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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63. 비전향말살책에 희생된 동지들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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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3-03-11 19:17 조회2,6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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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63

비전향말살책에 희생된 동지들을 잊을 수 없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감옥 투쟁중에 수많은 동지들이 조국과 인민 위에 사랑도 청춘도 재산도 생명까지 다 바쳤다. 동지들 중 잊을 수 없는 동지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1957년 대전감옥에서 폐결핵으로 병사에 입원중인 박ㅇㅇ동지인데 당시 안상현 의무과장이 맡았다. 이자의 말은 빨간고추가루도 안 먹는다 하면서 폐결핵에 전향하지 않는다고 약도 주지 않아 결국에 희생되고 말았다.

박동지는 고향이 전남보성으로서 1954년도에 백운산에서 당 지도부 보이병으로 투쟁하다가 체포되었다.

이는 비전향자로서는 대전감옥의 첫 희생자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2) 대전감옥에서 자결한 박병일 동지, 이영훈 동지, 황필구 동지가 희생되고 말았다.

박병일 동지는 전남보성이 고향이며 징역 20년을 받고 공주감옥에서 살다가 대전감옥으로 이감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1964년 3월 8일 대전 특별사 4사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목욕하는 날이기도하였다.

대전 4사는 76방인데 언제나 비번 근무자가 얼른 목욕을 시키고 퇴근해야 되기 때문에 목욕시간은 일이분이고 돼지 털이 다 볏겨질만큼 뜨겁게 목욕물을 끓여 주기 때문에 처음하는 사람은 수건을 적실 수 없어 그것도 방에 들어와 때를 벗겨야 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목욕날 안 싸우는 때가 없었다. 그날도 목욕시간이 짧다고 실랑이를 하는 중에 목욕탕 복도에는 물기가 많아서 미끄럽기 짝이 없었다.

이 와중에 간수가 미끄러져 넘어졌는데 병일동지가 밀어서 넘어졌다고 했으며, 당시 소제가 나서 시비를 걸다가 미끄러져 목욕탕 문이 깨젔는데 이를 박병일 동지가 했다고 계획과에 보고하여 4사 먹방에 수정을 채워 집어넣고 영치금 20원으로 깬 유리 보상조치를 취했었다.

먹방에 수정을 채우고 놈들이 반항한다고 두들겨 패니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목매 자살하였던 것이다

저녁밥을 소제가 넣으려고 식통을 열러보니 창틀에 목매달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 먹방에서 나오면서 사람이 죽었다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옆방 친구들이 알게되었다.

이 먹방은 감옥 안의 감옥이다. 나도 이 먹방에 몇 번 들어가 있었는데 내 키가 적은데도 모로 누워도 발을 꼬부려야 하였다. 변기통이 있고 위 공기구멍을 조그마한 창틀로 만들어진 징벌방으로 사용했다.

이를 안 사방동지들은 3월9일 내 옆방에 있는 동지가 시찰구에 대고 단식투쟁으로 항의하자고 하며 모두가 큰소리로 사람 죽이지 말라고 사방이 떠들썩하니 이에 놀란 윤병희 소장놈은 깜짝 놀라 복도 중앙과 고망대에서 총을 쏘았었다.

대전감옥 생긴 후 이렇게 총포사격을 가한 것은 역사상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후 3일간 단식하는 동안 감방별로 불려나가 여러 군데서 두들겨 패면서 강제로 급식하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투쟁을 3.9투쟁이라 칭했던 것이다.

희생된 박병일 동지 시신을 어떻게 처리한 것인지 지금껏 모르고 있다.


이용훈동지는 소위 간첩으로 무기형을 받고 비전향장기수로 복역하고 있었다. 나와도 한 방에 한달쯤 함께 있었다. 후퇴 후 북쪽에 갔다 내려와 체포되었다. 사실 인테리로서 온후한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사상은 확고부동하였던 것이다.

딸이 매월 편지와 영치금도 자주 넣었다. 고혈압 환자였다.

