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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59. 청주보안감호소 비전향말살책은 어떻게 자행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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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2-08-26 10:44 조회2,54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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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59

청주보안감호소 비전향말살책은 어떻게 자행했는가?

글: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1976년 5/29일에 대전형무소 제 8사를 임시 보안 감호소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피감호자 신분으로 감호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인간이하의 열락한 처우속에 전향강요만 당하다가 동년 11월 18일에 새로 건축된 청주보안감호소로 이감했다.

이감 가기전에 3명이 죽어나갔다 일명은 자결했다.

청주보안감호소는 청주감옥의 담벽을 사이두고 한쪽은 청주감옥이고 다른 한쪽은 청주보안감호소이다.

1-4사까지 있는데 모두 2층감옥이다 (현재는 전국여자교도소). 환자동지들은 4사 상층에 있고 그외에는 삼층 상하에 있었다.

4사에서 바라보면 넓은 공터가 있는데 여기에 공장을 지어 작업시키려고 했으나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정권을 잡은 바람에 삼청교육대 훈련장이 되어 사람들을 개 돼지 취급하며 훈련을 강행하는 것을 목도하기도 했는데 비전향자들도 시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때 이 소식을 듣고 집단 단식투쟁을 하겠다하니 무마되고 나중에에는 우리 동지들 운동장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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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호소에 들어온 동지들은 1975년에 사회안전법이 제정되어 비전향자로 출옥한 동지들을 일시에 체포하여 전향을 하지 않는 한 모조리 잡아들여 감호 처분시켰던 것이다.

일반 감옥에서도 비전향말살책을 감행했으니 끝가지 굴하지 않는 동지들은 만기가 되어도 출옥시키지 않고 감호 시켰었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도 출옥하지 못하고 2년 가형을 받고 만기 되어도 출옥하지 못하고 감호처분 되었던 것이다.

필자 번호가 088번인째 감호되어 088번이다. 피감호자는 일반재소자와 달리 숫자 번호 앞에 0자를 붙여 메기는 것이다.

처음 입소 했을 때는 운동시간은 15분이었다.

목욕탕은 없고 매 때 식사는청주감옥에서 담벽을 사이에 둔 건물이라 벽문을 통해 배달했다.

그러다보니 물 부족 현상을 많이 느꼈다

특히 여름에는 목욕탕이 없어 몸을 닦을 수도 없었다.

감호소 간수들은 대전 광주 감옥에서 전향말살에 일가견을 가진 인간들이다,

그곳 소장은 이정문 , 과장은 오기수, 계장은 뱐태환, 의무과장은 오기수이고 간수는 곰보 정인성 간수였다.

교화과장은 처음에는 김치연, 나중에는 강철령 놈들이다.

이 두 놈은 대전과 광주에서 깡폐까지 동원한 강제전향에 일가견을 가진 악명높은 놈들로 유명하다.

교화사는 광주감옥에서 강제 전향공작에 악명높았던 박종호 신학운 놈들이다.

그런데 13년만에 폐지될 때까지 청주보안감호소란 간판조차 달지 않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청주보안감호소 자체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특별사 관구부장은 천일회이고 사방담당 간수는 민동기와 손영식이었다.

감호과에 배치된 교화과장과 교회사들은 광주와 대전에서 전향 말살책을 제일 앞장서 맹성을 떨쳤던 악명 높은 사람들이며 소장을 비롯한 보안과 직원들도 역시 광주와 대전에서 비전향자들을 전향시키는데 일가견을 한 사람들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감호소 처우는 일반 형무소 처우와 동일했으며 오히려 죄 없는 사람들을 가두어 두고 모든 처우와 환경을 악하게 만들어 배기지 못하고 전향해 나오도록 하는 방법을 썼던 것이다.

식사는 이웃 청주형무소에서 달아다 먹고, 운동시간은 10-15분이고, 목욕탕도 없고 감방에 물 주는 것도 제한되어 있어 오뉴월 염천에 물이 적어 수건으로 물을 묻혀 땀을 닦는 것을 감방에서 닦는다고 불러내 때려 패면서 전향 않고 들어 앉아 있으니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하며 이 고통을 격지 않으려면 빨리 전향하고 나가라고 전향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서적도 몇 권으로 제한하고 가족접견은 전향수단으로 이용하며 환자들에 대한 진찰치료는 형식적이고 중환자들에 대해서는 병을 미끼로 전향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본인은 척주결핵을 앓고 있는데도 의무과 병실에 입원도 시켜주지 않고 약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감호당국이 얼마나 비열하게 환자들을 전향수단으로 이용했는가 하는 것은 하나의 예를 들면, 같은 동료인 이상율동지는 뇌낭충에 걸려 독방에서 사경을 해매다가 진찰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채 죽어 나가기도 하는 것을 목격했다.

당시 이정문 소장은 죽는 한이 있어도 전향하지 않는 한 병실입원이나 진찰치료도 제대로 해 줄 수 없는 것이 국가의 시책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면서 전향하라고 했었다.

오기수 의무과장도 의사의 본분을 여러분들에게는 할 수 없는 것이 현 시책이므로 어찌할 수 없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열락한 처우속에 전향강요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서준식동지 서적건을 동기로 1980년 전두환 군부정권 때 7월 11일부터 집단단식에 들어갔다.

악법인 사회안전법을 폐지하라, 피 감호자들을 즉시 석방하라, 처우를 개선하라, 국회청원이나 상부 면담을 보장하라, 전향강요 하지 말고 고문구타하지 말라는 요구 조건을 내 걸고 집단 단식투쟁을 했다.

