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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인종차별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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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yslee 작성일08-02-18 00:00 조회18,5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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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인종차별 문제


이철수 사건과 김영민 교수 재판 사건을 중심으로 (선우 학원)



미국헌법이 자랑스러운 정신의 하나는 “정당한 재판의 순서를 밟지 않은 재판은 무효다” 또 “판결이 끝나기 전 까지는 무죄다.” 등등이 명백하게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명백한 명문이 미국에 거주하는 모든 시민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서 교포 두 사람의 재판 사건을 예로 들어서 알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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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이철수군의 이야기다. 철수군은 한때 사형선고를 받고 캘리포니아 형무소 생활을 했었다. 그 당시 전교포사회에서 “이철수를 살리자!”란 전례 없는 초당파 민중운동이 발생 되었다. 이 운동에 참가한 인사들은 기독교 목사들, 노동자, 대학생, 의사, 실업인, 심지어 한국공관에서까지 후원에 참가했다. 그 중심세력은 교포 청년들 이었다. 그중에서 중, 고등학교 중퇴한 청년들이 다수를 이루었다. 그중에는 데이빗 김(정신과 의사) 제이 유 소위 일반사회에서 “불량소년”으로 주목 받고 있는 청소년들이 “이철수를 살리자.”운동에서 핵심 역할을 했었다. 예를 들면 센프란시스코에서 집회를 했을 때 600여명이 동원 됐었고 로스엔젤레스 집회에는 500여명이 참가 했었고 대부분이 청소년들 이었다.

왜 교포청소년들이 이철수 구원운동에 참가했었는가? 하면 그들의 형편이 이철수군의 사정과 비슷한 것을 발견했었기 때문이었다.

이철수군은 사생아 이다. 서울에서 막노동하던 시골처녀의 몽에서 생긴 아버지 없는 애 이었다. 한국사회의 희생자인 철수군은 어머니가 미국군인과 결혼하고 도미한 후 어머니의 친척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미국에 가서 미국군인 남편과 이혼했다. 이와 같은 사정은 요즈음 교포사회에서 흔히 보는 케이스인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미국에 데려오기 위해서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노동했다. 새벽 네 시부터 깡통공장에서 하루 종일 중노동 한 후 집에 돌아와서 의복을 갈아입고 밤에는 “칵테일 웨이츠리스”로 일하면서 두 직장을 겸했었다.

1964년에 열두 살 되는 철수는 어머니를 찾아서 미국에 오게 됐다. “꿈에 그리던 미국 땅에 도착 했지요. 그리고 어머니도 미국사람들 모양으로 부자인줄 생각 했어요 부자나라에 와서 기뻤습니다.”하고 철수는 이야기 했다.

철수가 미국에 온 후에도 어머니는 노동을 계속했다. “철수를 남과 같이 공부시키기 위해서요.”라고 말했다. 모든 이민자들의 꿈인 것이다. 철수의 어머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아들을 성공시킬 것인가? 하는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꿈꾸면서 중노동을 계속했다.

1973년 6월 어느 날 센프란시스코 “차이나 타운”에서 중국청년 “깽”의 한 두목이 총상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번잡한 퍼시픽 거리와 그랜드 거리 모퉁이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수십명이나 되는 구경꾼이 운집했었다. 사건 후 경찰이 도착했을 때 증인으로 자원할 사람은 외지에서 온 백인 관광객 중에서 다섯 명뿐이었다. 중국인들은 그런 사건에 일절 관계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 그 이유는 경찰레 대한 신임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깽” 싸움에는 일절 가담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태도이다. “깽”에 대한 공포심 때문이다.

백인증인 다섯 명 중에서 세 사람이 경찰이 보여준 이철수 사진을 보고 “그가 살인을 범한 차이나 맨.”이라고 지적했다. 그 결과로 철수군이 범죄인으로 경찰은 믿게 됐다. 왜 결찰이 철수군의 사진을 보여 주었는가 하면 철수군이 “불량자 그룹.”에 속했다고 경찰은 믿었고 “깽” 싸움은 다른 “깽”과의 싸움이라고 인정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차이나 타운에서는 “깽” 싸움이 빈번하여 외부에서 관광객들이 찾아오지 않게 되어 비즈니스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실업인들이 경찰에 문제 해결을 호소하고 있는 때이다. 한번은 “깽”그룹이 수백 명의 손님이 식사하고 있는 대중식당을 습격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범죄자를 구속하지 못 했었다. 경찰이 면목이 땅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이철수군이 걸린 것이다. 왜 철수군이 걸리게 됐는가?

