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노래패<우리나라>,20일 20주년 기념공연(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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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9-07-18 23:55 조회2,68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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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노래패들이 많지만 민족민주진영의 노래패들, 즉 통일운동진영의 노래패가 20년을 한결같이 활동한다는 것은 그 활동자체가 <고난의 행군>이라고 말할 수 있다.특히 반민족, 반통일 정권이 들어섰을때는 그 탄압이 말 할 수 없이 심했기 때문이다. 그같은 어려움을 딛고 20여년을 지속해 왔다는 것은 그야말로 감탄 자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대표적인 대표적인 통일운동진영의 언론인 자주시보 7월17일자는 노래패 <우리나라>에 대해 특별보도로 보도했다. 이 보도 내용은 해내외동포사회에 화제가 될만하다.[민족통신 편집실]


20년이 됐어도, 늘 새로운 노래로 대중을 만나는 것은 설레요 |
기사입력: 2019/07/17 [14:04] 최종편집: ⓒ 자주시보 |
<통일조국의 새로운 만남, 민족의 노래 노래패 우리나라(이하 우리나라)>가 결성된 지 20년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이 채택된 뒤 금강산에서 평양에서 통일의 노래를, 일본에서는 민족의 노래를 부르며 ‘통일’을 상징하는 노래패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20년 동안 노동자, 농민, 철거민을 비롯해 투쟁하는 민중이 있는 현장이라면 어디이든 달려가 민중의 노래를 불러왔다.
200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노래패 <우리나라>의 노래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주한미군 철거가’, ‘벗들이 있기에’, ‘한결같이’, ‘우리 하나 되어’, ‘다시 광화문에서’, ‘가자 통일로’ 등 수많은 노래가 대학가에서 거리에서 불렸다. <우리나라>는 20년 동안 지금까지 총 400여 곡을 창작했으며 정규, 비정규직 음반 12개에 담긴 노래가 170여 곡이라고 한다.
7월 20일 오후 5시 성수 아트홀에서 <우리나라> 결성 20주년 ‘우리나라 스무 살 콘서트’를 연다. 큰 규모의 공연장이 이미 16일 다 예약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 결성 20주년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닐까.
어떤 이들에게는 20대의 청춘 시절을 어떤 이들에게는 촛불의 열기를, 어떤 이들에게는 삶의 한 부분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노래패 <우리나라>일 것이다.
노래패 <우리나라> 결성 20주년을 맞아 한선희 단원과 대담을 나눴다.
![]() ▲ 노래패 <우리나라> 한선희 단원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 노래패 우리나라를 만들게 된 이유와 당시 포부는 무엇이었나요?
- 20년 전 <우리나라> 단원들은 사회 진출을 막 시작하는 20대 후반의 나이들이었어요. 각 학교에서 민중가요 노래패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노래 운동을 사회에 나가서 더 하고 싶다는 마음, 사회 활동으로서 노래 운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저는 당시 경기남부총련 노래단 ‘천리마’ 활동을 했었는데 저를 비롯해 강상구, 지정환 등 4명이 발기인이 되었고, 그리고 ‘혁명동지가’를 만들었던 백자 씨와 마음을 모았죠. 같은 고민을 갖고 있던 건대 노래패 ‘아침햇살’에 활동한 김호, 이광석 씨도 뜻을 모았어요. 그리고 다른 노래패에서 활동하던 소화 씨도 함께 했고요. 같이 출발을 하지 못했지만, 민중가요 노래패가 통일운동 속에서 확고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노래패가 필요하다는 뜻에 공감한 분들이 많았고 도움을 많이 주었어요. <우리나라>를 결성하고 나서 이혜진 단원, 박일규 단원이 합류했죠.
◆ 20년을 돌아보니 어떤가요?
