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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green>[6.15방북③]이산가족의 눈물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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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2-07-09 00:00 조회1,8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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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관기]

백승배 민족통신 특파원은 6.15민족통일대축전 남북해외 공동행사가 열린 금강산에 취재목적으로 방북했지만 체류하던 일주일 동안 다른 해외동포들과 함께 이북의 혈육들을 만날 수 있었다. 대표단으로 참가한 해외동포들의 혈육상봉에 대한 소식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615family-1.jpg[사진]미주동포 김종수씨 부부가 반세기만에 만난 혈육

15일 금강산에서의 통일대축전이 끝난 후 구룡폭포까지 올랐던 우리는 비를 흠뻑 맞고 산을 내려왔다. 곧 우리는 버스에 올라 원산으로 향했다. 원산 송도원호텔로 향하는 우리 일행중에는 벌써 마음 설레는 분이 있었다. 원산 송도원호텔에서 첫번째의 이산가족의 만남이 이루어 진다는 기대때문이었다. 언제든지 이산가족의 만남은 그 어떤 만남보다 더한 감동의 드라마다. 이번 만남의 주인공은 송은숙 여사, 송여사는 알고 보니 나의 신학교 학생시절 기숙사 사감을 역임하신 고 송흥국 목사님의 따님이었다. 송흥국 목사님은 일찍이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셔서 한국감리교회를 위하여 일을 하시다가 은퇴하신 후 감리교신학대학 사감으로 일을 하신 분이다. 12년전에 내가 처음 북쪽 조국을 방문하였을 당시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던 송여사의 동생인 송박사 내외를 평양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었다. 송박사의 부인은 미대학에서 가르치는 성악가 양경자씨로 범민족 통일음악회에 초청을 받아 미주를 대표해 참석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송목사님의 따님인 송여사를 만난 것이다. 송도원호텔에 여장을 풀고나니 11시 반이 가까웠다. 일행중에는 곧 식당으로 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저녁 식사를 포기하고 곧 잠자리에 들었다. 비맞은 후 따스한 잠자리는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16일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후 다시 평양으로 향하는 길에 알아보니 송여사의 애타는 꿈은 무산되어 있었다. 동생을 만나러 오던 송여사의 연로하신 언니는 너무 오랫동안 먼곳을 차에 시달리며 오시다가 차멀미를 견디지 못하여 그만 포기하셨다는 것이다.우리의 애타는 소원이 무산된 것처럼 우리도 안타까웠다.

평양에 도착 창밖을 내다보니 북녘의 어린이가 놀고 있었다. 이들을 본 허선규목사님의 얼굴에 환한 웃음 꽃이 피었다. 허목사님의 여동생과 그 아들의 가족이 온 것이다. 이들의 얘기는 뒤로 미룬다. 버스가 평양을 도착하자마자 점심식사할 틈도 없이 나의 이름이 불러졌다. 사리원으로 가족을 만나러 간다는 것이다. 곧 가방을 챙겨 내려와 미니밴에서 기다리다가 평양을 떠난 것이 오후 1시경, 뉴욕에서 온 배시언목사, 워싱톤에서 온 조창구씨, 호주에서 온 한승수 목사와 박용하씨, 카나다에서 온 정학필씨, 그리고 내가 미니밴에 합승하고, 조영애씨는 만나고자하는 오빠가 몸이 불편하다하여 그 집까지 따로 가야하는 관계로 따로 승용차를 타고 사리원으로 향했다. 가는 곳곳에 개성 100KM 등 이정표가 나올 때마다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나라 민족 젊은 음악가 윤민석씨의 ‘서울에서 평양까지’는 이렇게 노래한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 오만원
소련도 가고 달나라도 가고 못가는 곳 없는데
광주보다 더 가까운 평양은 왜 못가
우리 민족 우리네 땅 평양은 왜 못가
경적을 울리며 서울에서 평양까지
꿈속에서라도 신명나게 달려볼란다.

