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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ffooff>[특별기고]유럽 민건활동의 역사적 의의와 오늘의 과제</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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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4-03-11 00:00 조회2,9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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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회건설 협의회(민건회) 활동의 역사적 의의와 오늘의 과제

[발표:박 대원 공동대표]

서론 1장
본론 3장
결론 1장

parkdaewon.jpg 지난 해(2003년)가을, 민건회 창립회원 일부와 후배들이 모여 민건회 30돌 행사에 관해 논의하였습니다. 행사를 한다면 왜, 어떻게 할지를 놓고 몇일 밤을 격론하면서 우리들의 의견을 모았습니다. 한 동지는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당연히 한 일에 불과하므로 내 세울 게 없고, 현재에 이르도록 제대로 한 조직적 성과도 없기에 자랑할 것도 없다"며 사양했고, 다른 동지는 "이제 남은 늙은이들 몇이나 모여 조촐하게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하였습니다. 어떤 한 동지는 논쟁 중에 "자꾸 우리, 우리하는 데 도대체 우리가 어디에 있냐"며 현재 우리들의 자화상을 뼈아프게 지적해 모두가 숙연해졌습니다. 과거에 대한 이런 비판은 모두 진솔한 것이기에 서로의 가슴에 와 닿았고, 이 가슴에 닿은 자기 반성은 우리를 다시 확인하고자 하는 작은 용기와 소망이 되어 이렇게 오늘 여러분과 함께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인간과 사회사에서는 30년을 보통 한 세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대의 규정은 단지 한 세대가 흘러갔다는 세월타령이라기 보다는, 한 세대가 새로운 세대에게 "성취한 일과 못다한 일 그리고 해야 할 일"-역사성-을 이어 준다는 전환의 의미를 담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민건 30주년을 기념하면서 단지 과거를 회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민건이 창립되어 할려고 했던 공동의 목적이 무엇이었으며, 그 실행의 의의와 한계가 무엇이었는지를 성찰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서 오늘 이 시점, 이 자리에서 여러 동지들과 선배, 후배님들을 모시고 우리들 유럽운동의 미래를 향한 이정표를 함께 논의하고 마련하고자는 바램입니다.


I.민건회 활동의 의의

배경
minkun30-18.jpg1972년에서 1979년 까지 한국은 유신체제라 불리는 군부독재의 폭압에 억눌린 암흑기에 놓였습니다. 1960년대를 지배하던 군부독재는 당시 동북아정세가 냉전의 완화기에 접어들고 국내에서 자신들의 반민주.민중적 통치에 대한 저항이 거세어 지자, 친미반공의 이데올로기와 신식민지예속체제의 완결을 위한 군부파시즘을 더욱 강화시키는 유신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사회운동은 반제나 통일의 변혁과제를 뒤로하는 수세기에 몰렸으며 유신헌법철폐 및 개헌을 내건 민주화운동이 고양되었습니다. 국내외적으로 반유신 대중 투쟁조직의 출현이 갈구되는 정세에서 드디어 이곳 독일에서는 1974년 3월 1일 민건이 창립되어 반유신투쟁의 횃불을 밝혔습니다. 독일에서 반유신투쟁의 포문을 연 민건회 등장의 전후 배경은 독일동포사의 발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하 수출산업의 일환으로 노동력을 상품화한 대상으로 간호원, 광부들이 독일에 파견되었고, 이 들은 독일의 외국인노동자 정책이나 정부간의 고용조건등의 불이익과 부당함에 그간 잠재되었던 의식들이 표출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가 개발독재자의 상품이 되었음을 자각하게되는 여러 계기를 통해 노동 자로서 정치의식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유학생들은 주로 국내에서 4.19혁명과 6.3운동, 3선개헌저지운동을 거치면서 학생운동 내지 정치운동을 경험 한 일부가 주동이 되어, 국내정치상황에 대한 투쟁방안에 대해 이미 여러시도와 소규모 움직임을 벌이고 있 었습니다.
―노동자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일부 종교인들은 재독 간호원, 광부들이 직면한 생존권과 인권에 대한 부 당한 대우와 그를 외면하던 관계당국에 항변하는 대변자로서 연대하고 있었습니다.
―동백림 납치사건이후 사건의 피해자들이 반군부독재에 대한 투쟁의 장을 모색하였고, 당시 독일은 국내상 황과는 달리 68학생운동과 반전운동 등의 열기속에서 진보적 사상과 제 3세계와 연대하는 사회운동의 고조 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런 국내외적인 환경은 독일동포 구성원들의 문제제기와 비판의식과 맞물려 조직적 정치투쟁을 가능케하는 조건이 되었습니다.

