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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이복신여사가 만난 북녘의 핏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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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8-01-20 20:38 조회2,2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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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신 노길남편집인은 워싱턴 디씨에서 이복신 여사와 만나 대담하면서 "그는 1988년 첫 방북에서 생존한북녘의 동생들과 언니를 만났다그는 10대의 어린나이에 헤어졌던 핏줄들이었기에 38년만에 만난 동생들과 언니를 알아볼 길 없었다평양의 동생들과 언니도 마찬가지였다첫상봉에서 서로를 확인할수 없었던 순간에는 서로들 서먹서먹한 사이였다고 회고"한 이야기를 전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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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이복신여사가 만난 북녘의 핏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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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디씨=민족통신 노길남 편집인)이복신 여사는 1988년 5월 첫 방북에서 생존한북녘의 동생들과 언니를 만났다. 그는 10대의 어린나이에 헤어졌던 핏줄들이었기에 38년만에 만난 동생들과 언니를 알아볼 길 없었다. 평양의 동생들과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첫상봉에서 서로를 확인할수 없었던 순간에는 서로들 서먹서먹한 사이였다고 회고한 이복신여사는 오른쪽 발목에 약3 인치 가량이던 갈색모반이 서로의 혈육관계를 확인시켜주었다.


그는 도미이후부터 북의 가족을 찾고 싶었다. 미국유학후 1958년 워싱톤에있는 아메리칸대학으로 전학 했을때, 미국 적십자사(Red Cross)를  찾아가 북의 가족의 생사여부를 알려 달라고 부탁을 하고, 폴란드(Poland)에서 온 유학생을 통하여 평양가족 주소로 편지를 했고, 또 쏘련에 있는 조선 대사관에 편지를 하여 가족의 소식을 알려고 부탁였다. 그때 평양주소로 미국워싱톤에서 유학시절 보낸 편지는 배달불가(undelivable)이란 도장이 찍혀 돌아오기도 하였다. 돌아온 편지들은 지금도 소지하고  있다.



이복신여사가 그토록 보고싶어 하던 혈육을 만나기 위한 과정은 그동안 간단치 않았다.


 그는 1936년 덕천에서 태어나 두 살때 부모와 함께 평양으로 이주하여 살다 전쟁으로 이산가족이 되였다.

 

그의 삶은 남녘땅에서 홀로 개척해 나가야만 했지만 하나 하나 풀어 나갔다. 1951 년 육군 간호학과에 입대하여 공부하면서도 2년후 부산대학교에 등록하여 정치외교과를 전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부산방송국의 뉴스아침방송아나운서, 가정교사, 선교사 통역등을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장만하였다.

 

그러다가 이복신여사는 1956년 미국 맥머리 대학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유학을 떠났다. 이 대학에서 그는 국제정치와 영문과 부전공을 했고, 대학원에서 교육과를 마칠수 있었다. 이러한 학력 배경때문에 한 고등학교 사회과학원 과장으로 있으며 아메리칸 인디안 역사와 흑인역사 및 미국역사 등을 강의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의과를 공부하려 하였으나 의과와 관련한 영어의 부족을 느껴 국제정치과로 전공을 바꾸고 웨이랜드 대학에서 학위를 얻고 대학원은 센트랄 유니버시티에서 공부했다.  

 

 그후 그는 유학시절 인연이 되었던 파웰씨와 결혼하고, 미국국회에서 일하게된 남편과 두딸과 함께 버지니아로 이주한다.  1973년부터는 버지니아에서 국제골동품과  예술품사업을 하면서 중국과 구라파에서도 소규모의 무역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늘 이북에 계시던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이민생활 초기 가족을 찾기 위하여 뉴욕주재 조선대표부에 전화를 걸고 편지를 보내며 가족을 찾아달라고 호소하였다. 1950년대 단발머리 사진과 심지어는 그때 사용하던 허리띠를 짤라서 자신이 진실로 이산가족이라는것을 증명해 보이는 일까지 보여주며 대표부에 호소했다.

 

그래도 소식이 없어 포기한 상태로 있던중 1988 2월경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평양이라고 쓴 편지 한장을  받고 실로 놀랐다.  처음에는 누가 농담하는가  하여 의아스럽게 생각하며 주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편지를 조심스럽게 열었을때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충격을 받았다.

