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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담]유태영박사와 사모님의 동지적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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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7-03-28 06:33 조회6,456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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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길남 민족통신 편집인은 "세상에 많은 종류의 사랑들이 있지만 고귀한 사랑은 동지적 사랑이다. 기자는 유태영박사(목사)가 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이시기에 2주간의 시간을 내여 체류하면서 유가족을 위로해 드렸다. 그리고 뉴욕, 뉴저지 지역에 머물면서 유태영 논설위원님과 그의 사모 박옥자여사의 사랑이 얼마나 고귀한 동지적 사랑인가를 알게되었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고 회고하면서 특히 두분의 동지적 사랑에 대하여 깊은 감동과 감명을 받았다고 그의 방문 소감을 밝힌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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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다시 묘지를 찿아갈때 땅에 묻힌 부인이 눈때문에 추울까봐 숨장화를 들고간 유태영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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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리준무선생 댁에서 유태영박사를 음식과 노래로 위로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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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카나다 김수해, 시카고 오영칠, 뉴저지주의 리준무 부부, 민족통신 노길남대표가 위로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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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리준무 선생부부는 유태영박사를 위로하기 위해 음악회 행사들을 초청해 마음을 달래주는 모습



[아름다운 이야기=미담]


유태영박사와 사모 ()박옥자여사의 동지적 사랑

 

*:노길남(민족통신 편집인)


 

나는 유태영박사의 사모님,  () 박옥자여사의 장례식을 참석하기위해 뉴욕인근 지역인 뉴저지주의 해링톤 파크를 방문하며 외로움에 견디기 어려워 하시는 유태영박사님과 2주동안 함께 지내면서 두분의 동지적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과 사모님의 일기장을 보면서 이들 부부에 관한 조건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접하며 감탄하지 않을 없었다.

 

세상에 있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 중에는 그 종류도 적지 않다. 단순한 남녀 사랑도있고, 일반적인 부부사랑이나 가족사랑도 있지만 나라를 사랑하고 통일을 사랑하면서 남편의 하는일 모든 것을 사랑하는 아내의 조건없는 사랑을 발견하였다.

 

고인의 유족이며 남편인 유태영박사도 함께 지내던 보름동안 어느 하루도 눈물 적시지 않는 날이 없었다. 평상시에는 이토록 사랑하는지 몰랐었다.  

 

눈올때 싣는 솜장화

 

장례식과 하관식 모두를 끝내고 몇일 후에 묘지를 방문하러 함께 갔다.  눈이 많이 내려 날씨가 비교적 쌀쌀했다. 문을 나서려는 순간 유태영박사는 잠간하면서 눈 올때 싣는 하늘색 솜장화를 꺼내서 차에 싣는다. 날씨가 춥기에 솜장화를 가져다 주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는 매사 세상을 떠난 아내와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가 내가 깜빡했어라고 착각하는 것을 스스로 알고 엷은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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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세상 떠난 사모가 묻힐때 눈이 온 것을 알고 그후 묘지를 방문할 때 솜장화를 지참한 남편  
 

그는 아내를 배우자이자 동역자, 그리고 동지로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통일운동을 위한 여행이나 북부조국을 방문할 어느 순간도 반대하지 않았고 싫어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고 회고하면서 특히 브롱스 교회 30년을 시무하면서 반정부 인물, 빨갱이 목사 온갖 사회적 모함들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도 그의 아내는 유태영목사의 신념이나 의지에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특히 김일성주석의 조문파동때 일어난 엄청난 고통도 거뜬히 극복하면서 오히려 유목사의 입장에서 함께 투쟁한 동지였다.

 

일기장에 속에 기록된 조문파동

 

유태영목사의 부인 박옥자여사는 평범한 목회자의 부인이였지만 남편이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재미본부 공동위원장의 아내이기도 하였다. 유목사는 범민련 행사로 나들이가 많아졌고, 회의나 행사에 참가하는 빈도가 많았지만  한번도 사모님께서 불평한 적이 없었다고 회고하면서 부부의 사랑도 있었지만 동지적 사랑에도 감동받았다고 회고 한다.

 

김일성주석의 조문 파동때 한국에서도 애국지사들이 탄압을 받았고, 조문을 가고 싶어도 당국의 반대, 보수언론들의 반대여론 등으로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해외동포사회 가운데 미국동포사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범민련 재미본부 의장이셨던 양은식박사의 권유로 공동의장인 유태영목사가  보수적 교인들이 대부분인 부롱수 교회의 처지를 알면 조문차 이북을 가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친 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던 양은식 박사의 제의를 저버릴 없어 북행길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문차 이북을 떠나자 부롱스교회는 난리가 일어났다. 수백명 교인들 중에 참석하던 교회 교인들이 절반 넘게 줄어들었고, 뉴욕현지 동포언론들은 유태영목사에 대한 색깔비판의 공세를 하늘을 찌르는 지경으로 조작하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사모님, 박옥자여사는 이에 대해 불평 한번 하지 않았다는데 유태영박사는 뜨거운 동지애를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고 사모님은 당시 역사의식의 수준이나 통일운동 경력이 그리 성숙한 것도 아니었는데 어찌하여 남편에게 한마디 싫은 소리하지 않고 태연하게 위로해 주었는지 아직도 아내의 자세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내의 일기장을 두적두적 하면서 다시 눈시울을 적신다. 조문파동이 일어난 그날(1994 78) 이후 열흘째 되는 사모님의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보, 나는 당신을 알아요. 요령도  피우고, 아첨도 안하고, 자기 유익을 위해서 마음에 없는 말도 하지도 않는 곧은 대꼬치 같은 성격과 거짓없는 마음을

