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4] 옛 고구려 땅에서 바라본 북녘의 만포시(동영상):::북 열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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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8-09-11 06:58 조회58,57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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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신>취재진은 고구려 옛 수도들 중 하나였던 <국내성>이 위치한 집안(지안)으로 왔다. 이곳에 도착 취재진은 고구려 19대 왕이였던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하여 20대 장수왕비 등을 돌아보았다.그리고 이지역과 인접한 압록강변의 건너편 만포시가 보이는 곳으로 이동하여 중국과 조선을 오가는 다리에서 잠시 머물러 또다시 조선 땅을 바라보았다. 또한 북부조국에서 열린 주요 행사들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사진]취재진은 <광개토대왕비>앞에서 기념촬영
[사진]손세영 편집위원은 <광개토대왕비>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사진]취재진은 <광개토대왕릉>을 참관하기 전에 기념촬영
[사진]중국과 일본은 <광개토대왕비>를 <호태왕비>라고 한다.
[사진]노길남 편집인은 <광개토대왕비>를 관람한후 소감을 설명하는 모습

[사진]편집진은 <장수왕릉>을 참관하기 전 기념촬영
[사진]취재진은 <장수왕릉> 주변에 있는 후궁비등도 참관
[기획4]
옛 고구려 땅에서 바라본 북녘의 만포시
[집안=민족통신 노길남/손세영/김백호 편집위원 공동] <민족통신> 취재진은 중국 단동에서 일반 열차를 타고 동쪽으로 6시간 걸려 통화에 도착한후 다시 남쪽으로 향하는 열차를 타고 3시간 동안 달렸다.
고구려 옛 수도들 중 하나였던 <국내성>이 위치한 집안(지안)으로 왔다. 이곳에 도착 취재진은 고구려 19대 왕이였던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하여 20대 장수왕비 등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지역과 인접한 압록강변의 건너편 만포시가 보이는 곳으로 이동하여 중국과 조선을 오가는 다리에서 잠시 머물러 또다시 조선 땅을 바라보았다.
취재진은 집안(지안)지역 이곳 저곳을 답사하며 지난 시기 우리민족의 역사와 함께 오늘의 분단시대를 돌아보았다.
고구려(기원전 37년~668년)와 광개토대왕비
취재진은 1350년 전에 종말을 거둔 고구려 옛땅을 둘러보기 위해 <통화>를 거쳐 <집안>에서 이틀을 체류했다. 19대<광개토대왕 비>, 20대 장수왕릉을 답사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F7DdDuJ15E
https://www.youtube.com/watch?v=AmsZfAZ7EwY
https://www.youtube.com/watch?v=HZwlVZEBn50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길림성(지린 성) 지안 시(集安市) 태왕진(太王鎭, 중국어 간체자: 太王镇)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왕의 능비이다. 중국, 일본에서는 이곳을 호태왕비(好太王碑)라 부른다.
취재진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 한국에서 온 남녀 노소 관광객들이 줄을 이었다.이들은 모두 7백여년 고구려 역사가 위대하였다는 생각들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고구려 시대는 주객관적 조건들과 환경변화 때문에 4차례나 수도를 옮겨야 했다. 첫 수도는 졸본(기원전 37년~3년), 둘째 수도는 국내성(3년~427년), 셋째 수도는 평양성(427~586년), 네째 수도는 장안성(586년~668년)이었다.
광개토대왕비 혹은 호태왕비(好太王碑)는 414년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거대한 비는 응회암(凝灰岩) 재질로 높이가 약6.39m, 면의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1.46m로 만들어져 있다. 대석은3.35×2.7m 이다.네 면에 걸쳐 1,775자가 화강암에 예서로 새겨져 있다. 그 가운데 150여 자는 판독이 어렵다. 내용은 대체로 고구려의 역사와 광개토왕의 업적이 주된 내용이며, 고구려사 연구에서 중요한 사료(史料)가 된다. 또한 전한(前漢) 예서(隸書)의 서풍으로 기록되어 있어 금석문 연구의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비석은 조선 후기까지 금나라 황제의 비(碑)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다가 청의 봉금제도가 1880년대에 해제된 뒤에야 비로소 발견되었고, 1888년에 일본인 학자 요코이 다다나오가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바탕으로 한 비문의 내용을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인 <국내성>의 흔적들은 보였으나 그 원형은 거의 사라지고 성터의 돌담정도 남아있고, 광개토대왕비가 유리망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릉은 그 규모가 큰 동산의 맨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릉 주변에 있던 돌담들은 모두 사라지고 맨 위에 있는 무덤 자리에 있던 이러저러한 흔적들은 왜구들에 의해 도굴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자리에는 왕의 관이 있었으나 그것도 사라지고 그 관을 바치고 있던 돌받침만 흔적으로 남아 있다.
수도였던 <국내성>의 둘레는 2,741메터나 되었고 동서남북 성벽들의 높이도 558메터, 699메터, 749메터, 735메터가 되었다. 이 국내성을 포함하여 고구려 문화유산 43개는 중국 당국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2004년 7월)하였다고 한다.
취재진은 이곳을 답사하면서 여러가지 생각들에 잠겼다.고구려 시대 영토는 지금의 동북3성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던 시대였는데 <수>나라에 의해 598년, 612년, 613년, 614년 4차례나 침략을 받아 국력이 소진되었다. 그 이후 당나라 침략으로 국력이 소진되었다. 특히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전쟁소모로 국력이 쇠약해 진데다가 666년 연개소문이 죽자 국운이 기울어졌다. 게다가 신라나 백제가 고구려와 힘을 합쳐야 되었지만 신라가 외세인 당을 끌어들여 고구려를 침략하기도 하였다. 당시 고구려의 위력은 영토뿐만 아니라 중국과 맞상대를 해도 이길수 있는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도 우리 민족 선조들은 외세를 끌어들이면 나라가 망한다는 교훈을 몰랐던 것 같다.
중국 집안(지안)지역의 압록강변서 바라본 조선의 만포시

