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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재미원로학자가 본 김일성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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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6-04-11 00:00 조회12,51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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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재미원로학자 선우학원 박사는 생전에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나눈 대화와 그의 나라사랑 자세에 대해 크나 큰 감명을 받아 그 추억들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선우 박사는 2006년 4.15명절을 맞으면서 "김일성 주석과의 접견을 회상한다"는 글을 특별기고로 보내왔다. 김주석과 나눈 대화 중에는 통일문제, 북미문제, 재미동포 문제 등이 포함되어 있다.

[기고]재미원로학자가 본 김일성 주석

4월 명절을 맞으면서, 김일성 주석과의 접견을 회상한다.①

1990년 4월 15일 밤 중국 베이징에서 비행기 출발이 늦어져 평양도착이 예정시간 보다 훨씬 늦었다. 비행기가 순천비행장에 도착하자마자 두 명의 안내원이 기내로 뛰어 들어와 나를 데리고 내렸다. 비행기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에 태우고 차는 쏜살같이 빠른 속도로 검은 거리를 달렸다. 차는 초대소나 여관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안내원들은 어디로 간다는 설명도 없었다. 다만 “단장님을 몹시 기다렸습니다.” 라고 한 것이 그들의 인사였다. 창밖에는 평양거리의 다채로운 네온사인이 슬라이드 모양으로 스쳐 지나갔다.

차는 만수대 대극장 앞에 도착했다. 그때야 비로써 4월 명절 국제축전의 마지막 밤 종합음악회에 참가하는 것을 짐작케 됐다. 잘 아는 부장선생은 현관에서 “ 왜 늦었습니까? 하여튼 정각시간에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오신 것을 위대한 수령님께 알리었습니다. 어서 들어갑시다.” 하면서 내 좌석으로 안내했다. 미안한 생각에 젖어서 정신없이 안내인을 따랐다.

내 좌석은 주석단 뒷줄이었다. 만수대 대극장은 만원이었다. 개막 직전이었다. 수십 개의 조명이 내가 앉은 왼편으로 쏟아졌다. 김일성 주석님이 조명 빛에 눈을 비비면서 천천히 입장하시었다. 대극장은 박수와 환성으로 요란했다. 주석님께서 몇 발자국을 뜨시고 얼굴을 뒤로 돌리시면서 장철 부총리에게 무엇을 묻는 듯 하였다. 그 순간 장철 부총리는 수령님을 내가 선 곳으로 안내 하시었다.

김일성 주석님께서 내 앞에 서서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하시고 “ 잘 왔소.” 하시었다. 아무대답도 못하고 내 정신은 얼어붙은 상태였다. 이 것이 꿈이 아니고 현실이었다. 조명은 우리 두 사람의 악수하는 장면에 집중됐다. 내 한생의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그 후에 알게 된 것은 4월 명절에 참가하는 미국축하단장이 도착하는가? 제시간에 도착할 것인가? 에 대해서 준비위원들이 상당히 염려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도착한 사실을 수령님께 알리었다고 했다. 수령님이 이처럼 한사람의 동정에 대한 관심이 크고 깊으신 것을 나는 체험케 됐다.

내가 미국축하단과 함께 행동을 못하고 늦어진 까닭은 그 때 에콰도르(남미)에서 「주체사상 국제 세미나」 강연을 하고 오는 것 때문에 늦어진 것이었다.

그 날 밤 음악순서가 다채로웠으나 나는 음악을 즐기기보다 분에 넘치는 수령님의 접견을 생각하는데 몰두 했었다. 일개의 해외동포인 나를 기다려 주신 것,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이 환영해 주신 것, 그 분의 소박하고 겸손하신 자세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요동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전반순서가 끝나고 30분 휴식시간 때였다. 안내원이 나를 데리고 수령님 접대실로 인도 했다. 수령님께서는 “나는 좀 걸어야겠소. 너무 앉아있기만 해서..” 하시면서 넓은 접대실을 이리저리 거니시면서 옆에서 따르는 나에게 말씀하시었다.

“미국은 조선을 두개로 만들자는 것이요. 우리민족은 그 것을 허락할 수 없소. 그 것은 나라 파는 것이요. 그 것은 매국적 행동이야. 우리는 통일해야 해. 통일만이 애국이야” 하시었다.


“문 목사가 왔을 때 민족은 하나 통일은 련방제라고 해서 문 목사도 찬성했어. 그 뿐만 아니고 민족은 자주라야 한다고 하니 자기도 찬성한다고 하더구만.” 하시었다.

