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240]제3세계 눈으로 미제패권 파헤친다/3.1운동외세 일본/오늘의 외세는 미제국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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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9-02-23 12:04 조회4,21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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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240] 제3세계 눈으로 미제패권 파헤친다
<3.1운동100주년>을 <우리민족끼리 3.1운동>으로
3.1운동 때 외세는 일본, 오늘의 외세는 미제국주의자들
*글:유태영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3.1운동을 한낱 유명한 과거사로 여기면서 기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조국의 분단 70년을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있어서 100년전의3.1운동을 도대체 어떻게 그 무엇으로 기념해야할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겠다.
조국분단 70년에 <북-남-해외>에 흐터져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오늘의 현실에 있어서 <3 .1 운동>을 <우리 민족끼리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하겠다.
3.1정신을 생동하는 오늘의 역사를 창조하는 우리민족끼리의 운동으로 전진시켜 나아가면서 조국통일을 쟁취하는 <오늘의 운동>이 되어야 하겠다.
100년전의 3.1운동에 대하여 하나의 향수심으로 년중행사로서 기념식만을 거창하고 요란스럽게 거행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위선이며 허무맹란한것 뿐이다.
그럼으로 진정한 오늘의 3.1운동은 민족분단70년 역사를 끝장내고 민족-민생-민권을 회복하고 민족통일을 쟁취하기 위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전민족적 투쟁으로 승화발전하는 오늘의 <3.1절>이 되야 하겠다.
진실로 오늘의 3.1운동은 8.15해방후 70년이 됬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미국의 침략에 항거하고 투쟁하는 <우리민족끼리> 항쟁의 날로서의 3.1운동의 100 주년이 되어야 한다.
1. 3.1운동 때 외세는 일본
1910년8월25일에 <한-일합병>이 일본의 강제로 선언됬다. 하지만 일본은 2년전 1908년부터 <한-일합병>의 결단을 임이 내리고 있었던것이였다.
<한-일합병>후에 일본은 한국인을 <반도인>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한국 자체를 나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의 침략자들의 모욕적인 정책이였다.
한국의 순종 황제는 <한-일합병>에 대하여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번잡스럽게 소요를 이르키지 말고 차분히 생업에 열중하라. 동시에 일본 제국의 문명에 복종해서 행복을 누리라. 내가 오늘날 이런 결정을 내린것은 오로지 민중을 구하고 싶은 필사적 투쟁에서 나온 것이다>
<한-일합병>은 사실상 조선 왕실에서 부터 시작됬던 것이다. 500년의 역사를 갖이고 있는 조선 수도인 <한성>을 <경성>으로 개칭됨으로서 조선의 국가의식이 완전히 상실되고 있었다.
<한-일합병>이 이처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을 때 한국의 일부 상류계급의 사람들은 행정효율이 더 좋아지고 그들의 안전이 증진됬다고 일본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후에 한국인의 언어와 이름까지 빼앗겼다. 일본 침략자와 전투를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일본에게 나라를 빼았겼다.
일본이 <한-일합병>을 진행하면서 가장 두려워한것은 미국과 영국이였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한-일합병>에 대하여 하등의 반대를 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오히려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오직 조선을 기독교선교지로 삼으려고 하는데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였다.
미국 선교사들은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들의 슬픔에 대하여 <이 세상의 슬픔은 죄 악때문이다. 그럼으로 영적으로 하늘 나라를 사모하고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 최대의 행복이다>라고 설교를 하면서 기독교 선교를 성공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하여 한국인들이 사회와 정치적 문제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종교적으로 열광적기독교 신자들이 되여 교회를 부흥시키는데만 열중하도록 세뇌를 했던 것이다.
<한일합병>후9넌이되는 기미년1919년 3월1일에 <한일합병>을 반대하고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민중들의 <3.1독립운동>이 조선의 전역에서 전개됬다.
<기미년독립운동>을<3.1운동> 이라고 부른다.
<3.1운동>에 참가한 전체 인원수는 106만명이며 사망자가 7,509명이였으며 일본 경찰에 구속됨 인원수는 4만 7천명이였다.
<3.1운동>을 게기로하여 한국민족의 독립정신을 일본과 전세계에 과시했다. <3.1운동>후에 상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하지만 <3.1운동>이 성공한 이야기보다는 오히려 실패한 비극적 역사로 끝나고 말었다. <3.1운동>이 왜 어찌하여 실패로 끝났는가에 대하여 이유와 원인에 대 하여 설명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3.1운동>이 실패로 끝난 이유에 대하여 몇가지 획심적 사건들을 기록한다.
