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3월 19일은 이인모 선생이 북으로 송환된 날이다.
이인모 선생은 한국전쟁 때 종군 기자로 참가했다가 전쟁 중에 잡혔다.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아 34년간 감옥에서 옥살이한 이인모 선생은 비전향 장기수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북의 매체 중의 하나인 <조선의 오늘>은 19일, “조국과 인민의 기억 속에 영생하는 전사의 삶”이라는 기사를 통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인모 선생에게 베푼 사랑에 대해 소개를 했다.
<조선의 오늘>은 1993년 3월 19일, “역사의 땅 판문점에서는 인류사가 지금껏 알지 못한 사변이 펼쳐졌다. 신념과 의지의 전형인 불굴의 통일애국투사 이인모 동지가 판문점 분리선을 넘어 꿈결에도 그리던 어머니 조국의 품에 안긴 것”이라고 소개했다.
<조선의 오늘>은 “(이인모 선생이) 수십 년간의 모진 옥중 고초를 당하면서도 당과 혁명 앞에 다진 맹세를 끝까지 지켜 신념과 지조를 조금도 굽히지 않은 것”을 높이 평가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인모 선생을 조국의 품으로 데려오기 위해 온갖 노고와 심혈을 기울였다고 밝혔다.
<조선의 오늘>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일성 주석의 뜻을 받들어 이인모 선생의 귀환을 위한 투쟁을 끊임없이 밀고 나가도록 이끌어주었다면서 “남측 대표단과 회담을 할 때마다 이인모 동지를 데려오는 문제를 상정시키도록 했으며 세계의 양심을 불러일으켜 이인모 귀환 투쟁을 벌이며 아내와 딸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 용기를 내게 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지도를 했다고 밝혔다.
또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인모 선생의 귀환이 국가적 행사로 잘 조직할 데 대한 방침을 위해 밤을 꼬박 새웠으며, 판문점 분계선을 넘어설 때 병약한 이인모 선생의 신변에 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까지 고려해 모든 조치를 취해주었다고 <조선의 오늘>은 밝혔다.
북으로 송환된 이인모 선생의 몸은 건강상태는 극도로 안 좋았으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취한 조치에 의해 이인모 선생은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1993년 4월 15일 김일성 주석은 직접 병원에 가 이인모 선생을 만났다고 한다.
<조선의 오늘>은 당시에 김일성 주석이 병원에서 이인모 선생을 뜨겁게 포옹하고 두 손을 꼭 잡고 “동무는 원수들의 온갖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혁명적 지조와 절개를 지켜 용감히 싸워 이겼다. 조선노동당원의 고결한 혁명정신과 숭고한 풍모를 온 세상에 과시했다”고 말을 했으며 이날 김일성 주석은 이인모 선생에게 해방 직후 입당할 당시의 당원증 번호와 김일성 주석의 이름이 새겨진 조선노동당 당원증을 직접 수여해주었다고 소개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인모 선생을 1993년 7월 27일에 진행된 전국 노병대회와 열병식장의 주석단에도 내세워 주는 등, 끝없이 사랑의 조처를 했다고 <조선의 오늘>은 소개했다.
이런 사랑으로 이인모 선생은 북으로 돌아간 뒤에 14년간의 행복 속에 보람찬 삶을 누렸다고 <조선의 오늘>은 밝혔다.
<조선의 오늘>은 이인모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못내 애석해하며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을 보냈으며 그의 장의식을 인민문화궁전에서 우리 당과 조국 역사에 있어 본 적 없는 인민장으로 하며 유해를 애국열사릉에 안장하도록 해주었다”고 소개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개척하고 빛내온 동지애의 역사는 오늘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며 2015년 1월, 이인모 선생의 아내인 김순임 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정은 위원장은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을 보내주고 유해를 애국열사릉에 안치하며 장의를 잘해주도록” 조치를 취해주었다고 <조선의 오늘>은 전했다.
이어 <조선의 오늘>은 “위대한 수령, 위대한 당이 안겨준 사랑과 믿음, 고귀한 정치적 생명이 있어 혁명 전사들의 불굴의 신념과 의지가 있고 빛나는 삶과 영광이 있”다고 주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