- <우리나라>를 만들 때는 무엇을 하던 설레고, 무엇을 하던 가슴이 뛰던 시절이었죠. 학생이라는 신분을 벗어나서 사회인으로 처음으로 진행하게 되는 음악 작업, 공연, 활동에 대한 책임감이 더 막중해졌죠. 사회인 노래패를 하면서 집에서의 제약을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다 빨리했어요(웃음). 결성한 해에 4명이 그다음 해에 1명, 모두 5명이 결혼을 한 거죠. 결혼하니 집에서는 자유로워졌지만 결혼 생활도 만만치 않은 거죠. 그래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굉장히 설렜고 두근댔고, 가슴이 뛰었죠.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벌써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지금은 가슴이 뛴다, 설렌다는 것은 예전 같지 않고요(웃음). 하지만 만나기 힘든 대중들을 만나는 현장이나 새로운 노래로 처음 만나는 자리는 항상 두근두근해요.
◆ 민중가요 노래패로 활동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거 같아요. 특히 가정을 꾸리면서 활동을 하는 데 재정적인 문제도 있었을 거 같은데?
- 사회인 노래패로 활동을 하면서 처음부터 월급을 주자는 결심을 했어요. <우리나라>의 첫 월급은 2만 원이었어요. 그때는 공연이나 음악 작업으로 수입을 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고, 연습과 모임, 연습실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때 유일하게 정기적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 2명이 있었는데, 2명의 월급에서 일부분은 사무실을 얻는 데 보탰고, 일부 운영금으로 나머지 단원들에게 월급을 준 거죠. 비록 작은 돈이지만 전업 음악가답게 활동을 해보자는 포부를 가졌죠. 결혼했으니 남편과 부인이 함께 가정을 책임지며,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지금까지 활동을 해왔어요. 초반에는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활동을 했죠.
◆ 20년 동안 <우리나라>를 지켜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우리나라를 사랑해주시는 팬들을 제외하고요)?
- 같이 하는 우리 단원들이죠. 우리 사람들이 착하고 성실하고 의리가 있고요. 무엇보다도 민중가요에 대한 확고한 자기 사명감과 민중가요를 좋아한다는 마음이 있으니 지금까지 올 수 있었죠.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아도 노래를 만들었고, 필요하다면 반드시 만들었던 노래들, 그리고 함께 부를 수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죠.
◆ <우리나라>가 만들어지고 얼마 뒤에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는 등 통일의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습니다. <우리나라>는 북에 가서 공연도 많이 했는데, 가장 기억이 남는 공연이나 에피소드는?
- 2000년 이후에 금강산에 자주 가게 되고, 북 동포들 앞에서 공연을 많이 했어요. 기억에 남는 것은 먼저 북의 공연 관람 문화에요. 굉장히 엄숙해요. 남측은 무대 앞에서 춤도 추는 문화가 있잖아요. 그런데 북의 동포들은 관람문화는 노래에 집중하고 너무 엄숙해서 박수도 잘 안치더라고요. 공연할 때 긴장하면서 북의 동포들을 봤던 기억이 나요. 잘 안 웃어주더라고요, 처음엔 이런 것이 어색했어요. 그리고 무대 뒤에서 만나게 되는 북측 공연 관계자들과 대화했던 기억들이 있어요. 특히 남성분들의 얄궂은 농담을 들으면서 북의 동포들이 이런 농담을 즐긴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느꼈죠. 그리고 그때는 금강산에 에어컨 시설이 부족했는데, 북측의 여성 출연진들은 뜨거운 햇빛 아래서도, 야외에서도 땀이 나는 상황에서도 화장을 너무 프로답게 잘 하는 거예요. 우리의 화장은 너무 밋밋하다며 서로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어요. 그래서 나중에 우리나라 여성 가수들의 화장이 좀 더 진해졌죠.(웃음)
2002년 10월 남북청년학생통일대회가 금강산에서 열리게 되었어요. 2002년 6.15 행사 때는 제가 출산 이후라 북에 못갔어요. 그래서 금강산에서 열리는 청년학생대회에는 반드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통일부에 방북 신청을 했죠. 그런데 천리마 출신이라고 강상구, 지정환, 저는 불허가 된 거예요. 그래서 속상한 마음을 억누르며 사람들을 보냈죠. 당시 <우리나라>가 금강산에서 부를 노래가 ‘통일이여 오라’였어요. 그 노래 1절을 솔로로 제가 불러야 했는데 <우리나라> 단원들이 몸이 못 가면 목소리라도 가자 해서, 반주에 제 노래를 입혀서 금강산에서 공연했어요. 금강산에서 녹음된 제 목소리의 노래 1절이 나오고 그 뒷부분을 단원들이 불렀어요. 목소리만 금강산에 간 적이 있어요. 그리고 북녘 동포들 앞에서 오고 싶었으나 사정이 있어서 못 오게 된 가수의 목소리를 담아왔다고 설명도 했다고 해요.
