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을 총칼로…2차대전보다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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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5-18 22:20 조회3,31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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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목격한 관만 70여개…군 “2명 사살” 발표에 실소
“시민군 미국과 대화 원해…‘희생으로 민주화’ 확인”
“그날 그곳에서 본 장면은 내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지난 13일 뮌헨의 올림픽 경기장앞 아파트에서 만난 게브하르트 힐셔(75) 일간 <쉬드도이체 차이퉁> 전 극동특파원은 “만 30년 전 광주에서 목격했던 장면은 2차대전 막바지인 9살 때 독일의 어느 기차역 앞에서 본 어린이들의 주검들처럼 평생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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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서울의 지인들을 통해 광주에 관한 기사를 쓰던 힐셔 특파원이 광주를 찾은 것은 군의 강제진압 바로 전날인 1980년 5월26일이었다. 힐셔는 25일 부산을 거쳐 화순에서 자전거를 빌려타고 시민군이 장악한 ‘해방된 광주’의 마지막날을 취재했다. 그러나 그날이 마지막날인 줄은 몰랐다.
- 1980년 5월 광주를 가게 된 동기와 취재의 어려움은 없었나?
= 일본 도쿄에서 5월17일부터 계속해서 광주에 대한 기사를 <쉬드도이체 차이퉁>에 송고했다. 당시 도쿄는 서울보다 훨씬 빨리 사실에 가까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도쿄에서 서울의 지인들과 통화를 통해 상황을 파악하고 매일매일 기사를 송고했다.
21일 계엄군이 광주에서 퇴각한 이후 독일 본사와 한국취재를 의논했고, 5월 25일(일요일) 일본에서 부산을 거쳐 화순으로 가서 자전거를 빌려타고, 광주에는 26일 도착했다. 광주에 들어가는 너릿재 길목에서 군인들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다. 독일여권에 직업은 써있지 않기 때문에 신분을 밝히지 않고, 한국말로 “독일사람입니다“고 말했더니, 군인들이 “독일“이란 말을 알아듣고 나를 독일 신부쯤으로 생각해 통과시켜준 것 같다. (힐셔는 선천적으로 오른손이 없다. 뱃속에서 탯줄이 오른손목에 감겨 잘려나간 채 태어났다. “아마 불구 손을 가진 사람이 기자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해서 쉽게 통과시킨 것 같다며 인생에서 불구가 항상 손해는 아니기”라며 호기롭게 웃었다.)
검문 외에는 어려움은 없었다. 광주 가는 길에 일본말을 할 줄 아는 노인 한 분을 만났다. 유감스럽게도 그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기자 신분을 밝히고, 통역을 부탁했다. 그분은 하루종일 통역을 해주시면서 취재를 도와주었다.
- 5월 광주에서 겪은 일 가운데 특별히 기억되는 일은?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광주하면 무엇이 떠오르나? 기억나는 사람들은?
= 도청 앞에는 아마 군인들에게서 빼앗은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군차량이 있었다. 도청주변은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질서정연했고, 조용했다. 도청 안으로 들어갈 때 1차 계엄군 진입시도 때 죽은 신원미확인의 주검을 담은 13개의 나무관이 있었다. 도청 맞은편의 상무관에 는 60개 관이 흰색천이나 태극기에 뒤덮여 있었다.
상무관에서 본 광경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 젊은이가 관 앞에 주저앉아 “여기 내 동생이 죽어 있다. 어떻게 한국 군인이 같은 한국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라고 비통하게 절규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가족 전체가 죽임을 당한 3개의 관(부모와 7살 소년)이 있었다. 가족이 몰살당했기에 울어줄 사람도 없었지만, 누군가가 갖다 놓은 하얀 국화꽃만 조용히 놓여 있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몇명의 여고생들도 한 반 친구의 관 앞에서 목이 메여 울고 있었다. 한 여고생이 “17살의 앳된 우리 친구(박금희)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다“고 절규하며 애국가를 불렀다. 당시 언론들은 광주시민들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도라고 보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내 기사에 시민들이 애국가를 부르며 흐느끼는 장면을 묘사했다. 시민들의 시위와 항거가 북한의 사주나 공산주의 같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질서를 지키려 하고 한국의 민주화를 열망한다는 느낌을 취재 내내 받았기 때문에 나름의 방법으로 기사에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날 그곳에서 본 장면은 내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9살 때 2차대전 막바지를 경험했는데, 그때 독일 한 도시의 기차역에 죽어 널브러져 어린이를 포함한 주검들을 보았을 때 받았던 충격과 함께 광주에서 그 장면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
부상자 취재를 위해 조선대학 병원으로 갔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처음에는 외국인 기자가 취재하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한국인끼리 싸우는 것이 외국에 알려지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광주 실정을 세계에 알리는 일이 이렇게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가는 폭력적 상황을 막는 길이라고 동행했던 통역의 도움을 받아 의사와 간호사를 설득했다. 결국, 한 의사가 취재를 허락해서 중환자들이 있는 병동을 돌아볼 수 있었다. 병원에는 300명 정도의 환자가 있었다. 총이나 총검으로 눈, 가슴, 배 등에 총상과 자상, 타박상을 입은 환자들이었다. 심지어는 신장 밑부분(독일식 표현으로 성기 부분)을 다친 여성환자도 있었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참상이었다.
