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green>[특별대담]평양거주 비전향장기수 윤희보 선생</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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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3-09-11 00:00 조회3,72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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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 남녘 청년학생들은 "윤희보 선생님은 이북에서 어떻게 지내십니까?"라고 물어 보는 것이 인삿말 중의 한 부분이다.
한총련 학생들을 비롯하여 남녘의 청년학생들이 벗으로 생각하며 존경하던 윤희보 선생(86세)은 다른 62명의 비전향장기수들과 함께 평양으로 떠난지 3년(2000년 9월2일 북으로 이주)이 되었다.
기자는 평화와 통일을 위한 8.15민족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중 윤희보 선생의 자택을 방문할 수 있었다.
역대 한총련 의장들을 포함하여 윤기진, 황선 등의 이름들을 거론하며 안부를 묻는 윤희보 선생의 표정은 무엇인가 걱정이 서려있다. 6.15시대를 맞았는데도 남녘의 청년학생들이 아직도 미지배세력과 한나라 등 냉전수구세력에 맞서 투쟁해야만 하는 현재의 상황이 안스럽다는 뜻을 비쳐준다.
"나는 장군님(김정일 위원장을 뜻함)의 배려로 자식들과 손자, 손녀, 증손까지 4대가 한 집안에서 행복하게 살며 경치좋고 물좋은 곳들을 구경다니며 편안하게 사는데..."라고 근황을 설명하면서도 고생하는 한총련 학생들과 남녘의 청년들을 걱정해 준다.
윤선생은 지난 3년동안 단 하루도 남녘의 청년학생들을 잊어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애국적인 남녘의 청년학생들이 자주, 민주, 통일운동의 선봉대가 되어 백절불굴의 투쟁으로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미래는 창창하다고 마음 든든히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잠이 안드는 때도 많다고 술회한다.
기자가 방문하는 시간에 윤선생은 딸(윤정혁-56)과 사위(장건일-61), 손녀(장정복-23), 그리고 증손녀(장순복-1살3개월짜리)와 자리를 같이 했다. 손자 장성철과 며누리 마혜영, 그리고 둘째 아들은 외출중에 있다고 말한다.
[사진은 민족통신 편집인이 윤희보 선생의 평양 자택을 방문하여 대담을 나누고 있는 장면]
"큰 누이와 작은 누이는 죽었고, 북에 남기고 온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고 설명하면서 "백두3대 장군중 두분(김일성 주석과 김정숙 여사)이 생존할 때 여기를 오지 못해 가슴이 아프다"고 회고한다.
그는 "내 딸 정혁(52세)이가 4살때 헤어져 얼굴도 모르고 있었으나 수령님과 장군님의 보살핌으로 이렇게 건강하게 혈족들을 만나서 함께 살게된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북의 지도자들에게 감사함을 표시하며 "우리가 한데 모여 이렇게 행복하게 살게 된 것은 별로 한 것이 없는 저에게 베풀어 주신 장군님의 인덕정치의 결과"라고 설명해 준다.
윤희보 선생은 1917년 10월10일 전남에서 출생하여 1952년 11월18일 남파하여 체포된 이후 25년의 감옥생활, 보호감호 생활로 남녘에서 지내다가 출소이후 생활중 청년학생들과 함께 자주,민주, 통일투쟁을 전개하여 온 시간들은 아주 소중하였다고 되새기며 그 때의 이러저러한 사연들을 설명해 준다.
그는 남녘에서 감옥생활 때문에 생긴 병들 때문에 평양에 온 이후에도 지난 3년 동안 줄 곧 치료를 받아 왔다고 설명하는 한편 "금년에 기쁜 일이 있었다"고 알려준다.
노년(86세)에 학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분단의 고통으로 그리고 민족의 수난사 때문에 북간도의 대성중학에 두달 밖에 다닌적이 없는 학벌을 갖고 있었는데 장군님의 은덕으로 지난 5월에 <일륙정치학원>에서 단기수업을 받고 1년만에 학사학위를 받았다"며 기뻐한다. 다른 비전향 장기수들중에는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자리를 함께 한 사위 장건일씨(61)는 "조국의 통일을 위해 고생하신 아버님의 투쟁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대를 이어 혁명의 가정을 이루고 싶다고 소망한다.