그러나 감호당국은 문제되는 것을 해결하기는 고사하고 감호소 전 직원을 물론 옆 청주감옥 직원까지 총 동원시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강제급식에 들어갔다.

오기수 감호과장의 직접 지휘 하에 감호과 간수2명과 의무과 정연성 간수가 직접 강제급식을 자행했다. 강제급식의 실태는 다음과 같다.

의자에 앉히고 양 손목을 의자 뒤로 돌려 수정을 채우고 찍개로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하고 우유에 왕소금을 잔뜩 타 고무호스를 집어넣고 깔대기에 소금물 한 사발을 부어 넣는 강제 급식은 일종의 고문보다 더한 고문이었다.

이 강제 급식과정에서 김용성동지와 변형만동지가 현장에서 즉사함으로서 강제 급식을 중단했었다.

그렇게 죽여 놓고 상부에는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허위 보고한 것이 과거 의문사위 조사과정에 사인이 명백하게 백일하에 들어나기도 했다.

본인도 강제급식을 당하며 11일 단식을 했었다.

집단단식이 끝난 후 보복적 탄압으로 얻은 후유증으로 죽은 김찬규동지는 청주교도소 공동묘지에 강제급식 과정에서 타살된 변형만동지와 나란히 묻혀 있었다.

청주감호소에서 전향강요와 열악한 처우속에서 얻은 병의 후유증으로 이상률씨 최점수씨 공인두씨 김규찬씨를 비롯한 6명이 죽어나갔다

이런 환경속에서 나는 다행히 안 죽고 살아 나왔지만 감옥에서 얻은 병과 고문들의 후휴증으로 만성위염을 앓은 지 오래 돼 암으로 화할 수 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수술한 상태속에 12월 26일(6개월만임) 한 번 더 위내시경을 했는데 아직도 뱃속이 시원하지 않아 떼어낸 조직 검사 결과가 2015년 5일에 나온다는 진단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별 탈은 없으나 건강검진 받으라고 통보를 받고 있다)

좌골 신경통과 백내장 (수술한 상태인데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있으며)을 수술했으나 잘 보이지 않고 있다.(현재는 우측눈까지 수술해 약물치료를 받고있다)

그리고 이는 하도 모래와 돌밥을 많이 씹어 양쪽 어금니가 다 썩어 부분 틀니를 하고 있으며 청각은 감옥에서 물고문과 귀빰을 많이 맞아 한쪽 귀는 시신경이 거의 죽어 있어 몇 미터만 떨어 저 있어도 무슨 말을 하는지 분간 할 수 없는 상태 속에 있다. ((보청기는 하고 있으나 5m만 떨어저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 수 없다).

척주결핵을 앓아 지금도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몇 번만하면 통증이 나는 상태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현재는 뇌졸증 까지 있어 수술하면 터질위험이 있다해서 약물치료요법을 쓰고 있다)

감호소 생활 13년을 포함한 35년 9개월을 꼬박 살고 출옥했으나 안 죽고 살아남아 있는 일가친척들은 반가워 하기보다 두려움을 갖고 대하는 것이었었다.

연좌제가 폐지되었다고 하지만 군 장교나 정보계통에 시험에는 합격했으나 면접에서 비전향자가 친척 중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떨어진 원한이 나에게 돌아오는 것을 목격하고 가족 친척끼리도 이간시켜 의리관계를 파괴시키는 현실을 겪고 있는 것을 달가와 할 사람이 어데 있겠는가 이다.

참으로 원한의 불길은 하늘을 솟구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감호당국은 피감호자들에게 형무소 있을 때와 똑같이 전향강요를 당했다는 것을 의문사 진상위원회에 진상을 밝혀 달라고 제기하여 국가의 불법적인 공권력에 의해 강제 전향을 당하고 많은 동료들이 타살 되었다는 것을 밝혀냈으며, 당시 가해자들도 조사과장에서 시인한 사실을 지금에 와서 과거사 조사를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 변론을 제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재판때)

과거 의문사 위나 진실위도 같은 국가기관이 아닌가

국가는 진솔하게 사죄하고 그 피해에 대해 배상을 해야 하고 다시는 이런 비정상적인 역사가 되풀이 않도록 대비책을 강구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도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는 것은 비난 받아 마땅하며 진정한 국민화합과 상생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사법부는 비전향 말살 책에 의한 각종 고문 구타 행위에 대한 국가의 불법성을 공명정대한 판결로서 단죄하기 바람과 동시에 지금껏 받은 피해에 대한 합당하게 제기한 배상액을 그대로 판결해 줄 것을 촉구했었다

.

재판에서 20명이 민사소송을 제기하여 고법에서 패하자 대법에 소송비도 본인이 부담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제기해도 승소할 가능성이 없다해서 포기하고, 10명만 제기하여 승소해 쥐꼬리만 한 배상을 받기도 했다. 원래는 민간인 학살자들이 제기한 1억을 청구했는데 고법에서 패하자 대법에 소송할 돈이 없어 5천만원을 낮추어 청구했다 마지막에 1억으로 돋구었으나 결과는 5천만에 대한 것만 판단해 3천여만원만 승소한 것으로 마무리 되고 말았다.

그러나 국가는 지금껏 사과 한마디 않고 있는 현실이다.

2022년 8월 25일 필자 올림


참고: 이번 글의 내용을 차분히 읽어보면 비전향 말살책은 얼마나 악독했는가를 가늠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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