이용훈동지는 자기 개인의 이익보다 전 대렬의 이익을 위해 처우문제와 강제전향문제에 소장이나 과장 면담도 했었다.

당시 65세이고 30년 징역을 살면서 적들의 처우와 전향공작에 이 이상 더 버틸 수 없었고 그렇다고 사상을 버릴 수 없어 1985년 10월 24일 동지들에게 “통일된 우리의 조국에서 여러분의 무궁한 번영을 누리시기 바라며 조용히 갑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이다.


황필구동지는 71세의 고령인데 소위 간첩으로 30여년 비전향자로 살면서 전향말살책 속에서 두들겨 맞아 절뚝거리며 언제 까지나 적들의 탄압속에 살 수 없어 마지막을 깨끗이 정리하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1985년 11월 19일 자결로서 생을 마감했다.

대전에 살 때 나와 몇방 건너 있어 통방은 한번 했었다. 전북 고창에 묘소가 있고 5종 동생이 살아있었다.

특히 강동찬동지는 무기형을 받고 비전향장기수로서 적들의 비전향말살책 속에서 혈압이 130에서 220까지 오르는 상태속에서도 누구보다 치료는 고사하고 강제 전향에만 매몰되어 각종 고문구타를 당하는 가운데 혈압이 터져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가 반신불수 임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전향에만 매달려 끝내 희생되고 말았다.

아주 강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 못지 않게 놈들과 잘 싸웠으며 대신 누구보다 많이 두들겨 맞았으며 탄압을 많이 받았던 잊을 수 없는 동지다.


조용순동지는 해방후 노총 사무총장을 하였다. 조용순동지는 고혈압 반신불수자로서 끝까지 비전향을 고수한 동지로서 광주에 살 때 몇방 거너편 독방에 기거 중인데 운동나갈 때 누구라도 업어 나가지 않고는 운동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담당 간수에게 말하여 내가 업고 나가기도 했었다. 그때 뒤로 재쳐 업다가 허리를 삐어 지금도 허리가 아파 구부렸다를 몇 번하면 아파 못한다. 그래서 그가 비전향을 고수하면서 작고 했지만 잊지를 못한다.

조용순동지도 강동찬 동지처럼 놈들의 고문구타속에 혈압이 터져 희생되었다


3) 광주 감옥에서는 김규호동지와 신춘복동지들이 놈들의 비전향말살책 속에서 자결로 희생되었다.

신춘복동지는 대전에 7사에 있을 때 나와 한방에 있었다.

한방에 있으면서 삐삐통신도 밤에 똥통에서 듣고 창틀에 올라 8사동지들에게 전하기도 한 동지이다. 광주에 한 사방에서 살면서 놈들의 비전향말살책 속에서 갖은 고문구타를 많이 당해 정신이 좀 희미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1975년 11월 22일 도저히 더 이상 살 수 없기 때문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신춘복동지는 서울 성동구에 친척들이 있었다

내가 시신을 입관하는데 입회하겠다고 담당에게 말한 것을 적들이 알고 불려나가 다른방은 가만히 있는데 앞에 나서 선동한다고 두들겨 맞기도 했었다.


김기호동지는 조선에 있을 때 농민 신문사 주필을 했으며 인텔리로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향공작이 집중해 있었다. 위장이 나빠 한 숟갈 입에 넣으면 300여번 씹어야 소화가 되기 때문에 약이 없으면 살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적들은 강제 전향을 시키는데 약을 못먹게 다 압수해 가고 주지 않고 고문구타만 하고 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자각한 나머지 목매 자결하였다. 시신은 강진 선산에 묻혀 있다.

전주감옥에서는 탁해섭동지가 비전향말살책속에서 자결로 희생되었다.


4) 대전 감옥이 비전향을 이유로 감호처분 시켜 아직 감호소가 개설되지 않아 대전 감옥 특별사 중 제 8사를 쓰고 있을 때 하야청 동지가 자결로서 희생되었다. 하야청동지는 2차 전쟁중 쏘련군대에 포로가 되었던 동지다.

