 도망쳤기 때문이다.

조영표동지는 재산시 전남 빨찌산 총사령부의 후방사령관을 하다가 53년에 영광군당 수습책으로 사업하던 중 전사했다고 했다.


그럼 임복현 할머니는 어떻게 유격부대를 지휘했을까

강동 정치학원 다닐 때 분대장에서 소대장까지 했고 개성 송학산에서 6개월간 유격훈련을 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큰 자산이었다.

그래서 내려 올 때 전부가 칼빈으로 무장했으나 본인은 독일제 모조리 권총으로 무장했다. 이는 전투용 권총이었다.

임여사는 6.25 해방공간 때 도여맹 문교부장을 거쳐 도여맹부위원장까지 하다가 52년도에 전남 서부 지하당 사업 중 체포돼 징역도 살았다. 일찍이 출옥 후 어려운 생활을 거쳐 지금은 독거노인으로 갖은 병마에 시달리면서 죽지 못해 사는 냥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운동전선에 뛰어 들었을까

임여사는 1926년 7/14일 전남 나주 다시면 회진리에서 농사에 종사하는 집안의 3남매 중 맞이로 출생했다. 부친은 일제 때 반일운동을 했다고 했다.

바로 밑의 동생은 누나(자신) 때문에 경찰에 연행되어 갖은 고문구타 당한 후유증으로 앓다가 작고했고, 자신은 일제 말 소위 정신대 강제 모집을 피하다가 18세 때 결혼했다고 했다. 그리고 8.15 해방을 맞이했다.

1946년 집에서 서당을 했는데 생도 중 임종현이란 청년의 영향을 받아 운동전선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후 나주군당 레포, 도당 레포사업을 했다. 그 후 나주 군당 이 순채라는 간부동지의 지시를 받고 사업하다가 1948년 4월에 대의원으로 선발되어 북상하여 해주에 갔다. 그 후 강동 정치학원에 들어가 공부했다. 여기서 분대장 소대장도 하면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남쪽으로 내려오기 전 유격훈련을 받을 때 각종변장술도 익혔다. 위와 같은 배움과 경험을 통해서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여 부대원들을 지휘하고 많은 동지들을 살리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지금 생각하면 미제 고용간첩으로 처형된 박헌영, 리승엽 도당들의 행태를 생각할 때 강동 정치학원 생도들을 총알받이로 양성해 사지로 몰아넣어 희생시키려는 저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기미를 깨닫고 백병일과 조영표 지도자들이 현지 파견을 지연시키기 위한 고의가 있지 않았나 생각도 든다고 했다.

염산을 상륙 해 3명의 희생자만 내고 나머지 부대원들이 살아 6.25합법 세상을 맞이한 것은 천만 다행으로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는 당시 상황은 인민군 진격에 군경들이 연일연패하여 퇴각하는 상황이라 반격이나 토벌작전을 펼칠 시간적 여유나 정황은 아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는가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리고 박헌영, 리승엽 미제 고용간첩행위를 생각하면,

1950년 2월 김달삼 부대를 조직해 남하 시키다 태백산에서 희생된 전례를 살펴보면 답이 나올 것 같다고 했다.

염산상륙의 진실은 미완의 것임을 상기하면서 제대로 된 평가가 앞으로 언젠가 나올 것이라 기대한다고 하면서 단면만이라도 털고 갈 것을 생각하니 속이 후련하다고 했다. 그리고 본 대렬을 위해 자폭한 두전사와 중상을 입고 희생된 젊은 동지를 평생 가슴에 새기면서 살아오고 있다고 했다.

살아생전 통일 세상을 보고 죽어야 할터인데 하는 말끝을 흐리며 눈시울을 적실 때 나도 모르게 숙연해 지기도 했다.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어 통일세상을 함께 봅시다 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 했다.


(참고} 지금은 치매가 심하여 사람을 못알아본다고 아들은 말하고 있다.

2014년 8월에 인터뷰한 것을 2023년 9월2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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