공동의 목적
민건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선언문에서 천명되어 이후 험난한 반유신투쟁의 길에서 지침이 되었습니다.

minkun30-16.jpg"이 협의회는 박정희 정권의 비민주적 반사회적인 유신체제를 철폐하고, 자유와 사회적 평등을 구현하는 민주질서의 확립, 자립경제의 건설, 대중의 생존권 보장과 복지향상, 그리고 조국의 자주적, 민주적,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기본태도위에 공동적인 사고와 토론을 통해 국민대중의 민주의식을 고취하고 건설적인 사회참여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그 근본과제로 삼는다"(1974년 9월 민건규약 전문, 1976년 10월 민건 헌장의 전문에서 발췌)

이후 민건은 5년동안의 조직활동의 성과를 평가하며 유신정권의 파멸을 목전에 둔 1979년 3월1일에, 향후 전망을 제시한 제 2선언을 통해 민족통일문제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30여년 동안의 국토분단으로 인한 단절된 혈육과 산하의 정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 대결 현실은 남북한간에 서로 과도한 체제경쟁을 낳았고 이로 인한 우리민족의 정신적, 물질적 손실은 남북한을 통해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우리들은 뼈져리게 느껴왔다. ......이제 우리들은 새로운 국제정세의 흐름을 예의 주시하면서 국토분단으로 인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부강한 조국을 우리후대에게 넘겨주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통일에 대한 막연한 소망이나 정열을 현실화시킬 수 있도록 하나의 단결된 힘으로 뭉치는 작업을 서둘러야한다."(민건 제2선언문, 1979년 3월 1일)

민건이 제2선언문에서 밝힌 다음의 테제는 세기가 바R 현재에도 유효한 선진적 지침으로 볼 수 있습니다.
1) 한반도 통일의 원칙은 평화, 자주, 민족대단결이다.
2) 군비경쟁을 지양해 이를 민중의 복지비용으로 전환해야 한다.
3)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하기위해 민주적 절차를 보장하는 법을 제정해야한다. 특히 독재폭압기구(중앙정보부 등)해산. 독재유지법(국가보안법등)등 제 악법의 폐기, 반민주.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는 제도적 보장을 해야 한다.
4) 자주성과 효혜평등의 원칙하에 모든 국가와 수교해야 한다.
5) 민중의 복지를 위한 자립경제를 건설해야 한다.
6) 근로민중에게 사회적 부를 공정히 분배하는 제도적 보장을 해야 한다.
7) 환경문제등 사회개발정책의 제 모순을 근본적으로 시정해야 한다.
8) 언론.출판.결사.집회.사상.신앙의 자유등 국민의 기본적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1979년 민건 제2 선언문에서 발췌)