금강산이나 평양에서 만났던 북녘의 친구들이 기억에 많이 남죠. 그리고 북측 음악가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들도 있어요. <우리나라> 단원 중에서 통일이 되면 어디 어디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기도 했죠.
◆ <우리나라>는 일본에 가서 ‘우리 학교’와 동포들을 위한 공연도 많이 하셨어요. 일본에 가서 공연할 때 분위기와 마음은 다를 거 같아요. 어떤가요? 올해도 계획이 있는지
- 처음에 동포들을 만난 것은 2003년이었어요. 남북청년학생대회에서 만났던 청년들하고 인연이 되어서 공연을 하러 갔죠. 아마가사키로 공연을 갔어요. 첫 공연은 재일한청, 한통련 단체였어요. 이분들은 국적이 한국이지만 우리말이 잘 못해서 통역이 필요했어요. 그 때 현장에서 통역이나 무대 진행을 담당해주신 분들이 효고가무단 분들이었죠. 효고가무단은 총련계 소속이었어요. 자기 사업이 아니지만, 같이 무대를 책임져주었어요. 동포 사회에서 조직은 다르지만 함께 하는 모습을 보았죠. 그때를 계기로 해서 2004년에는 총련계에서 초청이 왔어요. 정부는 우리 국민에게 총련에 대한 안좋은 이데올로기가 심어놨잖아요. 솔직히 긴장했고, 국정원 등에 다 신고를 하면서 갔죠. 2004년 오사카 공연 큰 무대였어요. 오사카 공연부터는 모든 동포가 함께 해주었죠. 남측의 노래패가 동포들의 삶의 애환을 다룬 노래를 부르니 동포들이 공연 내내 울었어요. 그때 공연 배경화면으로 동포들의 삶을 담았어요. 나중에 동포분들이 우리들이 아는 노래이고 늘 불렀던 노래지만 남측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처지를 관심 있게, 이해하면서 노래를 부르니 눈물이 났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임진강’, ‘이것이 우리학교다’ 등 동포들의 삶을 다룬 노래와 통일 노래를 불렀죠.. 동포들이 당하는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 통일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 동포들에게 감동을 줬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지역을 바꾸면서 공연을 계속 갔죠.
2007년에 일본 정부에 의한 우리 학교에 대한 탄압이 크게 문제가 됐죠. 시가에 있는 초급학교를 일본 경찰들이 침탈한 거죠. 그 사건을 계기로 해서 이 문제를 크게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우리 동포들이 일본에서 차별과 탄압을 당하게 되면 안 되겠다 마음먹었어요. 우리학교가 있는 7개 지역 순회공연을 계획했어요. <우리나라>가 준비한 공연이니 모든 것을 자체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공연을 하기 위해 처음으로 ‘십시일반’ 모금운동을 했어요. 그런데 2~3일 만에 1,000만원이 넘게 모였죠. 그때 공연은 작은 학교에 직접 들어가서 했어요. 그때의 공연이 <우리나라>에게는 소중한 기억이 남아 있어요. 그때 권해효 배우, 김명준 감독과 인연을 맺게 되었어요.
올해는 <우리나라> 20주년을 맞아 그동안 만났던 동포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10월 중에 도쿄, 오사카, 고베 등에서 단독 공연을 할 계획이에요.
![]() ▲ <우리나라> 한선희 단원 [사진제공-한선희] |
![]() ▲ 노래패 <우리나라> 공연 장면 [사진출처-우리나라 페이스북] |
![]() ▲ 노래패 <우리나라> 공연 장면 [사진출처-우리나라 페이스북] |
◆ <우리나라>는 비단 통일만이 아닌 사회적 문제를 주제로 많은 노래를 창작해오셨는데요 한선희 단원이 가장 기억에 남는 노래가 무엇이 있을까요? 그 이유는....