“문익환 목사는 저와 동경에서 함께 공부했습니다. 훌륭한 애국자입니다. 온 가족이 애국하는 가족입니다.”하고 말씀을 드렸다. 수령님은 계속해서 말씀 하시었다.

“련방제는 자주적이어야 해. 세계가 다 련방제를 찬성하고 민족 자주적으로 하자는 거 아니요.” 주석님은 계속해서 “우리나라는 지형적 위치로 봐서 어는 한쪽에 붙을 수가 없어 중국도, 일본도, 쏘련도, 우리는 대국의 위성국이 될 수 없어. 우리는 중립해야 해. 중립, 독립, 자주독립이 돼야 해. 그 이상 더 좋은 것은 없어.” 라고 말씀하시었다.

“수령님의 자주사상, 주체사상은 온 세계 사람들의 깊은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남미 에과도르에서 있은 ”주체사상 국제 세미나“에 참가하고 왔습니다. 남미 학자들이 수령님에 대한 존경과 주체사상에 대한 열정적 연구는 대단합니다. 날이 갈수록 주체사상은 세계각처에 확장 될 줄로 믿습니다.” 하고 국제회의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주체사상은 자기나라의 자주성 독립을 위한 것이니까 의식만 되면 자신을 가지게 될 거야.” 하시었다.

“문제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 아직도 의식부족으로 민족통일운동을 활발히 전개치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라고 나는 말 했다. 이 순간 김 주석께서는 “재미동포의 과업은 하나의 조선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요. 미국은 조선이 어느 한편으로 기우려 질 것을 염려하지만 우리는 그 것이 아니야. 우리는 어느 한편에 서지 않아. 우리는 중립이야. 어는 불락에도 속해서는 안 돼. 우리는 불락 불가입이야. 결코 중국이나 쏘련측에 서지 않아 남조선에서는 미국, 일본의 위성국이 됐지만 우리는 중립이야.” 천천히 옮기시는 걸음마다 그분의 말씀의 무게가 옮겨지는 듯싶었다.

“노 태우는 문 목사를 감옥에 넣고 있으니 그런 무지목매 한 짓이 어디 있어? 노인을 그렇게 할 수 있어 고려연방제를 내용을 보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를 하니 무지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야. 대국은 말은 하지 않으나 속으로는 약소국을 우습게 본다고. 그런데 남조선에서는 미국이나 일본이 말하는데 겁을 내고 있는 거야. 나는 남의 말을 듣고 행동하고 겁을 내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야. 자주성이 없으니까.”

4월 명절을 맞으면서, 김일성 주석과의 접견을 회상한다.②

김일성 주석님은 미국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나는 미국을 비방하지 않소. 미국은 경제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얻을 것이 별로 없어요. 거리 관계도 있고 우리는 미국과 적대시하면서 살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일본을 경계해야합니다. 역사적으로 보아서 또 지형관계로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는 언제나 경계해야 해요. 나는 미국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생각합니다. 미국사회를 봐요 요즘 도적질하는 것. 살인강도. 아편 먹는 사람들 그 것이 무슨 자유입니까? 세계에서 범죄가 제일 많은 나라요. 하나도 본 받을 것 없어요.”하고 권위 있게 해설하시었다.

김 주석께서 미국사회를 보편적으로 비판 할 뿐만 아니고 구체적인 것을 전문가의 위치에서 진술 하실 때 그분의 넓은 지식에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수 미국」을 비난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과학자의 입장에서 미국의 미래를 염려하시는 자세였다. 주석님은 언제나 세계적인 견해를 전개시키었다.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전인류의 장래를 위해서 말씀하시었다. 세계의 평화를 항상 중요시하시었다. 그러기 때문에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김 주석을 접견하시고 장시간 대화 한 후 완전히 매혹 되었던 것이다. 카터씨는 “위대한 김일성 주석께서는 평화를 믿으시고 조미 관계의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신다.”라는 신념을 크링턴 대통령에게 전달하여 크링턴의 대북정책이 전환 조미친선관계가 발전되기 시작했었다. 김 주석께서는 사람을 대하실 때 대국의 전 대통령이건 일개의 동포이건 차별 없이 성실한 자세를 가지고 대우하시었다. 나는 그 분과 접견하면서 그 분의 성실성, 겸손한 자세, 인간의 평등한 위치 등 그리고 자비스러운 태도 이 세상 어디서 그런 분이 또 있을까? 마치 성자와 대하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우리식대로 사는 것이 좋아요. 우리 국호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요. 사회주의 공화국이 아니고 민주주의요. 우리는 누구의 앞잡이가 될 수 없어요. 쏘련의 후르시초프가 공산불럭에 가입하라고 권고 했을 때 우리는 거절했어. 왜 거절 했는가? 나는 말했지. 너이는 높은 자리로 발전 됐고 우리는 낮은 자리에 있는데 어떻게 그런 불럭에 가입 할 수 있는가 했지. 너이는 대학 수준이고 우리는 소학교 수준이라고. 어떻게 따라 가겠는가? 우리는 누구에게 매여 살고 싶지 않다고 했지. 우리는 예속국이 될 수 없어. 같은 인식을 미국에도 주어야 돼. 남조선 모양으로 외국에 예속 돼서는 안 돼. 우리는 조선에 외국투자를 반대하지 않아. 그 투자를 보호해 줘야지 그러나 외국자본에 예속 돼서는 안 돼.”