1). >3.1운동>은 운동의 동기와 계획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민중들을 완전히 배재하고 오직 종교적 지도자들과 엘리트 지성인들 위주로 중심하여 3.1운동이 계획됬다.
2). <3.1운동>의 대표자로 등장한 33인들의 절대적 다수가 기독교, 천도교, 불교 등 종교적 엘리트들의 집단체들 이였다.
3). 3월 1일 오후2시에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 군중들 앞에서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기로 본래 계획되여 있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정각 2시가 됬는데도 33명중에 한 사람도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후 2시에 당황한 군중들 앞에<경신학교 학생 정재용 학생>이 팔각정에 용감히 올라가 <독립선언문>을 처음으로 용감하게 낭독했다.
정재용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에 즉시 군중들의 만세소리가 터져나왔으며 수십만 군중들은 종로 보신각과 남대문 등 도심지를 행진하면서 독립만세를 웨쳤다.
서울에서의 <3.1만세운동>을 기점으로하여 평양을 비롯하여 전국 방방곳곳에서 끝칠줄 모르는 <대한독립 만세운동>이 파도처럼 울여펴지고 있었던 것이다.
4). <3.1독립선언문>을 작성한 33인들에 대하여 창피스러운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독립선언문> 작성 맨 끝에 33인들의 이름을 기록하는데 있어서 <이름의 순서>에 대하여 기독교 측에서는 다수라는 이유로 기독교 대표자의 이름을 맨처음에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기독교의 주장에 대하여 다른 종파들은 끝까지 반대하여 3월1일의 새벽까 지 <이름 기록의 순서>때문에 <3.1독립선언문>의 채택이 완료되지 못하고 있었다.
3월 1일 새벽에 이르러서 천도교 이승훈 선생이 방에 들어와 큰 소리로 웨쳤다.
<순서는 무슨 순서냐? 우리에게는 죽는 순서가 있을 뿐이다> 잔소리 말고 손병희 선생의 이름을 제일 첫번에 기록하라>고 큰 소리로 주장했다.
이승훈 선생의 큰 소리에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못하고 <3.1독립선언문>에 천도교 손병희 선생의 이름을 맨 처음에 기록하여3월 1일 새벽에야 <3.1독립선언문>이 겨우 채택됬다고 하는 창피스러운 숨은 이야기가 있다.
5). 1919년의 3.1운동에 있어서 주역을 담당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 민중과는 멀리 동떨어진 특정계급에 속하는 사람들뿐 이였다.
자기들끼리 뫃여 앉아서 계획을 세우고 자기들 끼리 독립선언문을 작성했기 때문에 대중-민중들은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수 없었다.
<3.1운동>은 민중이 선두에 서서 민중이 주도하는 민중중심의 항일투쟁이 절대로 아니였다.
그럼으로3.1운동은 오직 일부의 지식인들의 인맥과 종교적 일부 지도자들이 스스로 자칭선각자라고 하는 명칭과 민족애라고 주장했다. 그럼으로 3.1운동은 극히 제한적 지도력에 의하여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을 뿐이였다.
2. 오늘의 외세는 미국이다
3.1운동 때 한국의 외세는 일본이였는데 오늘에 있어서 한국의 외세는 미국이다.
1945년 9월8일에 인천에 상육한 맥아더 사령관은 <조선인민에게 고함>을 통해 포고령을 발표했다. <38선 이남의 조선영토는 나의 권한하에 있다> 라고 주장했다.
그럼으로 미국은 1945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74년 동안 한국에서 요지부동의 점령군으로서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에 점령군으로 70여년동안 주둔하고 있으면서 수 없이 많은 조약들과 협정들을 맺었다. 하지만 미국은 그 조약들과 협정들이 미국에게 불리해지면 그 협정들과 조약들을 배반하고 휴지조각을 만드는 것을 누워 떡먹기식으로 70년 동안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점령군으로 처음 시작한 이승만 정부때에는 자문관으로, 1961년 박정희 정 권 때에는 군사고문관으로, 1980년5.18 광주학살 때는 비상계엄사령관등으로 미 국은 직책과 정책등 명칭을 적당히 바꿔가면서 한국을 침략지배하고 있는 요지부동의 외세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전두환은 공산주의자들의 남침계획이라고 선전했다.
