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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그리운 김동섭 선생, 김광삼 선생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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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2-07-11 20:32 조회2,5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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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김영승 선생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동안 고난 속에서 감옥생활을 하였던 장기수 선생들의 묘소를 통일운동 동지들과 함께 답사하며 고인들을 기리고 있다. 이번에는 김동섭, 김광삼 두 애국자의 묘소를 찾아 추모제를 올리며 쓴 글이다. [민족통신 강산 기자]


글: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그리운 김동섭선생을 추모하면서

김동섭선생은 1925년에 옛 쏘련 하바로프스크에서 출생했다.

이는 부친께서 조선독립운동을 위하여 쏘련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쏘련에서 15년을 살다가 부친등에 업혀 만주로 나왔다(이때 5살이었다)

나온 것은 부친이 특수임무를 띠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1944년에 강제징용을 당하여 722부대 지하군수품 기지에서 강제 노동을 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만주에서 치안유지회에 참가하여 토호세력 척결사업을 했다.

1946년에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여 2만5천리 장정하면서 장춘 심양을 거쳐 만리장성을 넘어 1948년 북경에 입성하는데 장개석군대를 격퇴시키는데 큰 공적을 세우기도 했다.



1950년 4월에 중국 인민해방군 사령부로부터 조선인민군 부대로 전출 통보를 받고 일주간 기차를 타고 원산 명사십리에 도착했다.

이때 어렸을 때 걸렸던 폐디스토마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가 전쟁이 일어났다.

평양 사령부로 들어가 인민군으로 낙동강 전투에도 참가 했다.

1950년 9.28 후퇴를 맞아 북상하지 못하고 남원 장안산에 입산하여 빨찌산투쟁을 전개했다.

덕유산 회문산 지리산 등 무주구천동까지 전투를 벌리니 백두산호랑이라는 별칭까지 받았다.

1952년에 지리산에서 연대장 직책을 통고 받고 10여명의 대원과 함께 이동하다가 적들에게 포위당하여 10명은 전사하고 동섭선생만 생포되고 말았다.

생포된 후 광주포로수용소에 감금되어 전쟁포로인데도 일반형사 재판에서 무기를 선고 받고 사는 중 1960년 4.19혁명에 의하여 감형을 받아 20년 2개월을 살고 1972년 4월에 출옥했다.

출옥 후 대전갱생보호소에 들어가 구두닦이 고용살이 고물상 등을 하면서 결혼도 했으며 1988년에는 대장암 투병생활을 하기도 했다.

김동섭선생은 2019년 1/23일 오전 10시에 그리운 신념의 고향을 밟지 못하고 운명하고 마는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당시 95세)

선생은 제 2차 송환자이며 전적지 답사도 동지였던 임방규동지,고 송계체동지와 같이 했다.


그리운 김동섭 선생이여!

선생의 일평생은 전형적인 조선 독립투사의 가정인 동시에 드문 팔군 출신으로 인민군에 편입되어 조국해방 전쟁시기에 영웅적으로 잘 싸운 동지임을 생각할 때 우리 후대들에게 많은 경험과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살아생전에 그리운 고향을 찾지 못하고 미제와 주구들에 대한 원한을 풀지 못한체 가신 선생을 생각할 때 더없는 적개심에 불타고 있지만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으시고 조국통일 위에 영생하기 바랍니다.

김동섭선생 사모님과 아들이 살아 있어 시신은 음성땅에 묻혀 있습니다. 가족들과 연계는 아는 사람 있거든 알려주세요.





(아드님과 통화가 되었습니다.자기는 타 지방에 있어 못가고 어머니는 갈 수 있기에 전화 한번 하겠다고 했습니다.묘소는 음성 생극추모공원에 있다고 합니다.

결국 공원에 따님부부와 사모님이 와서 반갑게 인사를나누고 제를 올렸다.)


2022년 7/10일 전국묘소답사반 일동 올림






김광삼 선생을 기리면서

김광삼 선생은 1915년 6월30일 함경도(추정)에서 출생했다.

1970년대에 대전 4사에 비전향 장기수들을 수용하고 있을 때 인근 방에 있었기 때문에 검방 할 때 복도에 감방문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가 검방이 끝나면 방으로 들어갈 때 본 인상이 남아 있다. 그리고 내가 청주보안감호소에 있을 때 김광삼 선생도 감호처분 받고 있었다

원래 고혈압 환자이기 때문에 환자들만 딴 사방에 수용되고 있었다.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다 죽게 되는 환자부터 출옥시키는 사이에 출옥하게 되었다.

아마 고향이 함북출신으로 추정 된다. 그것은 말씨가 함북사투리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옥할 때 김복성 선생도 함께 출옥했는데 어디서 살다가 가셨는지 알 길이 없다.

김복성 선생의 고향은 전남 장성이란 것만 알 뿐이다.


광삼선생이 꽃동네에 들어가 있다가 1994년 4/1일에 운명한 것으로 보아 남쪽에는 아무런 연고자가 없다는 것이다.

김광삼 선생이시어!

조국통일의 과업을 안고 내려 오셨다가 이루지 못하고 적들에게 체포되어 전국 감옥에서 가장 일제감옥을 실질적으로 연상케 하는 대전감옥에서 인간이하의 처우속에 고혈압환자를 가리지 않고 전향에만 혈안 되어 무지 막대한 탄압을 받는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옥중투쟁을 승리로 장식해 출옥을 했습니다. 그러나 반겨주는 사람 없고 고혈압에 일도 제대로 못해 겨우 호구책만 유지하며 사는 사람을 남녘정권은 세기의 악법인 사회안전법에 의하여 보안감호처분을 시켜 청주보안감호소에 집어넣고 만 만행을 자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초지일관 일편단심으로 우리 모두의 곁을 떠날 때까지 살아 있는 동지들이 알지도 못한 체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야 찾고 있음을 살아있는 당자로서 말문이 막히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제라도 선생의 묘소만이라도 찾아 참배의 길을 열어주기 위한 노력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운 후배들을 칭찬해 주기 바랍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내려놓으시고 조국통일의 길 위에 영생하기 바랍니다,


장지는 충청도 음성 꽃동네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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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공동묘지에 묻고 나무판데기에 이름을 써서 꽃아놓았는데 지금은 공동묘지를 새롭게 단장해서 화장하여 묻고 묘비석을 표시해 놓고 있었다.

이번 추모제는 충북진천 농민회 통일위원회 겸 충북농민회 통일 위원회와 함께했다.

이번 추모제는 충북농민회가 묘소 답사반을 초청해서 강진농민회 초청을 받았으나 못가고 진천 박기수 선생집에서 일박하고 7/10일 오전 10시경에 김광삼선생 추모제 지내고 오후 2시에 김동섭선생 추모제를 지내고 상경했다. 농민회 동지들 수고 많았습니다.

2022년 7월 10일 전국묘소답사반 일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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