- 그동안 놓친 부분이 있어도 웬만한 부분은 다 창작을 했던 거 같아요. 사회적 문제를 다룬 노래는 비단 <우리나라>가 만든 노래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작곡가 윤민석 선배의 노래도 많이 있어요. 한번 음악을 만들면 반응이 어떻게 될까에 관심이 생기죠. 대체로 <우리나라> 노래들은 때때로 원색적인 가사도 들어가기도 하고, 1집 이후엔 원색적인 가사를 극복하려고 했어요. 한번은 예전에 ‘오래된 수법’으로 인터넷으로 발표한 노래인데, 민주정권이 들어섰지만, 북에 대해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들이 나쁘게 폄하한 것을 다룬 노래였죠, 즉 언론의 행태를 비판한 노래에요. 많이 부르지는 않았는데 의외로 관심을 끌었던 노래였어요.
세월호를 다룬 노래 중에서 ‘나의 천사’는 음반에는 담았어도 현장에서 부르지는 못했어요. ‘애들아 올라가자’ 노래는 너무나 힘들었어요. 무대에서 2~3번뿐이 안 불렀는데, 대부분 집회 현장이었죠. 노래 부르기 전에 유가족 발언이 있는데 유가족의 발언을 들으면 감정 제어가 잘 안 되잖아요. 노래를 차분하게 불러야 하는데, 쉽지 않죠. 녹음할 때도 어려웠어요. 차분하게 잠수부가 아이들을 다독거리는 감정으로 노래할 것을 요구하는데, 너무 어려웠죠.
◆ 20년 동안 활동하면서 <우리나라>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와 그 시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 5집 이후에 활동이 힘들었어요. 2008년부터는 공연도 많이 못 하고 당시에 사회적으로 위축되었던 거 같아요. 우리나라 단원들 모두 힘들었죠. ‘우리 벗(우리나라 후원회)’ 후원회 활동도 적어지고, 공연이 없다보니 후원회원들도 다독이기 힘들었던 상황이었어요.
현실적으로는 2006년부터 힘들었지만, 이겨내다가 2008년 ‘삶과 사랑’이란 주제로 5집 정규 음반을 냈는데, 그동안의 투쟁 분위기의 노래들을 현실을 살아가는 주제로 바꾸다 보니 현장에서 공연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어요. 당시에 <우리나라>가 변했느냐는 오해도 받았죠. 그 때 공연이 없으니 월급도 끊기는 상황이 9~10개월 정도 되었어요. 집에서 아이들도 큰 상황이라 보니 더 어려움이 많았죠. ‘걸음의 이유’라는 영화에 나오는데 회의를 하는 와중에도 저는 아르바이트 수작업을 하는 장면이 나와요. 솔직히 경제적인 문제가 생기면 감정적으로도 힘들어지더라고요.
그때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단원들은 개인적으로도 힘들 때 서로 배려해주면서 어려운 문제를 같이 해결해주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단원들은 서로가 한 명이라도 없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있어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늘 함께 마음을 모았어요. 20년 동안 비단 20008년을 전후한 시기만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마음을 모아서 지금까지 올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 <우리나라> 앞으로 10년 뒤의 모습은 어떨까요?
- 10년 뒤면 우리 자식들이 결혼을 빨리하면 우리가 축가 불러야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웃으며 농담도 했죠. 10년 뒤에는 <우리나라> 단원들 대부분이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요. 그때도 세상이 안 바뀌었으면 억울할 것 같고, 그때라도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당연히 하죠. 10년 뒤에도 우리가 새롭게 만든 노래를 대중 앞에서 불렀으면 좋겠죠. 너무나 모범적인 답인가요(웃음)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그 당시의 이슈를 담은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거 같아요. <우리나라>에게 아마도 은퇴란 없을 거 같아요.
