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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장준하선생 추모 37주년기념 정용진시인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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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2-08-19 00:39 조회1,9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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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엔젤레스=손세영 민족통신편집위원]18일 오후3시 시내 한인회관 강당에서 오정훈씨 사회로
시작된 장준하추모 제37주년기념행사는 묵념, 활동보고(겨레의 뿌리 노태현회장), 민족시인 정용진선생
강연, 한국의 민족문제연구소 제작 ‘백년전쟁’ 동영상 감상 등으로 진행됐다. 이날 정용진 시인은
장준하선생(1918.8.27~1975.8.17)의 57년 생애를 돌아보며 그는 한국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지도자로서
암살당한 김구선생,여운형선생, 그리고 함석헌선생과 함께 잊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지적하면서 그의
죽음은 박정희군사독재시대에 일어난 의문사라고 하였지만 그 죽음이 타살이 분명하다는 것은 서거한지
37년이 된 오늘에 와서 다시 조명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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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장준하선생 추모 37주년기념 정용진시인 강연




[미주]장준하선생 추모 37주년기념 정용진시인 강연

[로스엔젤레스=손세영 민족통신편집위원]18일 오후3시 시내 한인회관 강당에서 오정훈씨 사회로 시작된 장준하추모 제37주년기념행사는 묵념, 활동보고(겨레의 뿌리 노태현회장), 민족시인 정용진선생 강연, 한국의 민족문제연구소 제작 ‘백년전쟁’ 동영상 감상 등으로 진행됐다.

<##IMAGE##> 이날 정용진 시인은 장준하선생(1918.8.27~1975.8.17)의 57년 생애를 돌아보며 그는 한국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지도자로서 암살당한 김구선생,여운형선생, 그리고 함석헌선생과 함께 잊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지적하면서 그의 죽음은 박정희군사독재시대에 일어난 의문사라고 하였지만 그 죽음이 타살이 분명하다는 것은 서거한지 37년이 된 오늘에 와서 다시 조명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준하선생은 1972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 참가하였다. 1972년 7월 4일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장준하는 "모든 통일은 선(善)"이라며 환영하였다. 그 당시 그의 글에 나타난 ‘민족주의자의 길’은 다음과 같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통일로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민족사의 전진이라면 당연히 모든 가치있는 것들은 그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공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평등, 자유, 번영, 복지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립되는 개념인 동 안은 진정한 실체를 획득할 수 없다. 모든 진리, 모든 도덕, 모든 선이 통일과 대립되는 것 일 때에는 그것이 거짓 명분이지 진실은 아니다.

“한반도 주변 열강, 미•소•일•중의 요구에 따라 남북한이 평화 공존으로 동결되고 그 이상의 통일을 향한 노력을 사실상 포기한다면 민족 분단은 더욱 항구화하고 통일과는 반대쪽으로 치달리게 될 것이다. 민족 통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중이 할 일이다. 통일은 감상적 갈망이기도 하지만 우리들 하루하루의 생활과 직결된 것이다.

그는 이어 “모든 통일은 좋은가.”라고 반문하고, 이에 대해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 명령은 없다”라고 대답한 이 글은 영원히 해내외 동포들의 가슴에 고히 간직하게 되었다.

정용진시인은 “장준하선생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한국의 정치가, 종교인, 언론인, 사회운동가이며 일제강점기에 교육 활동을 하였고 일본군 쓰가다 부대에 입대, 1944년 1월 제65사단 7991부대에 배치됐으나, 그해 7월 짱수 성 쑤저우에서 탈출, 중국 중앙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중국군 중앙군 준위가 되었다. 1945년 쓰촨 성의 한국 광복군을 찾아가 1945년 2월부터 한국 광복군 장교로 복무하였고, 광복군으로 활동하다가 귀국하였다. 1945년 11월 임정 귀국 제1진으로 귀국, 이후 김구의 비서로 있다가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그리고 한국의 지성인들의 월간지로 유명했던《사상계》를 창간하였으며, 1956년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사상계》는 당시 자유당 정권을 신랄하게 규탄하며 4•19 혁명의 단초가 되었으며, 혁명 이후 제2공화국에서 장면내각의 문교부 대학교육심 의회 의원, 국토건설단 기획부장, 국토건설단장 등을 지냈고, 5•16 쿠데타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베트남 전쟁 파병반대운동에 가담했다. 6대 대선에서 윤보선의 지지 유세 중 박정희의 친일파 경력을 문제삼았다가 국가원수 모독죄로 옥고를 치렀고, 이후 신민당과 윤보선과 함께 국민당에서 활동했다. 이어서 1967년부터는 7대 국회의원을 역임한바 있었다. 그 이후 1975년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거사를 준비 도중,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하였다. 당시 유신정권은 실족사로 발표했으나, 2012년 시신을 이장하면서 검시를 통해 뒷머리가 함몰된 살해 흔적이 발견되었다. 박정희 정권에 의한 타살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고있다”고 소개했다.

<##IMAGE##>정용진 시인은 또 장준하선생의 지나 온 발자취에서 고난의 길을 걸어온 역사들을 자세히 설명해주면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개척자로서 후대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소개하고, 고인의 서거에 대한 자신의 조시를 마지막으로 낭독했다.

이날 주최측인 ‘겨레의 뿌리’의 노태현 회장은 ‘LA 사람사는 세상’ 단체 활동과 ‘겨레의 뿌리’를 창립한 역사를 소개하면서 그 동안 2009년 백범 김구선생 서거60주년 추모기고 및 장학금 수여(민족학교), 2010년 함석헌선생 탄생 109주년 기념식, 김구선생 서거 61주년 추모광고, 장준하 선생추모식, 2011년에 함석헌선생, 김구선생, 장준하선생의 추모행사들, 그리고 2012년 3월과 6월 8월에 각각 함석헌선생, 김구선생, 장준하선생의 추모행사들을 통하여 한국민주화운동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활동들을 진행해 왔다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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