김 주석의 어조는 단호하고 힘찬 어조로 바뀌었다. 인자하신 얼굴에 웃음이 보이지 않았다. 심각한 얼굴로 바뀌었다. 김 주석께서 계속 말씀하시었다.

“남조선에서는 우리가 남침한다고 떠들지만 우리는 남침할 생각도 없고 남침할 힘도 없어. 결코 전쟁은 하지 않아야 해. 남조선은 자기들의 제도. 우리는 우리의 제도를 보장하면서 련방제로 통일 하자는 거야. 선생은 미국에서 통일인사들을 다 묶어 세우시요. 동포들이 조국에 와서 합영투자하는 것을 환영해요. 큰 재벌 보다 중소기업을 더 환영 해. 그 것이 바람직해요. 미국과의 친선교류를 장려하는 것도 민족통일운도이요. 중요한 통일운동이요.” 강조하시었다.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포들이 가장 기쁜 것은 수령님이 건강해서 참 기뻐요 그 이상 더 기뿐 것이 없습니다.” 했을 때 수령님은 “나 건강해 나는 병이 없어. 의사도 건강하다고해. 식사문제도 없고.” 하시면서 만족해하시었다. 나는 “수령님 백살은 문제없습니다. 백살까지는 사셔야지요.” 말했다. “허허 사람의 생명을 누가 아나요. 생명은 아무도 몰라.”하고 미소를 띠우셨다.

이 순간 안내원이 음악후편이 시작될 시간을 알려 주었다. 30분 휴식이 너무 짧았다. 위대한 수령님의 한마디 한마디를 영원히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수령님의 곁을 떠나 내 좌석으로 돌아갔다. 그 분의 성스러운 자세와 고상한 사상과 이념으로 나는 완전히 도취돼 있었다. 절세의 위인이시며 우리민족의 해방자이시고 민족의 영원한 존재를 세워주신 민족의 구세주, 그 분과의 꿈같은 담화를 하게 된 영광, 도저히 상상 할 수 없었던 경험을 무엇으로 표시할 것인가? 내 가슴이 너무 벅차 진정하기가 어려웠다.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리는 인민들이 부럽기도 했다. 해외동포의 한사람으로 반세기를 꿈속에서 그리던 것이 이 밤에 실현 되었다.

4월 명절을 맞으면서, 김일성 주석과의 접견을 회상한다.③


두 번째 김일성 주석님과 접견하게 된 계기는 해외동포들의 환영석상에서 이었다. 4월 축전에 참가한 해외동포들이 한자리에 초대 됐었다.

나는 주석단에 초대 됐었다. 김 주석님 바른쪽에는 한덕수 의장, 왼편에 나의 자리가 지정 됐다. 훌륭한 식사가 메뉴를 따라 하나씩 계속 됐다. 나는 음식에 대한 관심 보다는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에 더 관심이 있었다. 식사도중에 김 주석님께서 “선우 선생은 기자도 아닌데 뭐 적기만 하오 한잔 듭시다.” 하실 때 모두들 웃었다. 수령님은 손님을 대접도 잘 하시고 농담을 잘 하시었다. 옆에 있는 손님에게 부답 없이 가벼운 기분을 안겨주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신분 이었다.

“이떡 하나 자셔보시요. 흰떡 까만 것 무슨 떡인지 아시요?”하고 권하시었다. “떡 맛이 좋습니다. 까만떡이 있구만요.”하고 대답했다. “그 것이 감자떡이요. 나는 감자박사요. 전에 독일 루이자 여사가 감자 이야기를 해요. 독일 사람들의 일용식으로 많이 먹는다고. 그래 나는 감자박사라고 했죠. 왜 그런가? 항일 투쟁할 때 인민들이 우리 유격대를 위해서 감자넝쿨을 자르고 감춰두면 우리 대원들이 밤에 내려가서 캐오곤 했죠. 일본군인들은 몰랐지. 그래 감자는 얼어도 먹을 수 있어요. 언 감자 가지고 국수도 해 먹고....”