철수군은 도미 후 어머니의 주선으로 학교에 입학했다. 영어가 부족해서 학교과목에 취미를 붙이지 못한 철수는 학교에 취미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권고로 학교에 출석해야 했다. 학교에서는 철수군의 고민을 해결하는데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 철수는 학생들에게 매를 맞게 됐고 코피가 마른 적이 없었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하루는 학교교정에서 철수에게 담배를 강요했다. 철수는 거절했다. 싸움이 시작 됐다. 교장실에 끌려갔다. 교장은 백인학생들은 그냥 내보내고 철수는 “트라블 메이커”라고 처벌을 당했다. 이런 사건이 여러 번 반복 되자 철수는 실망과 후회뿐이었다. 철수는 애매하게 학교에서 “불량분자” 취급을 받게 됐다. 이런 사건이 몇 번 있은 후 철수는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소년범죄소로 이동 됐다. 철수는 경찰에 ‘불량소년“으로 등록 됐다. 이처럼 철수는 도미 후 어머니의 기대에 어긋났고 미국생활은 불행과 불운뿐이었다.

철수는 학교에서 퇴학 된 후 소년교도소, 소년범죄소, 등에서 여러 번 도망 했었고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여러 번 시도해 봤고 심지어는 자살까지 시도했었다.

어머니 추억에 의하면 “ 철수는 학교에서 집에 올 때 까지 울면서 왔어요.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조르는 걸요. 왜 그러냐고 물으면, 모든 사람이 자기를 미워하고 있다고 하면서 자기는 미국도 싫고 미국사람들도 싫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내가 왜 새벽 네 시부터 하루 종일 일합니까? 그 녀석 하나를 사람 만들어 보자는 것이지요. 그런데....”하고 어머니는 입을 봉해버린다.

미국의 법제도는 물론이고 아는 사람조차 없어 아들이 어디 갇혀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어머니였다. “내 아들은 죄가 없어요.” 하고는 눈물을 흘린다. 그런 사실은 철수 어머니뿐만이 아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사회사업가로 알려진 교포 3세인 탐 김에 의하면 “철수를 사귀어 보면 알 수 있어요 철수는 살인을 할 사람이 못 돼요. 나는 철수를 여러 해 사귀어 왔는데 그는 살인자가 아니요.”라고 강조했다.

일본타운에서 사회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제프 모리의 말은 “내가 1970년에 이철수군을 사귀기 시작했고 좋은 친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면서 철수군의 성격상 도저히 남을 사살 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면 왜 철수군이 경찰에게 걸렸는가? 대답은 비교적 간단하다. 철수의 환경과 조건 때문이라 하겠다. 즉 철수는 한국사람이다. 중국사람도 일본사람도 사회배경이 강하기 때문에 용이치 않으나 철수를 후원할만한 한국배경이 결함 돼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또 하나는 학교 측의 편견으로 “불량소년”이란 명목 밑에서 경찰이 “감시인물”로 주목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백인 증인이 지목한 것도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경찰이 “범인”을 체포해야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시급한 시기에 당면했었던 상황이었다. 우리 속담에 ‘돈이 원수다.“ 란 말이 있다. 즉 돈이 없어서 죽을 지경에 달했다는 탄식의 표현인 것이다. 돈이 있으면 죽을 것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 신문왕 허스트의 딸 패디의 사건만 봐도 증명이 되듯이 돈이 있으면 만사가 해결되는 곳이 미국이다.

미국은 돈으로 해결하는 나라이다. 물질문명의 천국이다. 철수가 가난한 한국인이기 때문에 사형대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철수군이 정말 범죄자란 것이 법정에서 과학적으로 이론적으로 증거가 됐다며 아무도 변명을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증거가 없었다. 모든 증거는 경찰의 입장과 반대였다.

살인사건은 한 번만 아니고 두 번이나 벌어진 것이다. 철수가 감옥에 있는 동안 살인사건이 또 생겼다. 그 사건 역시 철수에게 책임이 지워졌다. 살인죄를 지고 있는 죄수가 또 살인사건을 저지르면 칼리포니아 주법에 의해서 사형에 처하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철수의 살길이란 거의 없어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이철수를 살리자”란 운동이 활기 있게 전개 되고 있었다. 사형을 기다리는 철수군은 “교포 청소년들 중에서 불량소년이 계속 늘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내 경험을 봐서 청소년을 잘 지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라고 권고하는 말을 했다. “압제하는 국가와 항의하는 교회.”란 영문 책(선우학원 박사 저술)을 선우 정민군이 주면서 읽어보라고 권해서 읽고 “많은 감화를 받았지요.” 고 후일 저자에게 말한바 있다.

