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창기 기자 추모글-강대석 철학자
조국통일 때까지 마음의 눈만은 감지 말아요
[고 이창기 기자 추모글] 내가 기억하는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8/11/24 [13:05] ㅣ 최종편집:
*글:강대석 철학자
내가 이창기 기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에서 정년퇴임하고 대전으로 이사를 온 후 인터넷신문 <자주민보>를 통해서였다. 그가 쓴 기사들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민족의식이 투철한 애국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개인의 명예나 향락보다도 나라와 민족을 더 사랑하는 흔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2012년 여름에 인터넷신문 <사람일보> 박해전 기자와 함께 연변으로 여행을 갔다. 좋아하는 북의 그림들을 구경하고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우리가 우연히 들게 된 숙소에 이창기 기자의 중학생 딸이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와서 머물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해전 기자는 이창기 기자에 관해서 잘 알았고 그가 이전에 홍치산이라는 필명으로 시집을 낸 훌륭한 시인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귀국해서 그를 한번 만나볼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귀국해서 알아보니까 그는 이미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그가 만주 항일유적지를 답사하고 쓴 기사 때문이었다. 올바른 역사를 전해주고 싶은 열정이 죄가 된 것이다. 그는 1심에서 2년의 실형을 받았다.
나중에 나는 친지를 통해 나의 철학책 한권을 보내주었다. 변변치 못한 내 책을 받고 그는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다. 2012년 10월 30일자 첫 편지에서 그는 썼다. “여기 옥중에서도 선생님의 철학 강의를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어쩌면 핵심과 본질을 정확히 짚으면서도 그 어려운 철학을 그렇게 쉽게 설명하실 수 있으신지 늘 감탄을 거듭하며 행복하게 읽고 있습니다.” 나는 그로부터 모두 3통의 편지를 받았다.
나는 지인들의 권유를 받고 2012년 11월 20일에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이창기 시인이 간경화로 고통을 받고 있으니 집에 돌아와 병 치료를 할 수 있도록 2심판결에서 선처해줄 것을 부탁하는 탄원서를 법정에 보냈다.
그에 대한 고마움을 그는 2012년 12월 30일의 편지에서 썼다. “귀중한 시간을 내시어 정성 다해 써주신 탄원서를 이제야 받아 읽어보았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보내주신 사랑과 믿음에서 정말 큰 힘을 얻었습니다. 그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살겠습니다. 저는 정말 서구의 철학이라면 무조건 떠받들기만 하는 남녘에서 강대석 교수님 같은 분이 계신 줄은 꿈에도 기대 못했었습니다. 어줍잖은 진보철학자들도 결국 서구추종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 보며 탄식을 금치 못했는데 강대석 교수님의 철학을 접하고서야 무릎을 쳤습니다. 이젠 우리 딸아이에게도 권할 철학책이 생겼다고 말입니다.” 많이 부족한 나의 책에 대한 과도한 찬사이지만 나는 조국통일의 길을 함께 가자는 격려로 받아드리고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나는 그의 건강이 회복되면 시인인 그에게 나의 <김남주 평전>에 대한 평가를 받아 볼 생각을 했었다. 마지막 편지는 출소를 앞두고 보낸 2013년 8월 5일의 작은 엽서였다. 출소해서 찾아뵙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모든 편지에 스스로 뜯어서 말린 꽃잎과 풀잎을 붙이었다. 민들레, 냉이, 클로버 등 흔한 풀잎을 정성들여 붙인 편지들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소녀처럼 무척 섬세하고 다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창기 기자가 출소한 후 나는 친지의 집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나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눈이 크고 체격이 건장한 쾌남아였다. 그는 정열적으로 한반도의 정세와 조국의 미래를 설명해주었다. 나에게 그는 조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믿음직스러운 후배처럼 생각되었다.
그런데 내가 2013년 10월말에 갑자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압수수색을 받게 되었다. <페시탈>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일간베스트회원이 여러 가지 저열한 이유를 들어 <죄수번호 117>이라는 제목으로 나를 고발하는 게시 글을 올린 것이 빌미가 된 것 같았다. 고발한 내용 가운데는 내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번역했다는 이유도 들어있었는데 정말로 기가 막힐 일이었다. 결국 나는 압수수색을 받았고 조사도 받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창기 기자는 곧바로 나를 찾아왔다. 마침 그날 집사람이 출타중이어서 우리는 밤새껏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스스로 겪은 일들의 얘기를 통해 나를 격려하고 위로하였다. 그는 다음날 새벽에 바쁜 일정을 핑계로 떠났는데 아침밥을 지어주지 못해서 마음이 아팠다.
그 뒤 <자주시보>의 송년모임에 그는 나를 초청하여 철학얘기를 듣고 싶어 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나는 참석하지 못했다. 나의 건강은 악화되어 2018년 3월에 나는 서울대병원에서 신장암 수술을 받았다. 그 소식을 들은 그는 자신의 건강도 좋지 않으면서 대전으로 나를 방문하여 위로하고 격려해주었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섭취해야 할 음식과 피해야 할 음식 이야기는 물론 생활체조도 가르쳐주었다. 대학에 다니는 딸 이야기도 했는데 딸을 무척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날아왔다. 간암수술을 받은 후 투병을 잘하고 있다는 그가 갑자기 운명을 한 것이다. 나에게 암을 이겨낼 수 있는 생활상의 방법들을 그렇게 열심히 설명해주던 친구가 나보다 먼저 조국을 떠난 것이다. 사랑하는 조국을 두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두고,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은 것이다.
나는 불 꺼진 방에 우두커니 앉아 슬픔에 잠기었다. 그가 없는 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나이로 보면 나보다 25년 후배다. 그러나 통일을 위한 투쟁의 길에서는 그가 나보다 25년 더 앞서가고 있었다. 그는 국가보안법의 탄압 아래서는 물론 병마와 투쟁하면서도 결코 느슨하게 오래 사는 삶을 추구하지 않았다.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도 그는 “전사에게 가장 영예로운 것은 전장에서 싸우다 죽는 것이다”라 말하며 북녘에서 취재를 하고 싶어 방북허가를 신청하려 했다.
이제 그가 쓰려 했던 <통일의 기사>는 볼 수 없게 되었다. 51세라는 짧은 삶을 통해 그러나 그는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얼마나 값있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잘 가르쳐주었다.
그는 시인이나 예술가뿐만 아니라 철학자나 과학자들도 투철한 민족의식과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지금도 외치고 있는 것 같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 외침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연의 법칙에 따라 흙에서 와서 흙으로 되돌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한순간을 살아도 값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며 나는 그의 죽음을 통해 내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조국이 통일될 때까지 마음의 눈만은 감지 말아요!”
<강대석 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