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백: <5·18로 깨어난 해외동포, 세계화에 앞장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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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9-07-20 02:43 조회2,14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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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로 깨어난 해외동포, 세계화에 앞장서다. *글: 위인백 광주여대 교수 (제38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 상임위원장) 오늘날 위대하고 숭고한 5·18항쟁정신이 세계화로 발전해나가는 것은 의로운 청년· 학생들은 물론 해외동포,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한 재유럽오월민중제의 역할이 크다. 필자는 1988년에 이어 올해 제39주년 재유럽오월민중제의 초청을 받아 정범구주독 대사와 위르겐 핀츠페터 부인 등 150여명과 광주mbc가 참여한 가운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민족통일에 대한 기조강연을 하고, 뒤이은 부대행사를 통해 동포들에 대한 눈물어린 감명을 받았다.
재유럽오월민중제는 파독 간호사와 광부를 비롯한 유학생들이 영화 ‘택시 운전사’로 널리 알려진 위르겐 핀츠페터기자에 의해 광주의 참상보도를 접하고, 공분한 나머지 같은 달 30일 600여명이 베를린 거리를 누비며 광주학살을 알리고 규탄하는 데모로 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동포들은 독일어로‘한국 민주주의’ 한글로는 ‘광주민주화투쟁을 지지한다.’라는 현수막을 펼치며 데모를 하고, 유럽 곳곳에서 성명을 발표하면서 유인물을 배포하고 이를 보도토록 함으로서 국제사회에 알렸다.
이렇게 시작된 재유럽오월민중제는 현재 한민족유럽연대, 베를린 노동교실, 민중문 화모임, 코리아협의회 등 4단체가 주관하면서 행사경비도 참가자들 각자 15만원 상당 의 참가비로 충당하면서 원거리인 500~700킬로미터씩을 자비로 달려와 모든 일을 자 원봉사로 2박3일의 짧지 않는 일정을 39년 동안 한해도 빠짐없이 진행해왔다.
오늘날까지 오월민중제를 주관하고 있는 간호사와 광부들은 광주참상을 보고나서 사회운동에 눈을 뜨고,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오면서 때로는 친북좌파라는 악평을 듣기도 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국내시민단체와 호흡을 맞추며 엄동설한에는 손발에 동상이 걸려가면서까지 음식을 만들어 파는 돈을 모아 수없이 국내로 송금했다.
더욱이 독일인 균터 프로오이덴베르그 교수는 5·18항쟁과 동포들의 진정어린열정에 감탄한 나머지 죽기 전 100만 마르크의 거대한 유산을 한국의민주화를 위해 쓰도록 기부한바 있고, 독일연방 유우겐 마이어 녹색당의원도 적극적인 연대활동에 이어 5·18행사에 참석하려다가 국내입국을 못하고 강제출국당한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등 국제적인 연대로 5·18의 세계화에 앞장서 왔다.
돌이켜보면 국내에서 최초로 1988년제8주년 재유럽오월민중제에 초청을 받았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엄혹했던 시절이라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었고, 날자가 임박해서야 허가를 해줘 출국했으며, 동포들로부터 열렬한 환대를 받았지만, 그들의 활동모습을 보니 환대가 거꾸로 되었음을 깨닫고 송구스런 마음이 앞섰다.
그때 금남로와 도청에서 날밤을 새운 항쟁과 505보안대에서 고문으로 의식을 잃고 국군통합병원응급실로 후송되어 몇 시간 만에 깨어나 2개월 넘게 입원치료를 받고, 상무대영창과 교도소에선 읽을 책은 물론 면회도 없이 겪었던 생지옥의 나날을 증언 하자 동포들이 달려 나와 껴안고 엉엉 울어버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세계적인 음악가로써 동백림사건으로 곤혹을 치룬 윤이상선생께서 광주의 참상과 정신을 기리며 1981년에 작곡하신 ‘광주여 영원히’란 테이프를 제게 주시면서 오월관련자로서는 처음으로 찾아왔다며 광주를 대표해서 주신 감회가 새롭다.
그 후 5·18항쟁동지회장을 역임하면서 해외동포들의 헌신적이고 눈물겨운 투쟁에 감동을 받아 오월문제해결에 매진하여 5·18기념재단을 설립하고, 동포들과의 가교역 할을 하면서 30년 동안 한해도 빠짐없이 연대사를 보냈으나 동포들의 노고를 위로하 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제는 우리가 그분들의 노고를 어루만지고 위로할 때가 되었다.
오월정신을 계승 하다 아직까지 귀국을 못한 분, 그리고 강제출국당한 분들을 내년 40주년 행사에는 반드시 초청해 위로하고 감사하는 자리를 마련함은 물론, 해외동포들에 대한 투쟁의 역사도 조명되도록 기록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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