이철수 사건은 미국의 공정한 재판에 대한 검은 장막이라 할 수 있다. 편견과 선입견에 입각한 차별적 판단이 있었다. 법적 문제를 떠나서 사회문제화 됐고 앞으로 교포의 정치의식을 강화 시킬 수 있는 계기로 전환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철수 살리자.” 운동으로 모금하여 재능 있는 변호사를 고용 철수군의 사형이 무죄로 판결 석방되어서 매우 다행으로 생각된다.

그 후 교포청소년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선우 정국, 김인환등이 발상하여 한국청년쎈터(Korean Youth and Community Center)를 창립하였고 선우 정국군이 25년간 이사장의 책임을 지고 발전시켜 현재는 년 백만달라 이상의 예산을 가지고 사회봉사 사업에 종사하는 코리아 타운에서 최대 사업기관으로 명성이 높다. 한인 교포사회 에서는 보다 더 활발하게 청소년의 교육을 위해서 신중히 노력해야 한다.


김영민 교수의 억울한 판결.



다음으로는 김영민 교수의 억울한 케이스를 살펴보기로 한다. 김영민 교수는 플러톤시에 위치한 캘리포니니아 주립대학에서 정치학을 교수하고 있었다. 동시에 싼타바바라에 위치한 가주 주립대학에서 철학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중이다. 그리고 그는 싼타바바라시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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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9월 9일 오전에 싼타바바라에 거주하는 72세 되는 크라렌스. 레이 라는 은퇴한 해군준장이 어떤 지나가는 사람에게 매를 맞은 사건이 발생 됐다. 아무도 그 사건을 목격한 증인이 없었고 피해자 자신도 가해자에 대해서 확실한 의견을 가지지 못하고 여러 번 진술을 번복했다. 예를 들면 레이의 보고에 의하면 가해자가 20대 청년이고 혼혈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말에 엑쎈트가 없고 체격이 장대한 남자라고 했다. 또 목걸이를 했고 안경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 후 김경민 교수가 경찰의 혐의자로 신문에 보도되자 피해자는 태도를 변경했다. 가해자는 40세 정도이고 엑쎈트가 있고 분명히 “코리안”이라고 진술했다. 그뿐만 아니고 경찰이 보여준 사진 중에서 멕시칸 세 사람을 지적하면서 그 중에 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 후에는 멕시칸이 아니고 분명히 도양 사람이라고 변경했다. 동양 사람 중에서도 코리안 이라고 강조 하면서 자기는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을 분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가 목걸이를 차지 않는 사실을 안후에는 “글쎄 자세히 기억이 안 되지만 ......”하고 말을 바꾸었다. 이런 식으로 피해자가 말을 여러 번 변경했지만 경찰은 무조건 레이준장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경찰은 레이준장의 말을 의심치 않았다. 그런 상화에서 공정하고 공평한 조사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경찰은 처음부터 가해자는 코리안인 김경민으로 결정했었다.

그러면 경찰이 김경민 교수를 가해자로 처음부터 결정하게 된 동기가 어데 있었던가? 여기 대답이 중요하다. 경찰은 김 교수를 가해자로 체포하고 가택수색을 하고도 아무 물적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미국헌법이 보장하는 변호사도 동반치 않고 경찰은 김 교수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김 교수는 의사의 치료를 받고 있었으나 그 것이 경찰의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경찰은 김 교수의 “고백”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런 “고백”이 있을 수 없었다. 경찰의 증인들은 하나도 확실한 증거 없이 김 교수를 가해자로 지명하지 못했다.

레이준장은 가해자가 입은 의복이 푸른 양복에 베지색갈의 셔츠였다고 보고했지만 다른 증인은 양복이 아니고 자케트를 입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런 증거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조작했다.

그러면 경찰의 증거는 무엇이었던가? 몇 가지를 들어본다.
1. 경찰은 레이준장의 진술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앞뒤의 모순과 반대되는 이야기에 아무 주의도 관심도 없었다.
2. 경찰은 김 교수와 범죄자의 관계를 성립 시킬 수 없었다.
3. 경찰은 김 교수의 기본권리를 모두 무시했다.
4. 경찰의 조사는 객관성을 잃고 김 교수를 가해자로 무조건 인정했다.
5. 김 교수에게 도움이 될 수있는 증거는 근본적으로 무시당했다.
이러한 불법과 불공평한 심사 과정에도 불구하고 싼타바바라 신문 보도는 시종일관 경찰측을 돕는 기사를 게재했다. 신문은 김 교수를 범죄자로 취급했었다. 신문기자가 김 교수를 직접 방문하고 “인터뷰”를 한 번도 한적이 없었다. 신문은 경찰의 대변자였다.