의의
minkun30-19.jpg민건은 우선 반유신 운동으로서 자기동력을 지님에 따라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일환으로 공개기구활동이 주로 이뤄졌습니다. 한인노동자, 유학생, 종교인, 동백림납치사건의 피해 관련자 등 55인의 발기인으로 시작한 민건은 협의체형식으로 지역별 협의체 구성을 두고 조직확대의 발전과정을 거쳤습니다. 각종 독서회, 세미나, 대중집회, 유인물, 홍보물의 발간( 『광장』과『민주한국』 )등으로 유신체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유럽현지에서 의식화, 조직화사업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국내의 민주화운동에 여러 경로를 통해 힘을 보탰습니다. 투쟁경험의 축적과 대안의 모색은 치열한 논쟁과정을 거쳐 민주화와 자주권의 확립, 궁긍적으로 한국문제의 본질은 통일운동에 달려있다는 변혁과제의 지평을 확장하였습니다. 이런 협의체 운동경험에서 이후 여성, 노동, 타지역 해외운동과 연대, 종교등 여러 부문 운동의 발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습니다. 민건회 10여년 활동의 특성과 의의를 다음과 같이 큰 줄기로 요약해 들 수 있습니다.

―선도적 투쟁입니다.
국내에서 유신독재의 가혹하고 무자비한 탄압속에서 운동역량은 수세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성명서 일회낭독때문에 구속되는 긴급조치 시대에 공개조직으로 맞서 투쟁의 선두에 나서는 일은 그당시 국내외 어디에서나 쉽지 않은 결단이었습니다. 민건은 반유신독재을 정면에 내세운 선도적 투쟁체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민건은 내용면에서도 선도적 지향점을 지녔습니다. 한국의 민주화완성이 민족의 자주권회복이라는 문제와 여하히 연계되어 있고 풀어야한다는 본질적 문제의식과 제기를 끊임없이 하였습니다. 70년대 말 민건의 주요노선이 된 통일문제의 제기는, 그후 국내에서 신군부을 몰아 낸 6월항쟁이후 확산된 통일운동과 90년대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된 통일운동의 맥과 분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민건이 지녔던 이런 선도적 투쟁의 특성은 그후의 험로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재유럽운동에 관련된 자들은 수많은 희생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한국의 역대 정권은 온갖 수법을 동원해 빨갱이, 친북분자로 매도하며 만행을 저질러 오고 있습니다. 이역만리 타향에 묻혀서도 조국을 그리워 할 민건동지들의 한 맺힌 유해와 더불어 현존하는 해외판 장기수들이 민건의 역사와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선진적 조직화를 시도한 투쟁입니다.
민건은 어느 특정신분과 계층으로 구성된 협애한 소그룹운동이 아니었습니다. 민건의 구성원을 볼 때 노동자, 유학생, 여성, 종교인, 지식인등 당시 독일과 유럽의 동포들의 계층을 가능한 총망라하고자 한 협의체였습니다. 이 협의체는 민주적운영을 그 원칙으로 삼아 절차와 결정의 모든 과정을 민주적으로 시행하고자 하였습니다. 민건은 초창기 스스로가 입장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공동의 사고와 공동의 결의를하는 "광장"(민건의 첫 번째 회지 이름)이라 표현했듯이 그 용어나 개념처럼 많은 다양성과 함축성을 가진 자유로운 공간을 스스로와 동포사회에 제시하였습니다. 민건은 출범이후 "노동자연맹", "재독한국여성모임", "연구소", 시의별 "세미나"형태로 부문별 확장, 전문화되어 그 이후 유럽운동발전경로에서 광장의 역할을 하였으며 부문운동과 전문성을 확보한 궁극적 연합체를 지향하고자 하였습니다.
―국제연대를 지향한 투쟁입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분단국가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운동은 당사국만의 문제가 아닌 보편성을 지닌 문제이므로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한국의 문제를 제기하여 이에 따른 국제적 여론을 환기하고 연대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이른바 동백림납치사건의 후과는 박정희 정권의 만행을 세계에 공인시켜서 이후 "70년대 한국문제의 국제화의 기초"가 되었으며 민건회활동은 당시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며 도탄의 대상이 되게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70년대 국내공안사건들(민청학련사건, 인혁당사건등등), 노동.학생운동 탄압, 야당정치인 탄압에 맞서 민건은 국제적 연대를 끊임없이 이끌어 내어 이에 대응했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이후 국내의 민주화운동, 종교, 노동, 농민운동에 다방면의 구체적지원을 가능케 한 것이었습니다. 한국문제, 즉 민주화와 통일문제의 국제화, 국내운동과의 연대, 독일이라는 지역적 유리성으로 조국통일문제의 제기와 그 해외근거지로서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못다한 일
minkun30-14.jpg 민건에 대한 평가는 오늘 이 시점에서 유럽민족민주운동 30주년 행사를 계기로 시작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총체적이고 긴 안목에서역사적 평가는 이자리에서 불가능하지만, 그 취약점과 오류를 지적한다는 것은 과거를 정리하고 앞으로 운동을 가늠하기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일이기에 다음과 같은 몇가지 측면에서 조심스럽게 지적해 봅니다. 여기서 지적되는 "못다한 일"은 앞으로 해 내야할 일이라 하겠습니다.