[사진]집안(지안) 역에 도착한 민족통신 취재진

[사진]집안(지안) 지역과 인접한 압록강변

[사진]집안(지안) 지역과 인접한 압록강변에서 소감을 말하는 취재진

[사진]집안(지안) 지역과 인접한 압록강변에서 바라보는 조선 산천

[사진]집안(지안) 지역과 인접한 압록강변에서 바라보는 조선 산천

[사진]집안(지안) 지역과 인접한 압록강변에서 바라보는 조선변경지역

[사진]중국과 인접한 압록강변의 구리제련공장에서 10년만에 연기가 나온다

[사진]집안(지안) 지역과 인접한 압록강변에서 바라보는 조선변경지역

[사진]집안(지안) 지역과 인접한 압록강변에서 바라보는 조선변경지역

[사진]집안(지안) 지역과 인접한 압록강변에서 바라보는 조선의 만포시 변경지역

[사진]집안(지안) 지역과 인접한 압록강변에서 바라보는 조선의 만포시 변경지역

[사진]집안(지안) 지역 압록강변에서 취재진과 안내원
취재진은 광개토대왕비를 참관하고 근처에 있는 20대 장수왕릉을 참관하고 나와서 이곳 압록강과 인접하고 있는 조선을 바라보기 위해 변경지역을 이동했다.
중국과 조선을 잇는 다리가 보인다. 압록강 남쪽에는 조선의 <만포시> 교외지역이 있다. 오늘이 9월10일이니까 지금쯤 주체사회주의를 건설한 날인 9.9절 행사가 한창일 것이다.지구촌 많은 나라 사절들이 평양에 입국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9월18일부터 2박3일동안 평양에서 남북 정상들이 만난다는 일정이 발표되어 국제사회들도 조국반도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시기이다.
[기획3]중국 끊어진 다리서 바라본 북녘 신의주(동영상)/
/중국의 조선식당 냉면도 평양차럼 맛있다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10067
[기획2]미당국의 부당한 방북금지 정책에 분노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10065
*민족통신 취재진 동북3성 탐방 9월3일도착
http://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10047
로동신문 2018년 9월11일자 보도사진들 |
(1~2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 70돐경축 청년전위들의 홰불야회 진행 (3면)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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