이와 같은 경찰의 편견적이고 차별적인 동기가 어데 있는가? 를 알 필요가 있다. 김 교수가 차별적 취급을 받게 된 배후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 싼타바바라 경찰은 오래전부터 소수민족에 대해서 편견적으로 취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2. 김 교수는 싼타바바라에 거주하면서 경찰고 충돌이 몇 번 있었다. 경찰은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김 교수를 잡았다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보통 소수민족은 경찰의 차별을 받고도 반항이 없는데 김 교수는 경찰의 편견적 취급에 반항했다. 특히 경찰서장에게 서신으로 항의문을 보낸 것이다. 그럼으로 경찰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3. 레이준장사건이 발생 했을 때 경찰이 김 교수를 체포하고 “범죄자” 취급한 것은 김 교수에 대한 보복적 작전이 된 것이다.
4.싼타바바라 도시는 공장을 허락하지 않고 환경보장을 강조하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많은 부자들이 이 아름다운 태평양 연안에 존재한 도시에 살고 있다. 그리고 보수적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보수파의 “존. 벌치 소사이어티”의 소굴이기도하다. 이 단체는 케네디, 존슨, 트루먼,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공산주의 에이전트”라고 비난하고 있는 극우에 속한 정치단체이다. 그럼으로 싼타바바라는 극우파와 진보적 민주파의 알력이 심한 곳이다. 이런 환경속에서 김 교수가 민주당 후보로 교육위원 선거에 출마한 적이 있었다. 동양인으로 “리버럴‘ 후보자가 된 김 교수는 보수파의 정치적 원수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5. 싼타바바라시는 백인계와 치카노 빈민층의 격자가 심한 곳이다. 대다수의 치카노에게 정치의식을 고양 할 수 있는 “리버럴” 김영민 교수의 정치적 활동은 경찰 측에서 위험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6. 재판과정에서 “존. 벌치 소사이어티”에 관련된 사람들이 법정에 계속 참석하여 법정내에 공포분위기를 조장했었다.

판사, 검사, 배심원, 경찰등 모두가 백인 일색이었다. 소수민족을 대표하는 치카노, 흑인등 동양인은 하나도 없었다. 즉 미국동남부지방의 경우와 비슷했다. 순백인 사회에서 그들의 감시로 통치된 사회이다. 이런 제도 밑에서 소수민족이 공정한 재판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흑인지도자인 안젤라, 데이비스 말에 의하면 “갤리포니아주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곳이 극소수에 제한 돼 있다는 사실을 흑인들은 다 알고 있다.”라고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김영민 교수의 케이스는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즉 백인 대 동양인, 부수적인 레이준장 대 “리버럴” 정치학교수 미국시민 대 외국인 (김 교수가 시민권 소지자 이지만 백인은 그를 외국인으로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성공은 정치적이건, 경제적이건, 재정적이건 백인사회에서 위험을 준다고 보고 있다. 그럼으로 김 교수 사건은 미국인종차별 정책에 도전이 됨으로 법정에서 까지 차별을 받았다.

이철수 사건과 김영민 사건을 종합해 볼 때 어떤 결론을 맺을 수 있을 것인가? 고 묻게 된다. 두 사건은 근본적으로 같은 종류로 취급될 수는 없으나 같은 한국인, 또 동양인 소수민족이란 입장에서 볼 때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사생아 이철수가 처음부터 불운과 불행에서 시작하여 한생을 억울하게 지낸 가난한 인간이며 사회제도의 희생자이었다. 그 반면에 김영민 교수는 보통이상의 다행스런 환경 속에서 자랐다. 부친이 대학교수였고 장로교 장로였고 어머니 역시 교회생활에 많이 공헌했었다.