―운동의 장기성과 노선정립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복안의 부족
민주사회건설과 통일이라는 두 중심 투쟁목표를 골간으로 하여 시작하였으나, 남한의 민주사회건설이 민족자주권 회복이라는 문제와 여하히 연계되어 풀어야만 한다는 이론적, 사상적 대안이 없이 평행선상에서 논란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급기야 선민주후통일, 선통일후민주 등의 입장으로 나누어져 통합을 못보고, 내적 분열과 전체적 균열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민건 자체의 한계이기도 했지만, 그 당시 국내운동 역시 이런 전략과 전술이 혼란된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점을 생각하면 우리 운동사 전체가 걸어온 공통의 진통 과정이기도 합니다.

―운동의 중심세력 확립의 미약
민건의 구성원을 볼때 그 스스로가 광장이라고 표현했듯이 노동자,학생,지성인,종교인등 당시 독일,유럽 동포들이 총 망라된 점은 있었지만 바로 그 망라된 구성원의 배합자체가 어떤 강력한 조직적 중심세력의 취약성을 처음부터 안고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경우는 우선 이곳에서 받는 외국인 노동자로서의 부당함에 의식화는 되었지만 조직을 전체를 주도할 정치세력은 아니였고(노동자 세력은 이후 스스로의 권익보호투쟁과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한 기치를 내세우며 분리되어 나갔다.), 유학생들의 경우는 실제 운동의 주류를 이루기는 했으나 신분상 학위취득 이후의 체류가 불가능하여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장기적인 투쟁조직으로서 민건을 이끌수 없는 자기 한계를 가졌는 데, 특히 1979년 유신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속속 귀국하므로서 스스로의 모순을 노정하게 되었습니다(군부독재타도라는 목적에 비추어). 그 이후 부터 민건은 이곳에 남은 학생,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현실적 생계문제와 앞으로의 진로문제로 중도하차, 귀국 등 조직이 손상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잔류 회원들은 조직을 정비해 장기적인 투쟁으로 들어가야할 국면에서 조직전환의 역활을 공동으로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초기 가담했던 종교인들 역시 제한된 체류기간내의 양심적 가담으로 그칠 수 밖에 없었고. 일부 남은 종교인들은 기독교인을 중심으로한 남북대화라.는 새로운 돌파구(기통회)를 열면서 민건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서 자체운동을 벌리게 되었습니다.