수령님은 옛날을 추억하시는 듯싶었다. 이 순간 옆에 있던 최 홍희 총재께서 발언하시었다. “남조선에서는 수령님이 별세했다는 소문이 나 돌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 놈들은....” “항일무장투쟁 시부터 김일성은 몇 번 죽었는지 몰라요. 이따금 그런 소문을 퍼트려서...그런데 그들이 모르는 것은 김일성 나 혼자 없어지면 우리나라가 무너질 것같이 생각하는데. 우리나라 사정에 대해서 모르는 이야기야. 우리나라에는 지금 백오십만의 김일성이 뭉쳐 있어. 김일성 하나만이 아니야.” 하시면서 미소를 띠우셨다.

“자 한잔 드시요. 의사들은 술을 하지 말라고 하는데 오늘은 한잔 해야지. 어서 드시요. 한잔쯤이야.” 하시면서 수령님은 자기의 잔을 들으시고 나를 쳐다보시었다. 술을 못하는 내가 수령님의 권고를 이길 수 없어 억지로 마셔야 했다. 내 얼굴에 활기가 떠오르는 듯싶었다.

“미국에는 요즈음 ‘에이즈’인지 뭐 그런 병이 많이 유행하는 모양인데. 75년도에 알제리아에 갔을 때 불란서 여자 기자가 조선애를 기르고 있다고해요. 내가 방송하는 것을 그 애가 듣고 김일성 장군님 만나고 싶다고 하면서 울었다고. 그래 대사관으로 오라고 해서 만난적이 있어. 그 때 그 나라 여성들이 나를 환영하는 자리에서는 얼굴을 수건으로 감추지 않게 청원을 했고 유사이래 처음으로 실천 했다고.”

“그 당시에 마약에 관련된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탄자니아 대통령이 자기아들이 마약중독에 걸렸는데 북조선에 보내서 마약 먹는 습관을 고쳐 달라고 김 주석님께 요청 했었다. 김 주석께서는 젊은사람의 악습을 떼 주기 위해서 허락하시었다.

젊은 부부가 평양에 도착했고 대학에 입학 했다. 그런데 이 젊은 부부는 아파트에서 특별대접을 받으면서 살고 있었는데 매일 부부싸움이 계속 됐다. 그 사실이 김 주석님께 보고 됐다. 왜 싸우는가를 조사케 했다.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부인이 남편에게 마약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약을 평양에서 어떻게 구할 수 있었는가? 평양에서 구한 것이 아니고 평양 올 때 한 가방 숨겨가지고 왔던 것이다. 그 사실이 발각되자 젊은 부부는 평양에서 추방됐다. 아무리 한나라의 대통령의 아들이었으나 “우리나라의 법을 위반 했으니 할 수 없지”하고 김 주석님은 아쉬워했다. 수령님은 한 사람의 생명을 아까는 자비심이 넘치시는 분이었다.

신약성서에 예수께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 99마리를 놓고 찾으러 떠나는 목자의 이야기가 회상된다.

“하나는 전체를 위해서 전체는 하나를 위해서”란 북조선의 ‘슬로건’은 김일성주의를 표시한 구절인 듯싶다. 남조선에서 국민을 탄압하고 착취하는 상황과는 대조적이라 하겠다. “남조선 당국은 늙은 몸인 문익환 목사, 또 젊은 학생 임수경을 38선 넘은 죄로 감옥에 넣고 있으니 그것은 깡패식이야. 그런 상황 속에서 작년 8.15 때 학생들 투쟁을 보면 대단하던데. 죽음을 각오했던데. 나는 문 목사에게 38선 넘는 것을 반대 했어. 나는 책임질 수 없다고 했지. 조그마한 조국땅에서 두 동강이로 갈라져서 이 얼마나 민족의 비극이요. 통일만 되면 6천만이 하나가 돼서 건설하면 큰 나라 될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건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인민의 건설실력이 대단해요. 서해갑문만 봐도 선우선생 서해갑문 가봤소? 우리는 40억 달라 쯤 들이고 건설 했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70억 달라는 들 것을 예산했었지. 우리의 자본 기술 노동력으로 모두 합심해서 우리민족은 하나로 뭉친 거야. 집단체조만 봐도 알 수 있지. 아무도 우리 하는 것을 못 해. 쏘련, 중국에서 해 보겠다고 해서 우리사람들이 많이 협력 했는데 안 돼. 요즈음 인도에서 사람을 보내 달라고 했다는데. 또 태권도 도 세계적으로 보급되고 있어.”