 

나는 언제나 나의 안전과 당신의 안전만 생각하며 소극적이고 안이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인데그러나 나는 당신의 생각과 이념과 사상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사랑해요.”

 

사모님의 일기장에서 이런 글발을 읽으면서 부부의 사랑 이상의 경지에 있는 동지적 사랑의  단면을 접할 있었다.

 

이들 부부가 1956 510 결혼하였으니까 일기를 쓰는 시간은 결혼한지 38년째가 되는 해인 1994년이었다. 조문 일행들이 북행길을 떠난후  사모님의 일기는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당신을 보내고

 

당신이 원하는 남과 북이 하나되는 통일을 앞당기는 일을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우리 역사의 한페지를 달리하는 계기가 것입니다. 이곳 미국에서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범민련 대표들 소식과 함께 한국에서는 범민련대표들이 조문계획하려다가 모두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어요. 국가적으로 장례식에 추도하는 것도 위법으로 만들어 금지하고 모두 구속하고 있어요.

 

대화를 하자는 마당에서 행동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으니, 통일은 정치인들이 막고 있는 것입니다. 민간차원에서 찾는 밖에 없습니다. “

 

사모님은 조문과 관련하여 보도하는 신문들을 보면서 그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반세기 역사가 흐르고 언제나 식민지 생활에서 너무나 익숙해 있는 우리의 민족이 안타까울 뿐이다. 미국에 속해서 그들 이익을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아까운 젊은이들을 누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지도 모르고 전사자들, 병신이 환자들, 콜라시작, 양담배, 고기, 식민지정책에 No 못하고있는 형편, 한국정부도 미국에 No 못하는 것이 답답 하기만 하다.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 하는 것은 우리민족의 수치와 슬픔이 아니겠어요..." 

 

사모님의 일기는 그 당시의 결심을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 


나는 이제 친북이요, 빨갱이요라고 비방하는  소리들을 무서워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당신은 친북인사도 아니고 더욱 빨갱이도 아니니깐요. 그것은 내가 알고 하나님께서 아시니까요.

 

부디 몸조심하고 자기 소신을위해서 용감하게 행동하는 남편을 저는 마음속으로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이 내가 어떤 곳에 가서도, 어떤 일을 저질러도 당신이 문 밖에서 울고 섰을 모습을 떠올리면 나는 만사 제쳐두고 당신께로 간다는 말을 되 새기며 사랑한다는 말을 합니다. 1994.7.18 당신의 아내 드림-“

 

좁은 , 고독한 길을 합께 가렵니다!

 

 

 

사모님이 쓰신 일기중에 2000 129일자의 한부분을 읽다가 발견한 글발들이 눈을 끈다.

 

당신은 넓은 길을 놔두고 좁을 길을 걸었습니다. 아마 나는 넓고 편안한 길을 걸어가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30 목회생활을 하는 동안에도하루아침에 갑자기 외면하고ㅊ돌아서는 교우의 모습을 지켜봐야 했고, 서로 엉켰던 두터운 정들이 낮선 사람들 대하듯이 서먹해 지는 쓰라림, 가슴속에서 고동이 멈추는 안타까움들 되씹어야 했던 외로움, 이런 모든것들을 삼켜야 했습니다. 당신이 택한 좁은 때문에

 

당신의 설교《진리가 당하는 아픔》, 《작은 것을 사랑하리》, 《어느 편에 설것인가》 등의 귀한 설교들이 오릅니다당신이 외로울때  ‘목사님 제가 있지 않아요. 힘내세요!’하며 언제나 뒤에서 조용히 말없이 기도해왔어요.