고향 집으로 가는데 남쪽을 거쳐 가기 때문에 붙잡아 고향이 미덥지 않다고 인천감옥에 넣었다가 석방시키지 않고 있는데 1975년에 사회안법이 시행돼 감호처분시켜서 대전 8사에 수용중 감옥에서 살다 죽을 것 같아 목을 매여 자결하였다. 감호된 후 첫 자결자의 기록을 남기었다.


최석기동지와 박융서동지는 대전감옥 사형장이 있었는데 이 사형장을 제 2병사로 개조했으나 강제 전향 제작소가 되었다.

최석기동지는 고향이 북쪽이고 소위 간첩으로 무기형을 받고 대전감옥에 살았는데 제 2병사에 폭력깡패 재소자 조돈웅외 1명과 함께 넣고 국방색담요를 뒤집어 씌우고 무지막지하게 구타했고 심지어 바늘로 찌르는 고문까지 하여 1974년 4월 4일에 희생을 당했다.

이 희생으로 검찰에까지 불려 나갔으나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박융서동지는 1958년도에 내려왔다가 체포되어 무기형을 받았다 내려올 때 중좌계급장을 달고 보안대에 근무하다가 내려온 동지다.

박융서동지는 7사 독방에 있었는데 강제전향 시키려고 운동장에 끌고나가 두들겨 패고 제2병사에 집어넣고 고문구타를 거의 매일 당하고 있는 마당에 더 이상 살 수 없어 머리를 벽에 들이받아 피를 흘리면서 '나는 먼저갑니다 전향하지 말기바란다. 강제전향시키지 말라'라고 유서를 벽에 써놓고 자결했다.


5) 새로 개설된 청주보안감호소에서 희생된 동지가 16명인데 특히 김용성동지와 변형만 동지는 1980년 7월11일 집단단식 투쟁 때 고혈압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강제 급식 과정에서 희생을 당하고 말았다.

이상율동지는 구빨지로서 순천군당위원장도 하고 전남 조계산지구 위원장을 하다가 1954년에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살고 비전향 출옥하여 구례군 광의면에서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고 살았는데 비전향을 이유로 감호처분되어 청주보안감호소에 살면서 뇌낭충증에 걸렸으나 처음에는 꾀병한다고 치료도 제대로 해주지앉고 전향공작에만 혈안 되어 있었다.

결국 다 죽게 되니 그때사 사화병원에 나가 뇌찰영을 하니 뇌낭충증임을 확인 했으나 이미 치료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드디어 1987년 2월17일 독방에서 희생되고 말았다. 시신은 가족이 찾아가 광의면 공동묘지에 묻혀있다.


공인두동지는 구빨찌산 출신으로 1950년 9.28 후퇴 후 경남 동부지구당 위원장까지 한 동지로서 20년 만기로서 비전향 출옥했는데 두달만에 비전향을 이유로 세기의 악법인 사회안전법에 의한 감호처분되어 청주보안감호소에서 비전향자로 살았는데 결국 고문구타를 다 겪는 과정에 고혈압으로 희생당하고 말았다.

시신은 가족이 찾아가 유분을 바다에 뿌리고 말았다 지금껏 뿌린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한편 결혼 생활 6개월밖에 못했는데 사모님은 개가 하지 않고 20여년을 기다리다 만났으나 출옥한지 두달만에 다시 잡아가는 경찰들에게 두다리를 쭉뻗고 ‘그렇게 일찍 잡아가려면 왜 내보냈냐'고 목메여 울었다는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 돌아신지 오래 되었다.


대구감옥에서 징역살이한 김대석동지는 제주 출신으로 1965년에 국가보안법으로 10년형을 받고 대구감옥에 살면서 강제 전향공작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구타를 매일 당하면서 만기 4년을 남겨두고 도저히 버틸 수 없어 결국 1971년 10월 4일에 자결하고 마는 기록을 남기었다.

이상 많은 동지들이 있지만 다른 기회에 기록할 것을 다짐하면서 먼저 위의 동지들을 기록으로 남긴다.

2023년 3월 7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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