 

편지를 열며 좁혀진 편지 종이에 제일먼저 보이는 편지글은 - <...불행이도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라는 글발이 보여 앞이 깜깜한 상태였기 때문에 한동안 정신이 나간것같이 멍한 사람이  되었다. 그때 함께 옆에 있던 그의 애완견 켈리 가  다가와 울먹이는듯 나의 심정을  느끼는듯 소리를 내며 위로해주었다.

 

그는 비도 안오는데 우비를 입고 강아지를 데리고 집을 나가서 동네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그래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첫줄만 읽던 그 편지를 다시 펴서 나머지를 읽어내려갔다. 38년전에 헤어진 언니와 동생들은 모두 생존해있다는것이었다. 그리고 편리한때 오십시오라는 글귀가 있었다.

 

 이복신여사는 이렇게하여 삼개월후인 19855월 첫방북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조선민항을 타고 평양순안 공항에 내렸을때 한여성 안내원이 마중을 나왔다. 그와 함께 승용차를 타고 대동강호텔로 갔다. 하루를 지내고 호텔에서 첫상봉을 하였지만 처음에는 서로들 서먹 서먹한 분위기였다.

 

 이복신여사는 오른쪽 발목에 있던 3인치가량의 갈색 모반을 언니에게 보여주며 대화를 이어갔다. 서로가 진짜 혈육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도 있었다.그렇게 하여 첫방북이후14 차례 고향방문을 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듣는 기자는 그의 상봉이야기가 마치도 한편의 영화처럼 느껴졌다.

 

이복신여사는 고향땅을 14번이나 방문하면서 기회만 있으면 고향을 돕고 싶었다. 그래서 약품들을 포함하여 꽃씨 풀씨 등 필요한것을 구해서 지원하기도 했다. 이것이 그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그는 또한 미국의 한 자선단체와 함께 계획했던 현대식 병원건축설계를 뜻대로 성사시키지 못했던 것을 무척 아쉬워했다.

 

그는 소녀시절에도 인정이 많았다. 길 가다가 거지아이를 보면 그냥 지나가지못하는 성격이어서 길가에 고아를 데려다가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가라입혀 고아원에 데려다주기도 하였다. 10대 소녀시절에 쓴 그의 일지에는 이런 구절도 있었다는 것이다. <<...내조국의 독립과 전세계평화를 위하여...>>라고 쓴 문장서문을 보며 지금도 그때 어떻게 그런생각을 했는지 자신도 의아스러워하였다.

 

그는 또 10대소녀시절부터 문학에 소질이 있어 사리원중학교때는  “평양의 봄” 이란 수필을 써 선생님이 국어시간에 그날 학과로 토론도 하였고평양사범학교예과에 있을때는 “남조선에서 싸우는 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 라는 수필로 전학급에서 우승을 한 영예도 받았다. 그는 “신년의 종소리”, “ 봄을 부르는 비둘기 등“ 은 철지 라는 군의학교 문예지에 기고 하기도  하였다.

 

유학온 첫해부터  맥머리대학 문예지 갈래온 에 “ So Long, Fill my heart with your sweet whispering” 이란 시와 수필로 미국학생 오십여명을 제치고 수상 한적도있다. 그후 워싱톤문예지 망향 기타 여러 영문 문예지에 기고하였다.

 

그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머니, 이천재 여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지만 그의 성품중에는 여자도 뭐든지 할수있다는것이 어머니의 좌우명이었다고 한다  봉건주의 시대였던 한때 그의 어머니는 사내들만 다니는 서당에 남장을 하고 다니면서 하늘 천 따 지를 배웠는데 그러던 과정에 여아란것이 발각되어 더 이상 서당에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자신이 어머니의 성격을 많이 배우게 되었다고 자신을 돌이켜본다.

 

기자는 이복신여사의 요즘 생활이 궁금하며 물었다. 그는 금년에 영문시집, <Dream of Clematis>를 발행할 계획이며, 그리고 우리말로 된 책도 출판할 생각이라고 귀띔해 준다. 그는 또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포함하여 조국통일운동 행사들에도 참석하면서 각계각층 동포들과 만나 교류하는 한편 주류사회 미국인들과도 교류하고 있어 주류사회 뿐만 아니라 이곳 재미동포사회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이번에 그를 만나 대담을 하면서 그의 다양한 경험들을 듣고 많은것을 배울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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