이 순간 최홍희 총재가 예기했다. “조국 태권도는 역사는 짧은데 세계 제일입니다. 조국청년들은 빨리 배우고 매우 우수합니다. 아마도 주체정신 때문이겠지요.” 했다. 수령님은 태권도 보급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태권도 훈련도 대중화 돼야 해. 선수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지 말아야해. 선수는 대중화 하는데서 자연히 나온다고. 우리나라에서 처음 ‘핑퐁’을 소개했을 때 대중화로 시작했어. 선수는 거기서 나왔지. 지금은 세계 일류선수가 우리나라선수라고. 태권도도 ‘핑퐁’모양으로 대중화 돼야 해. 모든 스포츠가 먼저 정신을 바로잡는데서 시작되니까. 우리인민은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인민이야.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력갱생정신으로 자기운명을 개척하니까. 왜 남에게 붙어살겠는가? 일본사람들은 남에게 붙기를 잘 하지. 일영동맹 또 히틀러와의 동맹, 지금은 일미조약 등이 그 것이야. 그러나 일본은 믿기 어려워. 우리는 미국과 친선하게 되면 미국을 해치지 않아. 상호신뢰 할 수 있어. 일본을 믿기는 어렵지. 나는 쏘라즈 의원(미국 하원의원)에게 말했어. 우리는 미국과 잘 지내는 것을 희망한다고. 재미동포들이 그런 사업을 해야지.”

김 주석님은 재미동포들의 새로운 사명을 지적하시면서 그 사명 추구를 다 하는 것이 민족통일운동이란 것을 여러 번 반복하시었다. 우리의 화제가 바뀌어졌다. 화제는 국제정치에서 한덕수 의장의 결혼문제로 돌변했다. 수령님은 웃으시면서.

“한 의장 결혼을 해야 할 터인데 여자는 혼자서 살 수 있겠지만 남자는 혼자서 못 산다고. 얼마전에 농촌에 갔을 때 한 노인을 내가 소개해서 결혼해준 적도 있지만. 한 의장 어떻소?” 하고 오른편에 앉으신 한 의장에게 농담을 던지시었다. 한 의장께서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이때 김 주석님은 “상공회장이 그만한 실력은 있을터인데...”하고 주석단에 앉은 재일동포들에게 책임을 주시었다. 식사 ‘메뉴’ 마지막으로 국수가 나왔다.

“이것 감자국수요. 맛이 흔치 않을 거요. 한사발 자셔보시요. 국수배는 따로 있다고 하지 않소.” 하시면서 국수를 손님들께 권했다. 수령님의 국수사발을 유심히 보면서 수령님 따라 국수사발을 비었다.

4월 명절을 맞으면서, 김일성 주석과의 접견을 회상한다.④

수년전 도쿄에서 ‘세카이’(세계)지 편집인 (그 당시)야스에 로카이씨의 초빙으로 식탁을 함께한 적이 있었다. 나는 야스에씨가 김일성 주석님과 면담한 기록을 읽고 야스에 본인과 만나고 싶었다. 야스에씨는 감탄했다.

“내가 이틀 동안 밤낮 인터뷰 했지요. 그런데 김 주석님께서 메모 한 장 없이 경제통계를 줄줄 외우시고 옛날 동지들의 일과 연표 등을 기억하시었는데 참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나는 김 주석님이 인용한 통계를 정확히 알아보려고 여러 발표된 책자를 살펴봤는데 조금도 틀림이 없었어요. 그분의 기억력은 초인간적이었어요. 그리고 인터뷰하기가 쉽고 자연스러웠어요. 친절하시고 겸손하신분이어서 묻기가 어렵지 않았으니까요.” 했다.

김 주석은 만나는 사람에게 언제나 호감을 주시었고 좋은 인상을 주시었다. 그분의 웃는 얼굴과 가득 찬 미소는 만나는 사람에게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선우 선생 또 만나서 반갑소. 자주 오셔야지.” 하시면서 악수를 청하시었다. 때는 1990년 8월 18일 경성 여름피서지 이었다. 평양에서 「범민련」대회가 끝난 후 해외대표 여러분이 경성으로 찾아 갔을 때이다. 김 주석님께서 대표들을 환영하시었다.