[사진은 왼쪽 뒤부터: 딸 정혁(56), 사위 장건일(61), 손녀 장정복(23), 그리고 맨앞줄 윤희보 선생이 안고 있는 애기는 1년3개월 된 증손녀 장순복 양]
딸 윤정혁씨(56)는 "장군님의 따뜻한 사랑의 은덕을 갚기 위해,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아버지와 함께 장군님 결사옹위에 한몸 바치고 싶다"며 진지하고 단호한 어조로 결의를 밝힌다.
손녀 장정복씨(23.약사)는 "얼굴도 몰랐던 할아버지를 만나 함께 살게해 주신 장군님께 감사한다"면서 할아버지의 통일염원을 받들어 대를 이어 살자고 갈망하고 있다.
비전향장기수 윤희보 선생의 북녘 가족들 모두가 애국자들이다. 나라의 안위와 통일을 위해 굳게 다짐하는 모습들이다.
윤희보 선생은 남쪽 출생이었으나 전쟁시기에 입북하였다. 1952년 11월 18일 남파된 후 체포되어 10년 복역하였으나 곧이어 다시 반공법으로 5년을 추가복역하고서 1967년 만기 출소했다. 그후 1979년에 감호소에 재수감되었다가 1989년 7월20일에 다시 출소하였다. 복역기간 10년에 이른바 보호감호 명목으로 15년을 지냈으니깐 총 25년의 옥살이를 산셈이다.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선언이 선포된 이후 2개월 반만인 2000년 9월 2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 송환으로 북녘에 올 수 있었다.
기자가 대담을 마치고 나올 무렵 딸 정혁씨는 내게 다가와 "서울에 계신 어머님(소녀 빨치산으로 활약하다가 출소후 통일운동에 참여해 온 박선애 선생을 지칭)과 인척들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며 "우리 아버지를 그토록 잘 돌봐 주셨는데 직접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전한다. 분단은 아직도 이렇게 아픔을 남기고 있다.[끝]
한총련 학생들을 비롯하여 남녘의 청년학생들이 벗으로 생각하며 존경하던 윤희보 선생(86세)은 다른 62명의 비전향장기수들과 함께 평양으로 떠난지 3년(2000년 9월2일 북으로 이주)이 되었다.
기자는 평화와 통일을 위한 8.15민족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중 윤희보 선생의 자택을 방문할 수 있었다.
역대 한총련 의장들을 포함하여 윤기진, 황선 등의 이름들을 거론하며 안부를 묻는 윤희보 선생의 표정은 무엇인가 걱정이 서려있다. 6.15시대를 맞았는데도 남녘의 청년학생들이 아직도 미지배세력과 한나라 등 냉전수구세력에 맞서 투쟁해야만 하는 현재의 상황이 안스럽다는 뜻을 비쳐준다.
"나는 장군님(김정일 위원장을 뜻함)의 배려로 자식들과 손자, 손녀, 증손까지 4대가 한 집안에서 행복하게 살며 경치좋고 물좋은 곳들을 구경다니며 편안하게 사는데..."라고 근황을 설명하면서도 고생하는 한총련 학생들과 남녘의 청년들을 걱정해 준다.
윤선생은 지난 3년동안 단 하루도 남녘의 청년학생들을 잊어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애국적인 남녘의 청년학생들이 자주, 민주, 통일운동의 선봉대가 되어 백절불굴의 투쟁으로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미래는 창창하다고 마음 든든히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잠이 안드는 때도 많다고 술회한다.
기자가 방문하는 시간에 윤선생은 딸(윤정혁-56)과 사위(장건일-61), 손녀(장정복-23), 그리고 증손녀(장순복-1살3개월짜리)와 자리를 같이 했다. 손자 장성철과 며누리 마혜영, 그리고 둘째 아들은 외출중에 있다고 말한다.
