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름난 등산가 김명준님의 분단아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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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4-12-21 16:05 조회4,35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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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김명준님은 최근 자서전격인 도서를 출판했다. 그의 도서중 ‘북의 가족과 55년만에 만난 극적인 이야기’에 이어 이번에는 그 이후 북에서 온 편지와 관련한 이야기를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인물]이름난 등산가 김명준님의 분단아픔(2)
[사진]필자의 미국가족(부인과 1남3녀)
[사진]김명준님의 북녘 형가족과 작은 형의 형수님 조카들, 오른쪽은 저자의 미국의 가족들(부인과 1남3녀)
글:김명준(로스엕레레스 거주동포, 산악인)
"북에서 온 편지, 아! 어머지"
미국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북한 가족 이야기를 전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구순을 넘긴 연세이여서 감정이 무뎌진 탓인지 “어떻게 살고 있대?”라고만 할 뿐 별 말씀이 없으셨다.가슴이 아팠다. 정신이 맑았다면 펑펑울며 장남 소식에 반가워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헤어진 세월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듯했다. 몸만 불편하지 않다면 당장 북한으로 모시고 가 형과 가족을 만나게 해드리고 싶었다.
얼마 후, 북에서 편지 한 통이 왔다. 생이별한 어머니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 담긴 형의 편지였다. 그렇게 서신 황래가 시작되면서 형수아 조카들도 자주 안부편지를 보내왔다. 북한 가족의 편지를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었다.
내가 북한 가족을 다시 만난 것은 2004년 4월이었다. 신의주 근처 용천역에서 큰 폭발사고가 일어나 사람이 많이 상했다는 뉴스 속보를 보고 바로 북한행을 서둘렀다. 용천역이라면 인배 형이 사는 도시였다. 나처럼 북한 가족의 안부를 염려한 이산가족 다섯 집이 함께 나섰다. 평양에서 만난 형은 다행히 가족에게는 아무 피해도 없다고 했다.
북한 가족을 찾은 후부터 나는 미국에서 약과 생필품, 현금 등을 수시로 북한으로 보내고 있었다. 특히 의약품이 많이 모자란다고 해서 이때도 영양제와 항생제 등을 많이 가져갔다. 항생제는 북한 시장에서 고가로 팔린다고 들은 바 있어서 노파심에 그만 형에게 안 해도 될 말을 하고 말았다.
“형님, 이 약은 팔면 안 됩니다.”
그때 한동안 말없이 있던 형수가 입을 열었다.
“삼촌, 우리는 가난해도 그렇게는 안 삼니다.”
항생제는 의사의 처방을 받아야 하는 의약품이므로 아무나 먹어선 안 되고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주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북한 가족들이 약을 팔아 돈을 챙기려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었다. 형수말을 듣고서야 아차 싶었으나 이미 오해를 해버린 뒤였다. 내가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탓이 겠지만, 그래도 순간 몹시 부끄러웠다.
힘들게 사는 북한 가족을 돕는답시고 내게 혹시 동정심이나 우월감 따위의 감정이 있었던 건 아닐까. 내 지원이 큰 힘이 된다고 하니 북한 가족을 좀 편하게 대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돌이켜봐도 그런 마음은 없었던 것 같은데….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긴 해도 형수의 그 한마디가 북한 가족을 생각하는 내 마음에 두고두고 거울이 되고 있다.
사실 내가 북한 가족을 지원하게 된 것은, 나는 경제적으로 잘살고 그들은 못살아서가 아니었다. 큰형은 한창 어머니가 필요한 열살때 어머니와 헤어졌다. 그런 어머니를 나 혼자 독차지한 데 대한 미안함이 가장 컸다. 마음이 아닌 물질로 생색내기 시작하면 이 순수한 동기는 오염되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 북한 가족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 않아도 반듯하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편지를 그리 자주 보내면서도 형이나 형수들, 조카들까지 단 한번도 돈 얘기를 하거나 아쉬운 내색을 한 일이 없었다. 오히려 ‘리먼 브러더스’사건으로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졌을 때는 내 사업을 걱정하는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나는 2년에 한 번씩 북한을 찾아 가족의 정도 나누고 그들의 생활도 보살피며 어머니를 독차지한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희석시킬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쌓인 한을 풀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평생 다른 사람에게 힘든 내색, 싫은 내식 한 번 하지 않던 그 성격 그대로 마지막도 홀로 감당하셨다. 2006년 8월13일, 92세 일기로 한 마지막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에도 나는 산에 있었다. 주말 산행이어서 새벽에 어머니를 뵙고 길을 나섰는데, 그만 그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내가 LA 근교 산골고니아를 한창 오르고 있던 오전8시, 주무시듯 운명하셨다고 했다. 산에서 내려와 전화통화를 통해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연세로 보나, 맑지 않은 정신으로 보나 곧 도래할 일어었건만, 곁을 지키지 못한 아쉬움과 죄송함에 그때 처음으로 산에 미쳐 산즌 스스로를 원망했다. 평온해 보이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서야 울음을 그친 나는 저세상에서나마 어머니가 평생 그리워하던 이들과 해후하기를 빌었다.
북에도 소식을 전하고 어머니의 유품을 보냈다. 연락이 닿을 때마다 연로하신 어머니의 안부부터 챙기던 큰형과 북한 가족들도 얼마나 가슴이 무너졌을지 짐작이 가도도 남는다. 큰형수는 “이제 여기 걱정은 그만하시고 건강에 힘쓰시라”고 하지만 내가 등반을 그만둘 수 없는 것처럼 북한 가족과의 끈도 놓을 수 없다. 어머니가 건강할 때, 좀 더 일찍 그들을 만났더라면 분명 어머니가 행을 일이다. 나는 그저 어머니가 했을 그 일을 대신할 뿐이다.(끝)
*필자 김명준님은 1943년 평남 안주군 출생. 전쟁시기 어머니와 누나 둘과 함께 남녘으로 피난와서 살면서 서울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후 KBS방송과 대림산업에서 근무하다고 미국으로 이민왔다. 부인과의 슬하에는 1남3녀(판사, 의사, 교수,막내는 법대 재학중)를 두고 있다.
[인물]이름난 등산가 김명준님의 분단아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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