―운동내의 결속력 문제
첫째로 구성원들의 다양함으로 그 자체는 이상적이었고, 반독재투쟁으로는 묶여질수 있었지만 계급적, 계층적 특성들이 융합되는데 어려움이 많았고, 일련의 전문분화 과정이후에 민건 자체내에서 지식인 대 노동자라는 단편적 대립구도가 대두되어 반목이 지속되었습니다. 둘째로 선민주 후통일, 미군철수반대와 지지등 운동의 쟁점등을 두고 사상적인 대립구도가 더 이상 극복될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민주화투쟁만을 주창하는 그룹은 스스로를 순수파라 지칭하고 민건의 정통성, 정체성 문제를 놓고 대립하게되었습니다. 이러한 계층과 노선을 융화하지 못한 내적 대결과 불신 구도는 "찬 곳에는 꽃도 열매도 없다"는 교훈을 남겼으며, 일부 유학생, 지식인들의 귀국과 동지들의 이탈을 통해 더욱 심화되어 조직 결속력에 큰 타격을 주게 되었습니다.

―대중사업의 미숙
민건은 군사 독재정권 타도와 민주화 정권 주창, 노동자탄압에 대한 투쟁, 남북화해와 통일실현 등 국내 정치의 쟁점들을 주로 운동의 내용으로 하였으나 독일, 유럽지역에서 많은 동포들이 참여할 수 있는 대중운동으로서 확산시키는데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초기에는 독일에 취업으로 온 노동자들(광부, 간호원)의 부당한 계약 조건과 외국인으로 이곳에서 당하는 불이익에 항의하고 그 해결책을 적극 모색하는 등 이곳 주류 동포와 밀착된 가운데서 활동하였습니다다. 나아가 유학생들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국내 정치와 사회, 민족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고무하고 영향을 주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습니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조직 자체의 기반을 확대를 못하고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동포사회에 소위 운동인사들과 일만 동포들로 양극화 되었습니다. 이런 양극화에는 물론 한국정부의 공작이 끊임없이 작용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국내운동과의 조직적 연대 관계
해외 운동으로서의 국내운동과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당시 국내 진보세력을 탄압하는 살벌한 상황에서는 공개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국내운동세력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외국이라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대신한 많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국내와 해외를 사안에 따라 또는 조직적인 차원에서 연대하여 역할 분담하는 일과 그 지속성을 유지못한 것은 일정한 한계라 볼 수 있습니다.

―인적, 조직적 연속성이 부족
유학생들의 경우 학업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귀국하여야 하고 취업의 경우도 노동계약이 완료되면 귀국해야 하는 이곳 독일의 체류조건 때문에 운동이나 조직도 대를 이어 받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민건이 세대교체라는 작업을 할 수 없었던 일반적인 제약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가능성 모두를 다 시도하지 못한 점도 있었습니다. 운동의 연속성을 담보할 후대의 양성에 미비했습니다. 내부의 후배들을 후비대로 육성하지 못했으며, 새로 오는 유학생들이며 새로이 구성되는 이곳 동포계층들을 동참시키는 일을 적극 일구어 내지 못했습니다. 특히 2세들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을 간과한점, 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족교육 기관이나 문화사업, 재정사업등에 애초부터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지 못했다는 점은 큰 오류로서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은 모두가 이곳에 체류하며 운동하는 자체를 장기적으로 내다 보지 못하고 임시적으로 상정하여 그때그때의 당면과제에만 급급하였던 실책이라 볼 수 있습니다.

―남한당국의 방해와 탄압에 대한 대응력 미숙
위에서 열거한 사유외에 운동의 발전을 가로막은 장애요인으로 남한당국의 방해공작과 탄압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독일이라는 분단상태의 국가, 즉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대립하던 독일적인 특수성 때문에 남쪽 공안당국의 엄청난 감시와 공세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납치와 고문, 투옥(동백림사건 이후 여러 공안사건 조작), 살해(최종길 교수와 안상근 선생 의문사 사건), 공갈과 협박, 매수, 회유와 전향과 이탈 강요, 연좌제 적용, 프락치 공작, 귀국금지와 추방, 망명 강요, 명예훼손, 미행과 도청, 감시등 형언할 수 없는 온갖 야만적 범죄행위로 유럽운동을 탄압해왔습니다. 특히 장벽과 접한 당시의 베를린이라는 특수공간에 대한 공안당국의 집중적인 정보활동, 운동권과 일반 동포들의 의도적인 분리와 이간질, 적대시, 중상모략책들은 직.간접으로 운동인사들을 동포사회에서 매우 고립시켰고 나아가 운동조직내부에 프락치를 심어 분열을 조장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이후의 운동사에도 여전히 작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송두율 교수 사건에서 남한 공안당국이 스스로 밝혔듯이 저들은 수십년 동안 수백억의 공작자금을 투입해 유럽운동을 궤멸시키기 위해 탄압해 온 것입니다. "운동에서 두가지, 건강과 밀정만 조심하면 성공한다"는 격언이 유럽운동에 주는 시사점은 매우 크다고 할 것입니다.