[사진은 민족통신 편집인이 윤희보 선생의 평양 자택을 방문하여 대담을 나누고 있는 장면]
"큰 누이와 작은 누이는 죽었고, 북에 남기고 온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고 설명하면서 "백두3대 장군중 두분(김일성 주석과 김정숙 여사)이 생존할 때 여기를 오지 못해 가슴이 아프다"고 회고한다.
그는 "내 딸 정혁(52세)이가 4살때 헤어져 얼굴도 모르고 있었으나 수령님과 장군님의 보살핌으로 이렇게 건강하게 혈족들을 만나서 함께 살게된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북의 지도자들에게 감사함을 표시하며 "우리가 한데 모여 이렇게 행복하게 살게 된 것은 별로 한 것이 없는 저에게 베풀어 주신 장군님의 인덕정치의 결과"라고 설명해 준다.
윤희보 선생은 1917년 10월10일 전남에서 출생하여 1952년 11월18일 남파하여 체포된 이후 25년의 감옥생활, 보호감호 생활로 남녘에서 지내다가 출소이후 생활중 청년학생들과 함께 자주,민주, 통일투쟁을 전개하여 온 시간들은 아주 소중하였다고 되새기며 그 때의 이러저러한 사연들을 설명해 준다.
그는 남녘에서 감옥생활 때문에 생긴 병들 때문에 평양에 온 이후에도 지난 3년 동안 줄 곧 치료를 받아 왔다고 설명하는 한편 "금년에 기쁜 일이 있었다"고 알려준다.
노년(86세)에 학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분단의 고통으로 그리고 민족의 수난사 때문에 북간도의 대성중학에 두달 밖에 다닌적이 없는 학벌을 갖고 있었는데 장군님의 은덕으로 지난 5월에 <일륙정치학원>에서 단기수업을 받고 1년만에 학사학위를 받았다"며 기뻐한다. 다른 비전향 장기수들중에는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자리를 함께 한 사위 장건일씨(61)는 "조국의 통일을 위해 고생하신 아버님의 투쟁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대를 이어 혁명의 가정을 이루고 싶다고 소망한다.
[사진은 왼쪽 뒤부터: 딸 정혁(56), 사위 장건일(61), 손녀 장정복(23), 그리고 맨앞줄 윤희보 선생이 안고 있는 애기는 1년3개월 된 증손녀 장순복 양]
딸 윤정혁씨(56)는 "장군님의 따뜻한 사랑의 은덕을 갚기 위해,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아버지와 함께 장군님 결사옹위에 한몸 바치고 싶다"며 진지하고 단호한 어조로 결의를 밝힌다.
손녀 장정복씨(23.약사)는 "얼굴도 몰랐던 할아버지를 만나 함께 살게해 주신 장군님께 감사한다"면서 할아버지의 통일염원을 받들어 대를 이어 살자고 갈망하고 있다.
비전향장기수 윤희보 선생의 북녘 가족들 모두가 애국자들이다. 나라의 안위와 통일을 위해 굳게 다짐하는 모습들이다.
윤희보 선생은 남쪽 출생이었으나 전쟁시기에 입북하였다. 1952년 11월 18일 남파된 후 체포되어 10년 복역하였으나 곧이어 다시 반공법으로 5년을 추가복역하고서 1967년 만기 출소했다. 그후 1979년에 감호소에 재수감되었다가 1989년 7월20일에 다시 출소하였다. 복역기간 10년에 이른바 보호감호 명목으로 15년을 지냈으니깐 총 25년의 옥살이를 산셈이다.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선언이 선포된 이후 2개월 반만인 2000년 9월 2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 송환으로 북녘에 올 수 있었다.
기자가 대담을 마치고 나올 무렵 딸 정혁씨는 내게 다가와 "서울에 계신 어머님(소녀 빨치산으로 활약하다가 출소후 통일운동에 참여해 온 박선애 선생을 지칭)과 인척들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며 "우리 아버지를 그토록 잘 돌봐 주셨는데 직접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전한다. 분단은 아직도 이렇게 아픔을 남기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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