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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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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3-07-06 22:51 조회1,94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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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70

불굴의 최순희 여성 동무를 회고해 본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최순희 동무는 1924년 2월 10일(음력)에 하바로프스크에서 출생했다.

부친이 조선 독립운동하느라 망명해 그곳에서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고향은 강원도 온정리라고 한다.

최순희 동무는 북쪽에서 음대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도 했다.

그래서 해방된 조국에서 유명한 오페라 가수로서 왕성하게 활약을 했다고 한다.

최순희 동무는 결혼을 했는데 남편은 1949년도에 암에 걸려 사망했으며 당시 아들 하나 낳았는데 6살이었다고 한다.

1950년 8월에 전남 광주 예술동맹 감독으로 임명을 받고 내려오다가 9.28 일시적인 후퇴를 당하여 부임하지 못하고 전주 완산군당에 있다가 북상하려고 덕유산에 들어갔으나 길이 막혀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가 경남도당에 있었다.

이현상선생의 소환으로 이현상부대 문화지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1951년 적들의 대대적인 공세로 인하여 대성골에서 수많은 동지들이 희생을 당하는 와중에 1952년 2월에 체포당하였다.

체포된 후 적들은 유명한 오페라 가수이기 때문에 이용하려고 회유와 압박을 가하였다.

최순희 동무는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자기 성찰을 위하여 원래 자기 전공인 피아노 개인 학습강사를 하여 일정한 자금을 마련하였다.

여의도에 아파트 27평 짜리 집을 마련하여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조국과 자주독립을 위해 미제국주의와 투쟁속에서 산화하여간 동지들을 마음속에 품고 지리산 골짝을 두루 밝으면서 속죄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최순희 동무는 1980년부터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 이현상선생 희생지를 찾아 제를 올리기도 했다.

서울에서 손수 제찬을 만들어 기차타고 구래구역에 내려 택시타고 빗점골 삼점목까지 가서 산길을 걸어서 이현상 선생 희생지까지 가서 제를 올리는 정성을 보임으로서 많은 동지들과 인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도 했다.

최순희 동무는 2010년까지 마지막으로 활동할 수 없을 때까지 정성을 다해 이 일을 지속했던 것이다.

드디어 일산 복음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2015년 11월 21일 10시 20분에 파란 많은 세싱을 하직하게 되었다.

입원한 지 2년 7개월 만이었다.

마지막 운명할 때 유족은 하나도 없고 병원 관계자들만 있었다고 했다.

최순희 동무는 남쪽땅에 조카 3남매가 살고 있었다.

남조카는 미국에 살고 있었으며 여 조카 둘은 남쪽땅에 살고 있었다.

조카딸 둘은 김애란과 혜경인데 병원에 입원했을 때 마지막 운명하는 날까지 간병해 주었다 한다.

미국에 사는 남조카는 운명하기 전에 여의도에 살 때 왔다 갔으나 이번 장례식장에는 오지 못하고 조카딸 둘만 영안실을 지키었다.

그런데 최순희 동무는 양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전남 광주에서 관광사업을 하는 정오승씨었다.

정씨는 어쩌다 한번씩 찾아오거나 지리산 빗점골에서 이현상 선생 제를 올리거나 할 때 구래에 와서 최순희 양어머님을 택시에 태우고 갔다 오기도 했다.

그리고 2010년부터 바깥출입을 접고 집에서 휴양할 때부터 병원에 입원해 돌아가실 때까지 서울의 이성수씨가 소개를 받고 지금까지 매년 9월 18일 빗점골을 찾아 제를 올리기도 하는 와중에 최순희동무의 사망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성수씨가 영안실도 조카를 대신해 양아들로서 상주 역활을 담당하고 사후 처리까지도 책임지고 소임을 다하였다.

최순희동무는 임종 때 평소 알고 지내던 덕현스님 한분이 있었는데 최순희 동무의 정신지주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영안실을 지키면서 극락왕생하시라고 불공을 드리기도 했다.

임종전 해 한번 찾아왔는데 유언하기를 “내가 죽거던 화장해서 그 유분을 지리산 노고단에서부터 천왕봉까지 뿌려달라”고 했다한다.

그리하여 유족들과 양아들 그리고 조성봉감독과 상의해서 그 유분을 지리산 노고단에 일부를 뿌리고 나머지는 빗점골에 뿌리리기로 결정을 했엇다.

그리하여 11월 28일에 뿌릴 예정이었으나 지리산에 눈이 많이 와서 성삼재까지 교통이 통제되는 바람에 12월 6일에 노고단 상봉에 일부뿌리고 빗점골 수림에 뿌렸다.

마지막 가는 길에 양아들 이성수씨를 비롯한 12-13명이 함께 했다.

필자는 살아생전에 두 번 만나 빗점골 이현상선생 추모제에 같이 가서 지낸 일이 있으며 그전에도 손영심 동무의 소개로 알기도 했으며 고 하종구선생을 통해 추모제를 지내 오고 있다는 소식도 듣기도 했었다.

살아 있을 때 받은 인상은 여간해서 외부의 사람과 접촉을 꺼려 한다는 것과 한번에 커피를 5_6봉씩 타서 마시는 것이고 살아생전에 자기 자서전을 쓰고 있는데 출판하면 한권 주겠다고 구두 약속을 했는데 살아생전에 지키지 못하고 가신 것을 퍽이나 애달프게 생각하고 있다.

이젠 이현상상부대에 있었던 동지들은 다 죽고 97세인 이옥자 여성만 남아있다.

참으로 하는일 없이 오래산 것 같다.

최순희 동무시여 !

이제 못다한 과업은 후대에게 맡기고 동무의 살아생전의 경험과 교훈은 후대들의 거울이 될 것이니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으시고 자주 민족통일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최순희 여사는 살아생전에 작사작곡한 “지리산아”를 다음같이 남기고 가셨다.


1) 철죽이 피고 지던 반야봉 기슭엔

오늘도 옛같이 안개만이 서렸구나

피아골 바람속에 연하천 가슴속에

아직도 맺힌 한을 풀길 없이 헤매누나

아 아 그 옛날 꿈을 안고 희망 안고

한마디 말도 없이 쓰러져 간 푸른 님아

오늘도 반야봉엔 궂은 비만 내리누나.


2) 추성동 감도는 칠선의 여울 속엔

굽이굽이 서린 한이 깊이도 잠겼구나

거림아 대성골아 산돌의 넓은 돌아

너는 알지 눈보라가 울부 짖던 그 맘들을

아 아 그옛날 꿈을 않고 희망 안고

한마디 말도 없이 쓰러져 간 푸른 님아

오늘도 천왕봉엔 하염없이 눈이 내리누나.


(이 노래 가사는 지리산에서 쓰러져 간 전우들을 생각하면서 지었다)

자신이 직접 피아노 치면서 부른 노래만이 남아 후대들에게 심금을 울려 주고 있다.

** 님은 갔어도 노래만이 영원히 불러주리라.

참고 @@ 매년 조성봉감독 진달래 팀은 빗점골을 찾아 이현상선생 추모제를 지낸 후 최순희 여사도 찾아 제를 올리기도 한다.

금년 9월16일 토요일에 찾아 70주년 제를 올리기도 하니 독자들의 많은 참석을 요망합니다.

2023년 6월 25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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