 

아내의 씻겨준 모습에 감동한 간호원

 

1980 광주항쟁이 일어났던 시기에는국내외 동포사회에 시위들도 많았다. 워싱턴 디씨의 백악관 앞에서 단식시위가 있었는데 단식시위에 참가한 유태영 목사는 시위 도중에 아들한테서  목사님의 사모님이 아프다는 전화를 받고 시위도중 뉴욕의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 입원한 부인이 몹시 앓고 있어서 목욕도 없는 처지인것을 발견하고 병원에서 플라스택 양재기 같은 세수대를 빌려다가 사모님의 발을 씻어 주면서 간호를 주었다. 모습을 관찰한  병원의 백인 간호원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병원에 근무했던 동포간호원에게 코리안 남편들은 대부분 저렇게 부인의 발까지 씻어주는가라고 물어보면서 부부관계 문화에 대하여 물어 본 다음에“20여년 간호원 생활하면서 저렇게 극진한 사랑을 보이는 남편은 처음보았다 밝히면서 유태영목사에 대하여두고 두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들 부부의 사랑은 브롱스 교회 교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져있다. 조문파동으로 비록 교회를 떠난지 27년이 넘은 시간에 사모님의 부고가 알려지자 그때 떠난 교인들의 다수가 장례식에 와서 조의를 표명하면서 극진하게 위로하는모습들을 있었다. 유태영목사님은 이러한 교인들에 대해서 한분한분 설명하면서 세월이 흘러가면 진심을 아는 같다고 돌이켜보면서 30 목회생활의 이모저모와 관련하여 사모님과  얽힌 주요 일화들을 소개해 주었다.

 

 

나라사랑, 민족사랑의 동지적 관계

 

당신이 걸어가는 좁은 , 고독한 길을 함께 걸어 가려고 합니다.” 


사모님은 이미 유태영박사의 부인이자, 조국통일운동의 애국자가 되었다. 함께 북녘을 다니면서 남편의 혈육을 친혈육으로 사랑해 주었고 분단민족의 서러움을 하루 빨리 종식시켜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모님은 당시 일기장(2002 210)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50년간 생이별한 이산가족의 한 맺힌 삶을 위해서, 통일을 발걸음 다가서는 일을 위해서 애쓰는 마음에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마지막 길을 떠날 곁에서 지켜주고 싶습니다.”라고 생각한 사모님이었는데 남편 유태영목사님을 두고 먼저 떠나 버리고 말았다.

 

고인의 일기장을 보면 잉꼬부부이면서 분의 관계는 좁은 길의 동반자, 통일운동의 외로운 길을 가는 동지적 관계로 살아 오셨다.

 

이들 부부의사랑은 일찍부터 평범한 차원을 넘어 동지적 사랑으로 승화되었다. 유태영박사가 사모를 사랑하는마음, 사모 박옥자여사가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은 비교할 없을 정도로 두분의 사랑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였기에 조국사랑, 민족사랑, 인류사랑에서도 일치할 있었다.

 

유태영 박사는 부인을 잃은지 보름만에다행이야 내가 먼저 안가고 아내가 먼저 갔기에  사람이 외롭지 않아서 마음이 놓인다 마음을 스스로 진정시키면서 만약에 내가 먼저가고 사모님이 혼자라면   사람은 견디기 힘들 것이라고 자신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사모님은 1940년대 평양에서 서울로 유학와 공부하는 기간 전쟁이 터져 부모를 비롯하여 일가친척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전쟁이후 고아나 다름없이 지낸 외로운 사람이었다고 목사는 사모님의 가족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유태영박사는 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으로 3세계 나라들의 핍박받은 역사를 비롯하여 제국주의세력들의 착취와 침략 행위에 관한 역사, 그리고 한국의 미국의 식민지 노예처지로서의 비극사를 집필하면서 자신도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고 겸손해 하면서 남은 생애는 집필로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이룩하는데 노력하고 싶고 인류사회 평화를 위한 글을 통하여 인류정의를 위해서도 한몫 하고 싶다고 생애 마지막 악장을 보람있게 총화하고 싶다고 피력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멀리서 이곳 뉴저지주까지 와서 위로해준 시카고의 오영칠 성생, 카나다의 김수해 선생, 워싱턴 디씨의 신필영선생, 민족통신 성원들과 북부조국의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선생들, 유럽동지들, 일본동지들, 그리고 리준무선생부부, 최기봉선생, 김수복선생 미국내 전국에 있는 동지들이 위로편지, 조문, 조화들을 보내주어 아내가 꽃속에서  있었고, 축복속에서 있어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

Rev. Tae Young Yoo

36 Glen Ave. Harrington Park

NJ 07640

*전화:201-750-7379

taiyoo2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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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유태영박사, 위로해 준 동지들께 감사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editorial&wr_id=1790


*[인물]유태영박사 사모 박옥자여사 영결식 꽃속에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8571

 

*부고유태영박사 사모 박옥자여사 소천: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social&wr_id=8087

 

***유태영박사 8순잔치 사모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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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박사 금혼식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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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신영순님의 댓글

신영순 작성일

목사님 사모님과 동지사랑 이야기 참 멋져요!

속히 아픈마음 추수리시고 힘내세요!

그리고 좋은 글 속히 올려주세요!

투쟁!
재기!
건투!

참사랑님의 댓글

참사랑 작성일

참사랑의 스토리를 읽는 기분,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달라스
베터란 병원

아름다움님의 댓글

아름다움 작성일

조건없는 것은 모든 것이 순수합니다.
그 모범을 보여주신 목사님의 부부사랑~

두분의 사랑은 또 조국사랑, 민족사랑이 곁들여 있어
그 모습은 아름다음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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