김 교수의 형제 중에 하나는 텍사스대학의 교수이고 동생들도 대학교수직을 가지고 있다. 온 집안이 지성인으로 구성된 상류계층에 속했다. 그럼으로 그의 배경으로 보나 교육과 성격, 가정을 보나 김 교수가 지나가는 72세의 노인을 구타할 아무 이유도 없는 교육자이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이철수도 김영민도 형무소 생활을 해야 하는 비극적 결과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 이철수와 김영민 사건의 재미교포와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미국의 인종차별문제는 지난 수 십년간에 많은 발전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9세기 중엽에 이민한 중국인들은 차별대우는 고사하고 미국에서 “법적 존재”의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사람이 살인을 당했을 때 미국법정에 고발 되지도 않았고 무시당했다. 즉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많은 중국사람이 와이오밍주에서 살해당했을 때 아무도 법에 걸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일본이민들에 대한 취급은 별도였다. 강국의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이민자들도 많은 수난을 당했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요즘 도미한 교포들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철수와 김영민 사건을 볼 때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이 미국사회인가하고 실망하고 혼돈에 빠지게 된다. 백인이 흑인에 대한 차별이나 치카노에 대한 차별은 분명하게 보이지만 동양인에게 차별은 때로는 숨어있다. 그런 관계로 철수군이 학교에서 차별을 받고 몰매를 맞고 불량소년으로 취급을 당할 때 철수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의 어머니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사건은 지금도 교포사회에서 자주 보게 된다. 그러나 부모들은 이해를 못한다. 안다해도 숨겨버린다. 결과적으로는 비극의 상황을 일으킨다.

우리사회의 유교정통에서 흘러내리는 “참고 견디라”는 배후에는 불의 부정을 보고도 “적당히” 하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뜨뜻미지근한 태도가 국민성 속에 있다. 이것은 자살의 길이다. 차별을 당했을 때 우물우물 하면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미국사회에서는 자기의 목숨을 내 놓고 고함을 쳐야 살 수 있다. 다원성을 가진 사회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자기 권리를 강조해야 자기 몫을 얻게 된다.

“엥그로색슨” 지배 밑에서 구성된 미국사회 이지만 이제는 그들의 위치가 절대적 지배를 하지 못하게 변경됐다. 60년대 흑인 개방운동의 성공으로 변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흑인에게 감사해야 한다. 아시아 계통은 흑인계의 활동으로 많은 덕을 봤다. 우리의 수는 적다. 따라서 힘도 적다. 그러니만치 우리의 힘으로만은 부족하다. 그럼으로 흑인, 치카노, 인디안(미국 본토인)들과 연대하여야 힘을 낼 수 있다. 이철수 사건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세대차이의 문제였다. 아무리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 어머니가 하루에 16시간 동안 노동을 했으나 아들의 장애를 위해서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아들과 딸의 교육을 위해서 이민 온 교포들의 생활도 그와 비슷하다. 일단 미국에 와서 경험을 해보면 여러 가지 생각지 못한 점이 많아지고 불안해진다. 문제 중에서 제일 먼저 발생되는 문제가 부모와 자녀간의 대화문제이다. 철수는 왜 어머니가 16시간 노동해야 하는지 이해를 못했다. 어머니는 왜 철수가 “불량소년”으로 지목 받고 있는지 이해를 못했다.

두 사건을 두고 경험한 것은 교포사회 내에 대표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교포단체나 지도자가 없었던 것이다. 이민초기시대에는 도산 안창호를 중심한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이 있었고 이승만 중심의 동지회가 있었다. 미국정부는 국민회를 “한국인 대표기구”로 인정했었다. 해방 후 남북분열의 비긍은 미국교포사회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런데 이철수와 김영민 사건이 발생 된 후 어떤 교포단체도 그들의 후원을 위해서 나타나지 않았다.

“이철수를 살리라”란 후원은 한국 이세, 삼세청년들이 중심이었다. 그들이 다른 소수민족 친구들을 가담케 했었다. 소수그룹으로 시작했으나 효과적으로 발전하여 이철수를 사형에서 구출했었다.

미국정부의 철학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창조주에 의해서 그들의 기본 권리는 보장되었다.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의 권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권리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미국혁명은 이처럼 민주적 원리원칙에서 시작 되었다. 이런 독립선언은 단지 선언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고 자유로운 정부를 수립하는데 기초가 되었다.

미국은 지금도 이런 원리원칙을 완성키 위해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이철수와 김영민 사건이 불행한 사건이었으나 우리가 미국을 버리지 않고 여기서 살고 있는 이유는 이런 원리원칙을 믿기 때문이다. 모든 결함과 모순을 물리치고 미국의 주류이념을 따라 역사 창조에 참여해야한다. 그것이 우리 교포사회를 보다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오른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길이 이철수와 김영민 사건을 반복되지 않게 하는 유일의 길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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