택시요금 오만원이면 달려올 길을 어떤 이는 호주에서 북경을 거쳐 평양으로, 어떤 이는 카나다에서 북경을 거쳐 평양으로, 그리고 더러는 미국에서 인천, 인천에서 북경으로 다시 북경에서 평양으로, 그리고 드디어는 평양에서 우리는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사리원으로 가는 나의 가슴은 여러모로 착잡했다. 창밖에 비쳐오는 푸른 들과 가즈런히 모를 낸 논들, 그리고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년전 볼 때와는 판이하게 좋아진 모습이 나의 마음을 안도하게 했지만, 누님의 안부가 걱정되어서였다. 4년 전엔 중풍으로 누워계시어 나오지 못하여 누이동생내외와 매형만을 보고 아쉬운 마음으로 등을 돌렸던 까닭이다. 혹 그동안에 돌아가시진 않았는지? 살아계시더라도 나오실 수 있는 것인지? 마음졸이며 드디어 낯익은 사리원 호텔에 들어서니 여러 가족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615family-2.jpg[사진]필자도 매형과 누님, 그리고 혈육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 그런데 이게 웬 호사인가! 매형과 누님, 조카 순화, 그리고 동생 남숙과 분례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것 아닌가? 우린 오랫만에 다시 뜨겁게 포옹하였다.

정말로 오길 백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두시가 넘었는데도 점심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식사를 평양에서 하고 온 줄 알았단다. 우리는 식당으로 가 식구대로 각기 자라를 잡고 앉았다. 감격의 포옹, 눈물, 그리고 웃음꽃이 피었다.

가장 극적인 만남은 조영애씨와 그 오빠의 첫번 만남인데 조영애씨 오빠의 건강관계로 우리와 같이 자리를 하지 못했다. 조영애씨는 두 살인가 그 오빠와 헤어져 처음으로 오빠와 만났다. 사반세기 만의 오누이의 만남! 이 어이 비극이라 아니할건가!

다음날은 평성에서 가족들을 만났다. 최홍희 선생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후에 다섯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평성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럴줄 알았으면 애국열사능 장례식에 참석하여 홍동근 목사님의 묘를 참배할 것을! 유감이었다. 이성화, 이태하, 조창구, 정학필, 박용하, 김현환목사, 이충용, 김종수 씨 등이 가족을 만났다. 이중 이충용 박사는 첫번째 만남이었다. 그와는 버스여행중 동석할 기회가 많아 얘기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의 가슴이 고동쳐오는 것을 나도 옆에서 눈여겨 볼 수 있었다. 그는 나에게 비디오로 녹화해 줄 것을 부탁했는데, 잠시 찍다보니, 나도 생전 처음 만나는 고모인지라 울음을 참지 못하고 매달리는 고모를 두고 촬영을 할 수 없어서 안내에게 부탁하고는 고모를 포옹했다.

고모는 76세, 17세에 결혼하시었다니 내가 아마 한살이나 두살 때 아닌가? 그 후에 몇번은 친정에 오셨겠지만 나는 고모님에 대한 기억이 전혀없다. 그러나 고모는 고모였다. 어쩌면 그렇게 돌아가신 나의 둘째 삼촌을 닮으셨는지, 그리고 12년전 만난 삼촌의 막내 딸 분화가 어쩌면 그렇게 고모를 빼담아 닮은 것인지! 그리고 그 모습은 나의 할머니보다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된다.

고모에게 지난 날을 얘기하노라니 못난 우리 백성들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아 속상했지만 어쩌랴! 지금은 만남을 기뻐해야 하는 때! 지난 잃어버린 세월, 시간들을 잠시나마 메꾸어야 하는 때! 이미 돌아가신 고모의 오라버니들 즉 나의 아버지와 두 삼촌들 소식과 함께 남쪽에 있는 두 고모의 얘기를 하니, 돌아간줄 알았던 동생의 소식을 듣고 덤덤한 것 같으나 기뻐하시는 모습이 역력하셨다.

