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이 찾아온 1월 이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치소에 갇히고 기소됐다
국정원 대선개입 논란 직후…
탈북한 동생은 신문센터에서
국정원 직원 협박·폭행 받고
허위로 “오빠가 간첩” 증언
지난달 무죄 선고 받았지만
국정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유씨는 정신적 충격으로 협심증 증세를 보였다. 유씨는 2004년 한국에 올 때만 해도 이런 일을 겪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저는 김정일 정권이 싫었어요. 관리들은 여유롭게 사는데 서민들은 너무 가난해요.” 그는 함경북도 경성군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탈북 직전까지 함경북도 회령시의 한 병원에서 준의사(의사보조. 3년제인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면 준의사 자격증을 받는다)로 근무했다. 치료약이 없어 죽는 주민이 너무 많았다. 의사들은 치료약을 빼돌려 생계 자금으로 쓰기도 했다. “남한에서 의학 공부를 해 의사가 되자고 결심했지요. 저희 집안은 화교였지만 저와 동생은 평생을 북한에서 자라 스스로를 한민족이라 여겨요. 중국에서 살 생각은 없었습니다. 2004년 3월10일께 홀로 북한을 탈출해 그해 4월25일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유씨는 탈북자 정착 지원금을 받아 그해 8월 대전시에 정착했다. 고생 끝에 2011년 6월 탈북자 특채로 서울시 복지정책과 계약직 공무원이 됐다. 기초생활수급자 상담을 하는 업무를 맡았다. “2년을 근무하면 정규직 공무원이 될 수 있다는 꿈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만 국정원이…” 유씨는 한숨을 쉬었다. 대머리 수사관, 아줌마 수사관, 60대 수사관… 유씨 남매의 불행은 2011년부터 시작됐다. 그는 2011년 북한을 빠져나와 연길에 살던 여동생을 데려오려고 했다. 결국 동생은 지난해 10월30일 중국인 여권으로 제주공항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 유씨는 바로 국정원에 동생의 입국 사실을 알렸고, 동생은 경기도 시흥에 위치한 국정원 합동신문센터로 보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유씨는 자신처럼 동생도 수개월 뒤 풀려나와 한국에서 함께 살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동생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올해 1월 국정원 직원들이 유씨 집으로 들이닥쳤다. 국정원이 유씨 동생에게서 받아냈다는 자백은 놀라웠다. “제가 (남한에 정착한 지 2년째인) 2006년 5월 심장마비로 숨진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러 북한으로 다시 건너갔을 때 북한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에 붙잡혀 고문을 받은 뒤 남파 공작원 활동을 제안받고 승낙했다는 거예요. 모두 꾸며낸 것들이에요.” 이밖에도 유씨는 2007년 8월, 2011년 7월, 2012년 1월 세차례 북한을 드나들었고, 2011년 2월 인터넷 메신저로 접속해 연길시에 머물던 동생을 통해 탈북자 정보를 북한 보위부에 건네줬다는 혐의를 받았다. 유씨는 동생의 자백이 허위라고 반박했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세차례 북한을 드나든 적은 없었다. 그는 국정원과 검찰에 줄곧 동생과의 대질신문을 요구했다. ‘증거 인멸과 조작의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검찰은 동생의 말만 믿고 유씨를 기소했다. 지난 4월4일 시작된 유씨의 재판은 검찰의 요청으로 비공개로 진행됐다.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해 진술한 유씨의 동생과 유씨 변호인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동생의 자백은 사실상 국정원 수사관의 고문에 가까운 압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유씨 동생이 처음부터 오빠를 간첩으로 지목한 건 아니었다. 유씨 동생은 국정원 수사관의 집요한 설득에 지쳐 허위자백을 했다며 재판 과정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국정원)가 유도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으면 오빠도 교화(징역) 간다고 계속 주입했습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이 안 나오면 마지막까지 진술을 받으려 했습니다.” 국정원은 ‘김현희’(대한항공 858기 폭파범)처럼 남한에서 살게 해줄 테니 오빠가 간첩이라 말하라고 끈질기게 설득했다고 한다. 간첩으로 결론 나면 ‘사형당하거나 무기 또는 7년 이상 징역 살게 된다’는 얘기는 해주지 않았다. 유씨 동생은 ‘1년 정도 감옥에서 고생하면 남한에서 오빠와 함께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회유가 안 통하면 폭행이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유씨 동생은 또 재판 과정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대머리 수사관’은 원하는 답변을 제가 안 해주면 저를 일으켜 세우고 머리를 주먹과 물병으로 때렸어요. ‘사실대로 드러나면 넌 죽어. 내가 가만 안 둘 거야’라고 했어요. 제가 오들오들 떨면 발로 다리를 차고 세웠다 앉혔다를 반복시켰습니다. ‘아줌마 수사관’은 제가 입고 있던 수용복(운동복) 뒷덜미를 잡고 ‘너 같은 애는 이런 옷 입을 자격이 없다’면서 옷을 벗겼어요. 옷을 발로 밟고 저를 때리거나 머리를 벽에 찧었어요. 가끔은 카메라가 없는 방으로 데려가 욕을 하며 때렸어요. 조사실이 4층에 있는데 카메라 없는 방도 같은 층에 있어요. 아줌마 수사관은 제가 ‘오빠는 간첩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 ‘아니라는 것을 네가 증명하라’고 요구하기도 했어요.” 