“범민족대회의 성사를 위해 멀리서 오신 대표 여러분들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하시었다. 해외대표들이 자리에 정돈하여 앉았다. 김 주석님은 형식을 따르지 않고 분위기를 따라 비공식으로 담화하기를 즐기시었다. 김 주석님은 옛날 40년 전에(1948년) 남북연석회의를 위해서 김구, 김규식 선생 등의 어려웠던 걸음을 추억하시었다. 김 주석의 말씀이다.

“우리가 미제의 분렬책동과 ‘단선 단정’음모를 파탄시키려면 반드시 전민족적인 통일전선을 형성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남조선에서 미제를 추종하지 않는 우익민족주의 세력과도 대담하게 합작을 해야 합니다.” 고 김구 선생과 만나는 것을 의심한 북의 고관 일꾼들에게 교시하신 말씀이다. 민족대동단결의 정신은 여기서도 볼 수 있다. 김 주석님은 항일투쟁시대부터 건국시대, 통일촉진시대를 일관해서 민족대동단결을 주장하시었다.

1948년 3월 12일 김구 선생의 연락인 안정근, 김규식 박사의 연락인 권태양 두 분이 38선을 넘어 평양에 도착하여 김 주석님 앞에 나타났다. 김 주석님은 그들을 반가이 환영했다.

“이렇게 만나니 정말 반갑습니다. 어떻게 되어 수고스러운 걸음을 걷게 되었습니까?”하고 물으셨다. 두 연락인은 남북연석회의 소집을 두 분(김구, 김규식)이 지지하며 북에 와서 김 주석님을 뵙고 회의에 참석코자하는데 김 주석님의 의사를 알기 위해서 온 것을 설명했다. 김 주석님은 설명을 듣고 신중히 대답하시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지난시기 김구 선생과 김규식 선생의 태도에 대하여 주시 하였소.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하여 우리가 지난과거를 론하자는 것은 아니외다. 우리는 지난시기 나라와 민족 앞에 어떤 죄를 지었다 해도 현재 그것을 뉘우치고 잘 나오면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본 놈들을 반대하여 산에서 싸울 때부터 견지한 시종일관한 립장입니다. 오늘도 그 립장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시었다.

“조국통일 문제는 몇몇 당파의 힘만으로는 안 되며 오직 하나로 단합된 남북의 애국역량의 거족적인 투쟁에 의해서만 해결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민족의 분단을 막고 나라를 자주적으로 통일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단결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교훈에서 찾은 우리의 변함없는 확고한 입장이며 현 난국을 타개할 가장 혁명적인 투쟁방법입니다.” 하시었다. 이런 정신 밑에서 역사적인 평양연석회의가 소집 됐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경험담을 김 주석님은 범민련 해외대표들에게 새롭게 교시 하신 것이었다. 인상 깊은 말씀이었다.

“90년대에는 통일을 해야 하지 않겠소. 우리가 통일을 하지 못하면 우리 잘못이오. 우리민족의 일을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게 맡겨서는 안 돼요. 우리 손으로 해야죠. 미국에 예속되어서 두개조선 하자는 분렬주의자도 있지만....일본은 경계해야 해요. 미국이 일본을 키웠는데 일본은 경제대국만이 아니고 군사대국까지 될 실정이오. 일본은 천마일 해상보위라는 구실 밑에서 군국주의를 발전시키고 있어요. 일본이 또다시 아시아의 맹주가 될 가능성이 있어요. 일본의 군국화가 조선문제에서 가장 큰 장애가 되고 미국이 남조선에서 나가면 일본이 들어올 거요.”하시고 일본에 대한 경계를 강조하시었다. 계속하시었다.

“일본사람은 우리를 제일 미워해요. 일본의 우쯔노미야씨가 나를 찾아와서 사례하고 일본과의 친선을 제의했죠. 그 후 그 분은 일본 자민당에서 탈당했죠. 일본이 강국 되는데 제일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조선이 통일 되는 거요. 이 사실은 그들이 숨김없이 내놓고 말하고 있어요. 남조선에서 반미감정 뿐만 아니라 반일감정도 이뤄져야합니다.” 고 강조하시었다.

나는 4월 명절시 김 주석님을 접견했을 때 들은 말씀을 기억하면서 주석님의 일본 경계 입장을 유심히 듣게 됐다. 그분의 예언적 선포는 이제 와서 재확인 되고 있다. “지난 역사이지만 우리가 잘 알아야합니다. 남조선 사람들이 ‘피바다’를 보고 왜 과거를 들추는가 해서요. 일인이 우리의 성 까지 고치면서 일본민족화 하려 해서요. 그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돼요. 일제 때는 성을 고쳐야 대학에도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인테리들이 친일을 많이 했어요. 이광수도 처음에는 작품을 잘 쓰더니 나중에는 내선일체를 주장했고 최남선도 그랬지요.” 한탄하시었다.