이상 대략의 평가틀에서, 민건이 상당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조직자체로서 발전, 전환, 계승하는데 어려움을 겪은 내.외적인 주요 원인을 살펴 보았습니다.

결론을 짓자면 민건은 1970년대 초반, 민족과 민중의 양심을 대변한다는 목적으로 출발해, 국내.해외를 통털어 볼 때 상당히 앞서간 선진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인적.조직적 확대와 전환에서는 한계를 가졌던 것으로 자기비판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조직으로서 더 이상의 활동을 멈추었다 하더라도 이곳에 남아서 귀국할 수 없는 많은 운동 1세대들은, 일부가 유럽 운동에 참여하여 지금까지 활약하고 있고, 또한 일부는 비록 현재의 운동 조직에는 직접적으로나 적극적으로 참여는 아니하더라도 민건 초기의 기본적인 운동의 정신과 양심을 지키면서 개별적으로, 분야별로 각자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귀국한 민건의 여러 회원들은 학계를 중심으로 198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변혁과정에서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다해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건의 출범 정신은, 이곳에 남은 운동 1세대들의 삶과 이후 유럽 운동의 흐름과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발전과정에서 면면히 살아 계속 진행중이라 하겠습니다.


II. 오늘의 과제
minkun30-33.jpg 오늘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창립 30주년을 맞아 이 자리에 함께한 것은 우리가 참여해 온 한 세대의 운동을 성찰하고 그로부터 역사적 교훈을 찾아 현재와 미래를 가늠하기 위한 것입니다. 민건의 역사적 배경과 그 발전과정, 특히 비판을 계기 삼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이곳 운동 30년을 우리 민족민주운동사속에 제대로 자리매김하고자하는 희망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실로 30년이 지난 오늘의 국내외 상황은 엄청나게 변모하였습니다. 군부독재정권은 그동안 흘린 수많은 투쟁의 댓가로 종식되고 민주정부가 도래하였으며, 노동 대중들의 피땀흘린 희생을 딛고 경제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무엇보다 2000년 남북정상의 만남으로 채택된 6.15공동선언은 통일정세에 대전환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근본 변혁과제-민주주의의 완성과 민중해방, 민족의 자주권 완성-의 일정한 성취는 되었다해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헤쳐 나아가야 할 수많은 도전이 남아 있습니다. 한국의 이른바 "자유세계의 지배체제"는 금이 가 균열상태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국가의 불의(법과 제도), 정권(공안당국)의 범죄, 범죄행위자(하수인)의 상호모순이 이제 그 막바지에서 종말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반민주 수구세력들은 시대착오적인 냉전논리와 국보법을 무기로 엄연히 자기존재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한편 지구화와 경제성장이라는 화려한 휘장뒤에는 국제독점자본의 예속하에 민중의 생존권 투쟁은 그 어느때 보다도 처절한 상황입니다. 더우기 냉전을 대신한 미국의 패권주의 앞에 우리나라는 언제라도 전쟁에 휘말릴 대상으로 지목되어 민족의 생존권과 자주권은 실로 위기 일발의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은 민족민주운동세력이 행여나 그동안 운동의 전취물에 흡족해 누리려고 하는 방만할 시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추슬려 각오와 자세를 단단히 할 때입니다. 