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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66. 출옥후 어렵사리 환영대회를 베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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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3-05-24 09:34 조회2,3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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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66

출옥 후 어렵사리 환영대회를 베풀어주었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1989년 11월 20일 종로 기독회관에서 출옥한 동지들을 민가협을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환영대회를 베풀어 주었다.

필자는 당시 영등포 엘에베이이타 부품공장에 근무하고 있을 때이다.

당시 사회안전법이 인권말살법이라는 국내와 국제여론이 빗발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회안전법이 더 이상 지속을 못하고 폐지되고 말았다.

당시 정계는 여소야대 정국이이었다. 그래서 사회안전법이 폐지되었지만 보안관찰법이란 대체입법이 통과 되어 출옥 후 지금까지 보안관찰적용을 받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작은 감옥에서 큰 감옥으로 출옥한 기분이다.

이에 대하여는 따로 기술하기로 하고 환영대회만 기술한다.

사실 인권말살법인 사회 안전법에 의하여 전국에서 157명이 감호되어 16명이 희생되고 52명이 비전향자로 출옥했다.

나머지는 할 수 없이 전향했다.

1988년에 환자로서 다 죽게 된 동지부터 하나 둘씩 출옥 시키고 1989년 사회안전법이 폐지될 때 9월 5일부터 10월 15일까지 한 번에 출옥시키지 않고 한 동지씩 출옥시켰다. 그리하여 받아줄 가족친척이 있는 사람부터 1989년 9월 5일부터 출옥시켰다.

필자는 가족이 있어 맨 처음에 출옥했다.

그리하여 서울의 작은 누님집 식구들과 살아 있는 여동생들과 조카들이 와서 35년 9개월만에 해빛을 받아 안기게 되었다.

살아 출옥했지만 자기 양심과 사상을 고수하다 자결한 동지나 병나서 희생된 동지나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은 동지들을 생각할 때 여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늘상 감옥에서 희생된 동지들 생각뿐이었다.

사실 감옥에서 조국과 인민을 위해 희생된 동지들을 앞으로 어떻게 기록으로 남길 것인가를 제일 첫째로 생각했었다.

출옥해 보니 공안은 매일 꽁무니를 따라 다니는 것 같았다.

건강한 모습으로 출옥했기 때문에 바로 직장을 갖게 되었다.

일찍 출옥한 임방규동지 소개로 영등포 엘리베이타 부품공장에 있을 때이다.

기독교 회관에서 환영대회를 한다는 연락을 받고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서대문경찰서 사찰계 형사가 와서 가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한다.

필자는 감옥에 있을 때 도음을 많이 받은 은혜에 보답해서라도 가야한다. 그리고 정치행사가 아닌데 왜 못가게 하느냐고 따졌다.

그러나 나의 담당 형사는 공장 주인에게 못가게 하라고 부탁한다. 주인은 가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한다

그러나 왜 정치 행사가 아니고 순 인권적 차원에서 고생 많이 했다고 환영하는 행사인데 못가게 하느냐고 따졌다. 그러나 가게 되면 이 공장에는 있을 수 없다고 하기에 마음대로 하라고 쏘아 부쳤다.

하도 필자가 꺾이지 않자 담당 형사는 서대문 경찰서장의 계고장을 갖다 밀며 못가게 압박한다 . 필자는 굴복하지 않고 갈 태세를 보이자 그러면 자기차로 가 보자고 한다. 같이 가면 좋다고 했다.

어둠이 진 날씨에 형사차랑에 탔다. 당시 나는 서울지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를 잘 모르나 이 형사는 참가할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서 한강 다리를 몇 번 왔다갔다 하는 것 같다.

나중에는 배가 고파서인지 식당에 들어가서 저녁밥을 들고 가자해서 모식당에 내려서 저녁을 먹는데 소주 한병을 시키더니 한잔 따라주며 마시라고 하기에 밥도 소주도 일체 거부했다.

시간을 지연시키려고 소주 한병을 다 마신다. 담배를 한 대 피우더니 가자고 한다.

이 때 술을 든자에 생명을 맡길 수 없으니 여기서 하안동 조카집으로 택시 타고 가겠다고 하니까 술을 마셨기에 할말을 잃고 그러면 택시타고 하안동 조카집으로 가라고 한다

그래서 캄캄한 어두운 밤길에 도로로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기독교회관에 갔다.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민가협 임기란 어머님들과 백기완선생과 권오헌선생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출옥한 우리동지들은 전국에 50여명 되는데 알고 보니 담당형사들이 모두 차에 태우고 어떤 공원이나 놀러 간다 해서 참가 하지 못한 것이었다.

일찍 나온 최남규선생, 한백렬선생 서준식선생과 강종근선생 그리고 사회안전법 폐지로 나온 권낙기 선생, 임방규선생, 필자뿐이었다.

환영대회에서 모두 한마디씩을 했다.

사실 80년대 전까지는 15척 담 안에서 밥이 끓는지 죽이 끓는지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않는 참으로 암흑의 세상이었다

80년대 말부터는 민가협어머님들의 인권단체들이 감옥 안의 우리동지들을 면회 한 후부터는 감옥안 사정이 외부에 알려졌기 때문에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었다.

환영대회를 마치고 저녁밥을 들고서 신사동 누님집으로 오는데 응암 5거리에서 형사들이 내가 틀림없이 한강에서 택시타고 기독교 행사장에 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뒤따라 기독교회관에서 환영대회를 지켜보고 있다가 신사동 누나집으로 갈 것이라 생각하고 응암 5거리에 목 받고 있다가 연행해 서대문 경찰서에 유치되었다.

가서 보니 임방규선생도 연행되어 와 있는 것을 보았다.

경찰서에서 하루밤을 새면서 조사를 받았다. 이튼날 신사동 누나가 와서 보증을 서고 누나집으로 갔다.

그 후 거의 일년 가까이 되었을 때 기소유예 처분을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당시는 초창기여서 보안관찰처분을 받는 사람이 관찰법 위반으로 기소 된 동지들이 없었다.

사람이란 한번 결심하면 어떠한 난관이 조성되더라도 끝까지 해내고 마는 의지적 결단을 실천의 결과물로 내 놓아야 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참고@ 세계 기네스 북에 올려진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선생이 출옥 후 낙성대 만남의 집에 계실 때 환영대회를 못하게 경찰이 낙성대 집을 에워싸고 접근을 불허했으며 그후 고대에서 환영대회를 하려고 준비했는데 경찰들이 학교를 에워 쌓고 접근을 막았었다.

그래서 외국어 대학에서 조촐하게 환영대회를 가졌었다

당시 사회적 분위위기는 출옥한 우리 동지들에 대한 감시가 매우 심했다. 김종필이 국무총리였는데 미국 가서 자기 상전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이 출옥해서 거리를 활보하는 꼴을 어떻게 볼 것인가하고 말했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2023년 5월 23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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