이광수나 최남선은 성을 고칠 뿐만 아니고 글도 일본어로 썼고 조선청년들이 일본군에 입대해서 일본제국을 위해서 충성할 것을 연설했었다. 박정희, 정일권 등이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서 교육받고 만주땅에서 항일투쟁투사들을 적으로 상대하여 싸운 민족반역자들 이었다. 김 주석님은 또 말씀하시었다.

“그러기 때문에 남조선은 군사통치권까지 미국에 내맡기고 있는데 그것이 무슨 독립국이요. 남조선민중들은 민족통일을 원해요. 다만 미국 앞잡이들, 옛날의 일본 앞잡이들이 방해해요. 전민련, 전대협 구호가 참 좋아요. 반미자주화, 반국사독재 민주화통일, 우리 다 찬성해요.” 계속하시었다.

“그리고 통일은 련방제라야 돼요. 남과북의 주석 또는 의장, 또는 대통령이 순번제로 바꾸어가면서 하자는 거요. 위성국이 돼지 말고 자주적으로 중립국으로요. 우리 주위에는 대국이 많으니까요. 오스트리아 스위스 모양으로 우리도 중립국을 하자는 거요. 그러면 미국도 찬성 할꺼요. 전쟁은 반대요. 이런 자세가 우리나라의 정책화 된 것을 여러분이 널리 선전 해주세요.” 하시었다. 모두들 책임감을 느끼었다.

4월 명절을 맞으면서, 김일성 주석과의 접견을 회상한다.⑤

“우리는 민족자주성을 주장해요. 해방직후 제일 큰 문제가 인테리 문제였죠. 북조선에 자연과학자가 열두명 밖에 안 됐어요. 기차도 움직이지 못했으니까요. 기차를 몰 수 있는 사람은 김해일이 하고 다른 네사람 뿐이었고요. 그분은 교통위원장으로 있었고 김해일 운동을 했지요. 기관사는 없고 화부 밖에 없었어요. 일본사람들이 조선사람을 화부로만 사용했어요.
그때 남조선에서 인테리들이 올라왔지요. 많은 도움이 됐어요.“ 그런 경험을 했기에 북조선에서는 조선노동당을 창설 했을 때 노동자. 농민과 함께 인테리의 위치를 높이였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부당하다고 반대도 많았다. 그러나 김 주석님께서는 인테리의 위치를 중시하면서 노동자, 농민, 인테리의 위치를 동등시했고 국기에도 붓대를 노동자, 농민 ‘심볼’ 가운데 세우게 했다. 사회주의 세계에서 처음 보는 현상이다. 김일성 종합대학을 설립하여 인테리 양성에 중요시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우리식대로 산다.」는 표어가 상징하듯이 민족자주성 정신이 북에서는 보편화 됐고 생활화 됐다. 항일투쟁정신에 입각하여 생활이 실천된 것이다. 김 주석님은 이렇게 설명하시었다.

“우리식대로 하니 동구의 변화, 중국의 천안문사건, 러시아가 내정문제로 흔들려도 우리는 괜찮아요. 우리사회에는 그런 문제가 없어요. 조국은 튼튼합니다. 우리는 수령, 당, 인민이 모두 한덩어리요. 물론 빈부의 차이도 없고. 아편쟁이도 없고. 요즘 유행병으로 떠오르는 ‘에이즈’란 것도 없어요. 그런 것은 다 미국에 있어요.” 김 주석께서 재미동포들에게 물으셨다.

“미국에서 오신 선생들 말해보시오. 우리가 미국에서 배울 것이 뭐요? 남의 나라 간섭하는 것, 이라크와 쿠웨이트 문제를 왜 미국이 간섭해요. 사우디에 왜 미군이 주둔해요. 쏘련이 좀 약해지니까 미국이 혼자 거들먹거리지. 미국은 자본가만 위하고 대통령도 자본가들 심부름만 해요. 후리는 미국식을 따를 생각 없어요. 우리주의는 주체사회주의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이해해주세요.”하고 부탁하시었다. 옳으신 말씀이라 긍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조선에서도 미국과 일본의 예속에서 벗어나서 자주권을 찾아야 해요. 이후락, 장기형, 최규하 세분이 왔을 때 남조선에서 새마을운동을 해 농민들을 잘 살게 하려는데 가뭄이 들어 양수기가 부족해 어렵다고 했어요. 농민들을 잘 살게 하는 일은 좋은 일이지요. 그래서 강철이 부족하면 멀리 가서 사다 쓰지 말고 우리 것을 쓰고 관계시설도 해주마고 남북합작을 제의 했어요. 그랬더니 합작이란 말이 안 좋다고 해서 그러면 협력이라 하자. 그런 말 때문에 구해 받을 필요 없다고 했어요.” 하시었다.

