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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71. 불굴의 혁명렬사인 박찬봉동지를 회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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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3-07-17 20:05 조회1,9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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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71

불굴의 혁명렬사인 박찬봉동지를 회고해본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박찬봉동지는 경기도에서 출생했다. (희생될 당시 40대였다)

박찬봉동지는 전쟁전에 경기도당 부위원장하다 1949년에 김선우동지가 전남도당 위원장이 되고 박찬봉 동지는 당 부위원장이 되어 부임하였다.

1949년에 중앙과 선 연결을 책임지고 월북하다가 전북 순창에서 변절자에 의하여 체포당하였다.

그리하여 광주감옥 미결사에 수용되었다.

미제에 의한 조국전쟁이 발발하자 미제의 사촉을 받은 리승만 졸도에 의한 전국에서 학살 만행이 발생하자 광주감옥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인민군에 의한 포탄이 떨어지자 당시 광주감옥은 좌익재소자들을 차례로 불러내 꼭꼭 묶어서 트럭에 실고 나가 학살을 하다가 중단되어 살아났다는 소식을 필자가 보위하고 있는 사이 말씀해 주어서 알게 되었다.

당시 미결사에서는 최후 판가리 싸움이라 생각하고 최후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다. 당시 문타면 최후 투쟁할 결심으로 문짝만 바라보고 있었다 했다.

그런 와중에 간수가 문을 타서 살아나왔는데 미쳐 묶어놓은 상태로 간수들은 다 도망가고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인민군에 의한 합법새상을 맞이하여 전남도당 조직부장으로 중앙당 임명을 받고 조직지도사업을 전개했다.

1950년 9.28 일시적 전략 전술적인 후퇴를 맞아 재입산하여 합법적인 당체제를 비합법적인 빨찌산 체제로 재편하게 되었다.

백아산에 전남도당부가 합법 반비합 체제로 있을 때 1951년 5월에 당 조직부장을 삼 지구당위원장이었던 김용우동지에게 물려주고 도인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인 동시에 국제평화투쟁 연대가 조직되어 있었는데 (평투라고도 함)평투 부위원장이 되었다. (위원장은 박영발동지임)

전남도당이 광양 백운산 88트에 있을 때 1951년 적들의 대대적인 동기공세를 승리로 치른 후 당시 보위병이 둘 있었으나 모두 전사하고 보위병이 필요할 때 박영발 위원장 동지는 저보고 적들의 대대적인 공세 때 잘 싸웠기 때문에 박찬봉 동지를 보위하라고 해서 보위하게 되었다. 박찬봉 동지는 적들에게 체포당하여 고문을 많이 당하였기 때문에 하체를 마음대로 잘못 쓴다.

그리하여 1952년 4월 5일에 지리산 전투지구당부가 새로 창설되어 백운산에서 지리산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지리산 전투당부 위원장은 박찬봉 동지었다. 부위원장은 윤기남동지었다.

박찬봉 동지를 보위하고 지리산 빗점골 이현상 아지트를 찾아가 처음 뵈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인상은 인민군 군관모를 쓰고 있고 의복도 군관복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지리산 전투지구당부는 문수골에 있었으며 구래군당트도 그 엎에 있었으며 지리산부대는 지구당부 밑에 있었다. 적들이 올라올때는 뒷능선넘어 피아골에 잠복했다가 적들이 빠지면 다시 문수골트로 넘어 오곤 했던 것이다.

당시 지구당 성원들은 20여명 되었다. 조직선전 지도원동지들은 도당학교 학생들이다.

1952년 여름부터는 문수골에 아지트를 못 쓰고 피아골에 쓰다가 대수골에 썼던 것이다.

문수골에 아지트를 쓰고 있을 때 이현상부대 서기장했던 김영재 동지도 동기공세 때 살아남아 지구당트에 몸보신하다가 백운산 도당부로 갈 때 전라남도 도 인민 위원장으로 갔었다. 그후에 고진동지도 이현상부대에서 살아남아 지구당부에 있다가 백운산 도당으로 갈 때 전남도 여맹위원장으로 갔었다.

1952년 가을에 지리산 삼도봉 및 피아골에 제 5지구당이 있을 때 생포된 연락원의 변절에 의한 기습으로 선전부장을 비롯한 4명의 희생을 당한 것을 보고 박위원장을 보위하고 5지구당 아지트를 찾아가는 도중에 조직부장이었던 조병화 동지를 만나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었다.

그후 지리산 반야봉 및 대수골에 아지트를 쓰고 있을 때 1952년 말에 눈이 많이 와서 쌓인 중에 지리산 뱀사골 방준표위원장 동지를 찾아가기 위해서 남원군당을 찾아갔으나 눈 족적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해서 접고 돌아온 사실이 있었는데 그후 방준표위원장동지가 그 일을 알고서 일부러 찾아온 것을 돌려보낸 것을 나무랬다는 소식을 접하기도 했었다. 그 후는 한번도 뵙지 못했다.

박찬봉동지는 제 5지구당 유격지도부장으로 가는 바람에 그 때부터

1953년 1월까지 보위했다가 지리산 전투지구당부가 백운산 도당부로 소환되는 바람에 갈리어 백운산으로 오게 되었다.

그후 소식은 조선에서 미제의 박헌영 리승엽 고용간첩단 사건이 발생하여 당 중앙과 선 연결이 두절된 상태속에서 5지구당 자체 조직위원회를 소집하여 간부 5명이 평당원으로 나 앉으며 해체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박찬봉동지는 경남도당 부위원장을 맡아 가고 위원장은 조병화 동지가 맡게 되었다.

그후 박찬봉동지는 당부위원장으로서 경남 북부지구당 위원장을 맡고 사업을 하게 되었다 .북부지당은 덕유산에 있었다.

정전 후 일선 적의 정기 군대가 소위 빨찌산 토벌에 동원되어 빨찌산 토벌 작전 중 덕유산 황골에서 최후를 맞아 당시 보위병에게 “동무는 살아나가 이 사실을 알려주기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자결로서 최후를 마감했다는 소식을 남원수용소에 있을 때 우연하게 한 천막에서 만나 자초 지종을 듣게 되었다.


불굴의 혁명열사인 박찬봉 동지시여!

동지의 일생은 항일 빨찌산 투쟁정신을 계승한 민족해방 투쟁역사이며 조선 인민의 철전지 원쑤인 미제를 구축하기 위한 처절한 빨찌산 투쟁에서 몸과 맘을 다 바친 투쟁지도 정신은 민족투쟁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덕유산 빨찌산 투쟁의 처절한 참 모습은 망봉에서 희생된 조선로동당 전북 도당위원장인 방준표 동지와 함께 길이 남을 것입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은 후대가 이어 갈 것이니 다 잊으시고 자주 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내가 보위했던 간부 동지들은 5명인데 모두 자결 또는 희생을 당하였다. 지금도 눈에 선하게 회상되고 있다.

2023년 7월 15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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