근현대사에서 나타나 있듯이 민족과 나라의 자주성이 크게 훼손당하면 그를 온전히 회복하는 데는 수백년도 더 걸린다는 교훈은 여전히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즉 변혁과제의 장기성과 복잡성, 난이성은 엄연히 우리앞에 상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민건이 유럽운동 초기에 설정했던 민족 자주권 회복의 내용을 다시금 기억하고 그 과제를 발전적으로 풀지 못했던 민건의 평가를 통해서 이제는 그 완결의 길을 모두 함께 도모해야 하는 역사적 시점에 와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유럽운동의 민족민주운동사적 특성과 역할은 반 유신 민주화 운동의 선봉지, 90년대 조국통일 운동의 시발지(플랫 홈), 2000년 대 6.15 시대의 실현지로서 자리매김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유럽운동사에 대한 인식과 자부심을 현존 유럽민족민주운동조직이 공유한다면 유럽민족민주운동은 전체 운동의 전선에서 30년동안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난공불락의 전진하는 초소 역할을 모범적으로 하리라 믿습니다 유럽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이주역사는 길지 않으며 우선 그 수가 소수여서 국내인구에 비교하고 지역적 분포도를 고려하면 시골의 한동네 수준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유럽동포운동의 참여자 수나 지속성 계수을 그에 비교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해왔고 하고 있습니다. 70년대 초 민건창립 이후, 여성운동(여성회), 노동운동(노연), 해외동포운동의 연대(한민련 1978년 8월)로 유럽운동은 확장되었고, 이후 80년대에는 통일운동을 주로하는 기통회, 학술운동인 한국학술원(1982년 2월)의 설립, 민중문화 모임, 노동교실의 창립과 이런 성과를 총합한 유럽민협(1987년 9월)의 결성이 이뤄 졌습니다. 90년대에는 남북해외 3자 연대로 통일운동의 새장을 연 범민련의 결성(1990년 11월)과 이후 1990년대 후반 재독협의 결성, 2001년에는 유럽연대가 결성된 조직적 성과를 이루고 있습니다(이 외에 여러 소 그룹과 독일인과의 연대조직도 거론 할 수 있음). 이런 유럽운동의 척박한 물적토대위에서 양적소수를 질적수준과 상징성, 모범성으로 극복하려는 논의는 계속되어 왔습니다.

* 이를 위해 오늘 이 자리에서 저희들은 다음같은 몇가지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minkun30-31.jpg1. 우선 그간의 운동 과정에서 생긴 상이한 의견이나 인간적인 간극을 극복하고 진정 우리가 하나가되어 동지애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재유럽운동조직체의 대표자와 실무진이 모여 함께할 수 있는 자리를 구상할 것을 제안합니다

2. 이 자리에서는 오늘 발제한 민건의 한계를 보정하여, 포괄적으로 현 정세분석, 각 조직의 애로사항, 유럽운동의 중심체 구축, 운동의 대중화, 필요에 따른 공동 사업과 활동 방안 모색, 해내외 운동의 연계 등등 궁극적인 바램과 이상에 대해 다함께 토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특히 운동의 연속과 지속성을 위해 후배들과 함께 토론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2세들과 새로운 젊은세대의 참여를 위해 당위성 주장의 차원에서 머물지 말고, 구체성을 띈 실천 방안을 함께 모색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민족문제의 특수성을 일방적인 요청으로서가 아니라 신세대의 사고와 언어로서 대 경청, 대화하여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공동작업과 공동사업을 전개 해야 할것입니다.

4. 우리 시대의 과제인 6.15공동선언을 실현하기 위한 국내 뿐 아니라 해외의 운동이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으면 합니다. 이를 위해 6.15공동선언 5주년인 내년까지 여러 창의적 방안을 모아 협의하기를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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