큰 민족사업을 앞두고 적은 일에 신경 쓸 필요 없다는 폭 넓은 견해를 보이신 것이다. 그때 김 주석께서 제의 하신 민족통일 3대원칙을 남조선대표들이 받아들이었고 민족통일의 지침이 됐다. 남과 북, 해외를 막론하여 그 3대원칙을 찬성하지 않는 통일인사는 없게 됐다. 김 주석님은 사고방식의 폭은 넓고 관대하시고 상대방을 쉽게 포용하는 천재적 재능을 가지셨다. 근래에 와서 카터 전 대통령과 회담하시고 평화주의정신, 평화적 친선관계이론으로 그분을 설득한 것은 역사적 예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은 두개의 조선을 반대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데 통일하자는 사람들을 어떻게 감옥소에 잡아넣어요. 북에 왔다가 간 이유로 70이 넘은 문익환 목사를 어린학생 림수경이를 10년이니 7년이니 징역에 처하다니 그거야 감옥에서 죽으라는 말인데 노태우가 악에 찬 사람이 아니고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어요?”하시면서 조금 분개하신 표정을 나타내시었다.

북과남이 협력해서 통일 하자는 것이 무슨 죄 인가? 같은 민족으로 북부조국을 방문하는 것이 왜 죄가 되는가? 이런 법을 누가 만들고 실천하고 있는가?

“조선은 하나다란 정신 밑에서 나는 여러분과 손목 잡고 일 할 것을 맹세해요. 조선의 넋을 잃지 말아야 해요.” 하고 굳은 결심을 보이시었다. 그리고는 미소를 띠우시며. “자 연설은 고만하고 식당으로 옮깁시다.” 하시면서 좌석에서 일어서 맞은편 식당으로 옮기시었다. 식탁좌석에 려연구씨가 앉은 것을 보시고 김 주석께서 “려운형 선생께서 세 번째 평양을 방문 했을 때 자기의 신변의 위험을 염려하시고 자기의 자녀들을 보내겠다고 부탁해서 딸과 아들을 보내게 돼서 딸이 먼저 왔고. 그래서 연구를 쏘련에 유학 보냈지요. 로어와 영어를 배우고 돌아와서 일 잘 하고 있어요.” 하시면서 북에서는 지성인 양성, 인테리화 하는데 우선적 정책을 쓴다고 반복해서 말씀하시었다. 해외대표들 중에 지성인, 교수, 목사들이 있음을 아시고 아끼는 마음에서 말씀하시는 듯싶었다. 그분의 담화 속에는 정치, 경제 문제등 오늘의 현실에 대한 화제뿐이 아니었다. 그분은 추상적 개념, 깊은 사상, 폭 넓은 철학 이념등 경험이 풍부한 교수 앞에서 좌담하는 기분이었다. 어떤 화제나 민족통일의 중대성으로 돌아갔다. 민족의 자주성, 민족통일, 주체적 사고방식, 인민생활의 향상과 평등화, 대중의 민주화 , 5천년 역사의 전통과 민족의 슬기, 정기 등등 듣는 사람에게 깊은 사색의 시간을 넣어 주셨다.

“여러분이 모두 통일애국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시면서 한 사람씩 따뜻한 악수로 작별하시었다. “선우 선생 또 봐서 반갑소. 자주 오시오.” 하신 부드러운 말씀이 내 머리에서 떠나 본적이 없다.

번성한 과수원 앞들에 나섰다. 우리민족의 해방자, 주체사회주의나라 건설자. 세계역사 흐름을 옳게 보시고 판단하시는 예언자, 위대한 수령님을 모신 인민의 행복과 영광을 느끼었다. 나라를 돌보시기에 분주하신 중에도 해외동포 한사람 한사람의 건강과 위안을 살피시는 부드러운 인간성을 어데서 볼 것인가?

조국에서만 맛 볼 수 있는 신선한 공기, 자연의 향취를 피부에 느끼면서 솔밭사이로 나왔다. 아름다운 조국강산. 구름 한점 없는 푸른 가을의 하늘과 도 같이 순결하고 밝은 양심의 소유자이신 위대한 인간 김일성 주석님은 우리 민족과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을 믿게 된다.(끝)<?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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