노태우-이명박근혜 정권때에 미국은 아예 한국과 친밀한 정치동반자가 되였으며 보다 더 가끼히 밀접해지는 부동의 외세가 되고 있었다.
2011년 위키리스크가 폭로한 미국의 외고전문지에 의하면 미국의 고위급 공무원들이 청와대 내에서 미국을 위하여 일하는 정보원과 공작원들이 줄비하다는 것을 폭로했다.
이러한 이야기는 2011년의 이야기가 절대로 아니라 그것은 역대 한국정치에 있어서 줄곳 계속되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때 당시 클라이스틴 주한미대사는 전두환을 처음 만난 뒤 말하기를 <그는 신뢰할수 없고 양심도 없는 잔인과 거짓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어찌 전두환의 이야가로만 여길것인가?
사실에 있어서 전두환 정권 이전은 말할것도 없이 암흑이였지만 전두환 정권이후 에도 역시 관계자들은 계속하여 노태우-김영삼-이명박근혜정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미국 바짓가랑이>를 붓잡는 거짓된 구태정치를 계속하고 있을 뿐이였다.
그러면 오늘 촛불정권이라고 주장하는 문재인 정권은 어떻한가?
그것은 바로 오늘 현제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 내부에서도 역시 위키리스크가 폭로한 사실 그대로 오늘도 현재 진행형으로 공개된 비밀로 계속되고 있다.
지면상 제한으로 일일히 다 말을할 수 없다. 하지만 오늘 문재인 대통령 정권안에는 아직도 미국의 <바지가량이>를 여전히 붓잡고 있는 종미주의 정치인들이 그대로 존재해 있으면서 그들의 흔적들이 분명히 표출되고 있음을 엿볼수 있다.
우선 강경화 여자가 눈에 뛴다. 강경화 여자는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 밑에서 미국 에 충성하는 <길드른 개>들중에 속하는 대표적 여자이다.
오늘 한국의 대미외교정책에 있서서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시기에 처해있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왜 어찌하여 대미정책을 직접 이끌어 나아가야할 책임이 있는 외교부의 중요한 요직 자리에 미국에 <길드려 진 사람>으로 유명한 강경화를 그 자리에 앉혀 놓고 있는가?
이것은 분명히 문재인 대통령이 숨기고 있는 이중적 <친미굴종외교정책>이라고 국민의 시선은 판단할수 밖에 없다.
이 글을 끝 맺으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3.1정신을 재현하고 못다 이룬 민족통일을 어서 속히 쟁취해야할 과업에 대하여 뜻 깊은 기념행사들이 전국적으로 방방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뿐만 아나라 <3.1절100주년>을 하루 앞둔 2월 27-28일에 <조-미정상회담>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개최된다. 이번 <조-미정상회담>은 우리민족끼리 통일을 쟁취하기 위한 넓고 밝은 길을 열어 놓는 매우 중요한 진취적인 민족회담이 될것이다.
그럼으로 오늘 우리는 <3.1운동100주년>의 현재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깊이 깊이 생각을 해야 하겠다.
그것은 <통일운동 양심수>들을 석방해야 하는 민족적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된다.<통일운동 양심수>들은 이명박근혜 정권하에서 <죄인아닌 죄인>이 되고 있었다.
박근혜의 법원이 부당한 판결을 양산함으로 인하여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양심수들이 대폭 증가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 양심수 수감자가 바로 이석기 전 국회의원이다.
양심수 이석기 전 국회의원은 민족-민주주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불의한 반민족-반통일정권인 박근혜 정권에 항거하여 정의로운 통일운동을 전개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현직 국회의원으로서 어려운 투쟁을 했다.
박근혜는 이석기 의원을 <눈엣 가시>로 여기고 있었다. 박근혜는 괴로운 존재를 국회에서 제거하여 감옥에 수감시켜 놓고 청와대에서 안심하고 있었다.
양심수들을 감옥에 그대로 가두워 놓고 <촛불정권>이라고 큰 소리만 치고있는 오늘의 문재인 대통령은 <양심수와 민족통일 주장>은 절대로 양립할 수 없음을 깊히 깨달아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아무리 판문점에서 또 평양방문까지 하면서 <민족통일>을 고함 쳤지만, 양삼수 이석기 전 국회의원을 그대로 감옥에 방치해 놓고 있는 정치적 행태를 보면 강경화 처럼 미국의 <길들여 진 사람>이 될 위험성이 있다고 염려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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