◆ 최근 대학생들이 통일을 주제로 한 노래도 많이 만들고 있는데 지금 대학생 노래패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나요? 그리고 대학생 노래패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 우리랑 시대가 다르죠. 우리는 힘들었던 시절이지만 학생운동의 축복을 많이 받은 세대잖아요. 학생운동이 가장 화려하고 대중적인 시기인 한총련 시절에 노래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고 축복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요즘은 그런 시대가 아니잖아요. 학생운동이 약해진 상황이고 지금은 개인주의와 싸우면서 더 많은 주변의 환경과 싸우며 더 싸울 것이 많은 시기에 본질적인 것을 놓치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하지만 학생들이 가진 끼와 열정은 우리 때하고는 다른 거 같아요. 지금은 학생들의 정서에 못 따라가기도 해요. 집회 현장에서 다양한 형태로 노래를 하는 것을 보면 놀랍기도 해요.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노래들도 많고 틀에 박히지 않고 노래를 만드는 것을 보면 젊다는 것이 이런 것이고나 느껴요. 부르기 쉽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노래가 민중가요잖아요. 시대를 읽어가는 눈, 지금에 맞는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더 많이 고민해줬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2’ 노래가 참 좋았어요. 밝고 희망차게 통일에 대해서 담아내잖아요. 우리가 부르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는 사뭇 다르죠.
◆ 20일 열리는 <우리나라> 20주년 콘서트 내용에 대해서 간략히 말씀해주세요.
- <우리나라> 20년을 관통하는 노래들을 많이 부를 거예요. 지금까지 만든 노래들이 많아요. 약 400곡이 넘어요. 그래서 <우리나라>를 지켜본 대중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노래를 부르기로 했어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춤곡들도 부르고요. 3분의 초대 손님들이 있어요, 약 3부로 구성되었죠. 관람객들은 물을 반드시 갖고 와야 해요.(웃음). 시간도 꽤 기니까요.
![]() ▲ <우리나라> 한선희 단원 [사진제공-한선희] |
◆ <우리나라>가 20년 동안 한결같이 올 수 있었던 힘은 응원해주시고 함께 해주신 분도 빼놓을 수 없죠.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분들께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 <우리나라>가 20년 동안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죠. 학생운동을 의미 있게 보낸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모였죠. 그래서 초창기에 많은 분이 도움을 주셨어요. 그런 분들이 지금까지 20년 동안 후원을 해주었어요. 쉽지는 않은 일이죠. 농민운동을 하러 가신 분들도 후원해주고, 때 되면 정성이 담긴 농산물도 보내주는 분들도 있고요, 정말 마음이 따뜻한 분들이죠. 지역에 공연 가면 꼭 챙겨주셨던 분들, 잊을 수가 없어요.
한동안 <우리나라>가 음반으로 보답을 해드리기 어려웠던 시절, 우리나라가 단원들이 모두 ‘우리 벗’ 회원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전화를 드린 적이 있어요. 그런데 어려운 줄 몰랐다며 더 큰마음을 주신 후원회원분들이 있어요. 이런 분들이 없었으면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오기 어려웠죠. <우리나라>에 주신 사랑에 감사하다는 말로만 보답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죠. 그래서 노래로 주신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죠. <우리나라>는 음악 작업으로 보답하는 것 외엔 다른 것이 없잖아요. 그리고 하반기에 2008년 정규 음반 6집이 나올 예정이에요.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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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지금까지 걸어오며 만든 노래에는 우리 민중의 투쟁, 삶 그리고 우리 민족의 통일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앞으로도 우리 민족과 민중들 속에서 <우리나라>의 노래가 늘 불리길 바란다.
![]() ▲ 노래패 <우리나라> 사무실에 걸려 있는 젊은 시절의 단원들을 담은 그림 © 자주시보, 김영란 기자 |
![]() ▲ <우리나라>가 발매한 음반들. 지금까지 정규음반 5장을 비롯해 12장의 음반을 발매했다. |
![]() ▲ <우리나라> 공연 장면 [사진제공-한선희] © |
![]() ▲ <우리나라> 공연 장면 [사진출처-우리나라 페이스북] |
![]() ▲ <우리나라> 공연 장면 [사진출처-우리나라 페이스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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