틈틈히 눈시울을 적신 다른 가족들의 만남을 사진으로 담고, 식사를 마치고, 통일의 그날까지 건강하실 것을 부탁하고 우리는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다. 평양으로 돌아오기 얼마 전에 식구들 소식을 안타까이 기다리던 김종수 씨가 와 꿈에도 그리던 가족을 만나 포옹하고 눈물짓고 있었다. 그들 역시 반세기 만의 만남이었다.

615family-3.jpg [사진]미주동포 허선규 목사는 단신으로 월남하였으나 미국에 이민와서 목회활동을 하던중 1987년 처음으로 방북하여 목메어 그리던 혈육을 만난이후 여러차례 방북하여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다른 이산가족들 보다 밝은 표정들이다.

이산가족의 얘기를 마감하기 전에 나의 선배되는 허선규 목사님의 동생 얘기를 하자. 허목사님은 같은 교단에서 일하는 관계로 이따금 가족 얘기를 나누는 동병상린의 선후배간이다. 내가 1990년 북녘 조국을 방문했을 때도 의사로 일하는 그의 여동생을 고려호텔에서 만난적이 있다. 그 분은 가끔 내 얘기를 들으며 “그래도 백목사님은 나보다 나아. 남한에도 가족이 있고…그래도 기댈 곳이 있지 않아. 나는 혼자였어” 하시며 그의 고독과 고적을 털어 놓으셨다. 그 분은 성화신학교 재학시에 부모님과 동생을 두고 홀로 남하하여 감리교 신학을 졸업하고 시카고 게렛신학교로 유학 석사학위를 받고, 클레어몬트에서 목회학박사를 받으시고 오렌지카운티에서 70년대 후반부터 교회를 개척하여 일하시다가 지난 6월 은퇴하셨다. 북녘의 가족을 찾은 것은 80년대 중반, 찾고 보니 의사인 누이동생 하나뿐이었다. 그가 87년 조국을 처음 방문 동생을 통해 발견한 사실은 이렇다. 그의 형님은 전사했고, 부모님은 평양에서 미군의 융단폭격으로 어머니는 그 즉시, 아버님은 건물에 깔려 하반신마비후 2개월만에 타계하셨단다.폭풍에 휘말려 대동강변에 떨어졌던 당시12살난 여동생은 천신만고 끝에 아버지를 찾았지만 2개월후 아버지마저 잃고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후 조국의 정책에 의해 400명의 다른 고아들과 함께 모스코바를 거쳐200명은 헝가리로, 200명은 폴란드로 보내졌다. 1951년 4월 경이었다. 선실은 오전엔 폴란드 학교에서, 오후엔 조선학교에서 공부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고급중학교를 졸업후 바르샤바 의과대학에입학, 그 후 졸업 1962년 조국으로 돌아와 평양에서 의사로 봉사하다가 지금은 은퇴하여 평양 근교에 산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 아들도 의사이며 두 손녀 딸과 며누리와 함께 산다. “세상은 넓다마는 남매는 단 둘이다”라는 유행가의 구절은 꼭 이들을 두고 하는 말 같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1987년, 이번이 여섯번째라던가? 저들이 만나 웃는 웃음 속에서 울움을 발견하는 나는 과연 염세주의자인가 아니면 패배주의자인가?

아니다. 어머니는 북에서, 아버지는 남에서 돌아가시고, 삼촌들, 숙모들 모두 세상을 달리하셨지만 나는 지금도 통일이 그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믿는 낙관주의자다. 장차 하늘은 오만한 자의 팔을 끊고 우리의 허리를 잇고 싸매어, 땅위와 땅 아래의 눈물을 씻어줄 날이 올 것을 나는 확신한다.



2002년 7월9일


민족통신 백승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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