신문센터에 들어와 한달여를 버티던 유씨 동생은 끝내 국정원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동생은 이런 증언도 했다. “어느날 밤 10시께였어요. 원래 자는 시간인데 갑자기 조사실로 부르더라고요. 처음 보는 60대 아저씨가 와 있었어요. 60대 아저씨는 새벽이 올 때까지 ‘오빠가 간첩 했지’라면서 유도했어요. 제가 아니라고 하면 원하는 진술이 나올 때까지 때렸어요. 무서웠어요. 다음날 새벽 2시가 넘은 시각 저는 오빠가 간첩이 맞다고 허위로 말해버렸어요.” ‘오빠가 간첩이다’라는 말을 받아낸 뒤에야 60대 조사관은 ‘여기(남한)는 북한과 달리 인권을 중시한다’고 말했다. 유씨 동생은 이날 탈진해 아줌마 수사관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갔다. 거짓 자백을 한 자책감으로 유씨 동생은 화장실 거울을 깨뜨리는 등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지만 폐회로텔레비전(CCTV)으로 감시하던 신문센터 관계자들이 제지했다. 국정원은 진술할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유우성씨가 건네줬다는 탈북자 명단이 담긴 문서는 국정원의 ‘아줌마 수사관’이 유씨 동생에게 칠판에 그려주고 암기시켰다. 수사관 이름은 알 수 없었다. 아귀가 안 맞으면 국정원은 직접 진술 내용에 대해 수정을 지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유씨가 2007년 북한 보위부에 설득당했다’는 애초의 진술에 대해 ‘큰삼촌’으로 불리는 한 국정원 수사관은 ‘2006년으로 쓰라’고 지시했다. 2006년 유씨가 어머니 제사를 위해 북한에 들어갔을 때 보위부에 설득당했다고 추론하는 게 더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유씨 동생은 “‘대머리 수사관’이 흰 종이에 2007, 2008, 2012를 써놓고 ‘이때 이때 이때 오빠가 북한에 들어갔다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고 재판 과정에서 증언했다. 북한에 있었다던 날, 중국에서 찍은 사진 어느날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받던 유씨 동생은 심경에 변화가 와 조사관에게 “내 진술은 모두 거짓”이라고 말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다음날 아줌마 수사관이 ‘왜 진술을 번복하냐. 너 때문에 밥줄 끊긴다’며 저에게 화를 냈어요”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국정원은 재판에서 ‘유씨 동생에 대한 고문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유우성씨 변호인단을 꾸렸다. 김용민 변호사 등은 지난 3월 중국 현지 조사를 진행했다. 국정원의 조사 내용과 검찰의 공소장 내용이 사실과 다른 점을 하나하나 밝혀냈다. 먼저 연길시 유씨 아버지 집에서 지난해 1월22·23일 유씨가 아버지와 찍은 사진이 발견됐다. 검찰 공소장에는 ‘유씨가 23일 북한 회령시에서 보위부 간부와 회합했다’고 돼 있었는데 이치에 맞지 않았다. 또 공소장에는 ‘(2006년 5월 하순부터 6월 초까지) 유씨가 보위부 공작원 교육을 받았다’고 돼 있는데, 이즈음 유씨는 수두에 걸려 베이징시의 ㅇ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변호인단은 유씨의 진료기록을 찾아 재판부에 제출했다. 이외에도 변호인단은 유씨 동생이 오빠에게 건네받은 탈북자 명단 자료(대부분 한글 프로그램 문서)를 열어봤다는 연길시 피시방을 찾았다. 해당 피시방에서는 한글 문서를 열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다는 것도 발견했다. 변호인단은 국정원이 유우성씨를 간첩으로 오해한 게 아니라 간첩으로 조작한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국정원은 압수한 유씨의 노트북에서 그가 지난해 1월23일 북한이 아닌 연길시에서 찍은 앨범 사진을 발견한 뒤 북한에서 찍은 사진이라며 재판부에 제출했기 때문이다. 유씨의 노트북 디지털증거조사 작업에 참여한 김인성 한양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는 “국정원은 ‘인케이스’라는 증거조사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때문에 어떤 사진이 어느 지역에서 찍혔는지 알 수 있다. (유씨가) 중국에서 찍은 사진을 북한에서 찍었다며 증거로 제출한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데 국정원은 왜 하필 서울시 공무원으로 일하던 유우성씨를 간첩으로 지목했을까. 일각에선 ‘박원순 시장 제압 지시’를 받은 국정원 직원들이 박 시장에게 타격을 입힐 거리를 찾기 위해 무리수를 둔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국정원은 이번 ‘화교 남매 간첩 사건’의 주요 증인에 대한 고문·폭행과 사건 조작 의혹을 받고 있지만 사실상 사회의 감시 영역 밖에 있다. 유씨 동생은 자신을 폭행하며 괴롭힌 국정원 수사관의 이름도 모른다. 이들은 재판정에 출석해서도 가명을 썼다. 정청래 민주당 의원은 “국정원이 주요 피의자·참고인 조사를 할 때 반드시 폐회로텔레비전으로 녹화해 증거자료가 남도록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유우성씨는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국가를 상대로 피해보상 소송을 할 계획이 아직 없다. “그냥 더이상 저를 괴롭히지 않고 한국에 잘 정착해 살 수 있게만 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뿐이다. 그러나 검찰은 지난달 26일 항소를 결정했다. 유씨는 주변 지인이 모아준 돈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체류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7월3일 중국으로 추방된 동생처럼, 자신도 언제 추방될지 모른다는 위협까지 느끼고 있다. 글·사진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