그 다음으로 시민위원회를 찾아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시민위원회 대변인와 인터뷰를 했다. (힐셔는 학생으로는 보이지 않고, 졸업생 정도로 보인다고 했다. ‘윤상원이 아닌가’라고 묻는 질문에, 확실히 이름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인터뷰 도중 인상적인 점은 두 가지다. 그 때까지 161명(5월 26일 당시)의 죽음을 확인했다며, 이렇게 많은 희생이 있는데 전두환의 신군부가 물러날 때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 대변인은 1달간 버틸 식량은 충분하다며 끝까지 가겠다고 결의를 보였다.
두번째로는 현재 광주가 처한 상황에 대한 설명과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의 모색을 위해 미국과의 대화를 가능한 빠른 시기에 원한다고 한 것이다. 미국과의 대화를 하는 것 외에 광주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해결방법은 없다며 기자인 내가 서울로 가게 되면 이런 시민군의 의사를 미국 대사관 측에 연락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런 시민군의 입장은 내게 놀라웠다. 한편으론 당시 시민군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군들이 어떻게 군인과의 대치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 시민군의 부탁대로 미 대사관과 접촉했나?
= 26일 자정 가까운 시각 광주를 빠져나왔다. 27일 아침 화순의 숙박집에서 라디오방송을 통해 계엄군이 다시 진입했고, 도청에 있던 모든 시민군이 사살되거나 잡혔다는 것을 들었다. 나와 인터뷰를 했던 대변인도 죽은 것이다. 나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부탁받은 대로 미 대사관에 연락을 취하려 생각했지만, 모든 것이 내가 서울에 가기도 전에 끝나 버렸다. 나와 인터뷰를 마친 몇 시간 뒤에 계엄군은 2차 진압에 들어갔고, 어떤 시도도 도움도 될 수 없도록 모든 것은 이미 끝나버린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계엄군 1차 진입 때 161명이 죽었다는 얘기를 광주에서 바로 몇 시간 전에 보고듣고 나왔는데, 그 몇 시간 후 아침(27일) 화순 숙박집에 들은 라디오에선 두명이 죽었다는 공식발표를 들어야 햤다. 새벽 2~5시경 군경이 2차로 진입해 광주 시내를 다시 접수했고, 200명 이상의 학생들이 투항했고 투항을 거부한 2명을 사살했다는 것이다. 당시 라디오 주변에는 많은 동네사람들이 있어서 함께 들었다. 그 중 한 명이 “2명만 사살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이다. 분명히 훨씬 더 많을 것이다“며 비통해 했다.
- 광주항쟁 이후 신군부는 디제이등 재야 인사 20여 명에 대해 북한의 사주를 받아 광주항쟁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해 디제이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디제이와 광주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 김대중의 체포로 인해 학생 시위가 일어났고, 이런 맥락에서 광주 민중항쟁의 여러 계기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광주 민중항쟁은 궁극적으로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이 주동이 된 군부가 정권을 탈취하려는 것에 대한 항거이고, 민주화 실현을 위한 민의의 분출이다. 물론 광주와 김대중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렇다고 김대중 체포만으로 광주민중항쟁의 원인을 찾는 것은 너무 협소한 시각이라 생각한다. 그것보다는 북한 공격시 투입되기로 한 공수부대가 같은 국민인 학생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면서 시민의 분노를 일으켰고 광범위한 참여를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1967년 이후 한국을 40여차례 방문했고, 1971년 대선 때도 취재했다. 김대중이 전라도민의 많은 지지를 받은 이유는 물론 고향인 점도 있지만, 그의 농민정책이 중요한 원인의 하나였던 것 같다. 1971년 이후 한국의 정당 대표는 서울과 경상도에서만 계속 나왔다. 내가 보기에 이중양곡수매제(이중곡가제)를 주장한 김대중은 지방 특히 농촌의 지지를 크게 받았다. 그때까지 어떤 정당지도자도 김대중과 같은 농민정책을 제시하지 않았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농민들이 많았던 전라도 지방에서 김대중은 당연히 환영받는 정치인일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이 당시 나한테는 흥미로워 1971년 대통령선거유세를 취재했다. 그때 김대중씨에 대한 농민층의 열렬한 지지를 직접 확인했다. 디제이와는 이후로도 계속 친분관계가 유지돼, 일본 시절은 물론 동교동 시절도 집을 방문해서 조찬을 함께하기도 했다. 유감스럽게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는 독일에 있어서 문상하지 못했다.
- 당시 광주에 대한 기억과 인상은?
= 26일 내가 본 광주는 아주 조용했고 질서 정연했다. 상점은 셔터를 내렸지만, 상점 앞에 야채나 필수품을 내놓고 팔고 있었다. 자동차는 다니지 않았고 시민들이 길거리에 모여 웅성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경찰서, 전남매일신문, 방송국이 불탄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실대로 언론보도를 하지 않은, 혹은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다. 이에 대해 신군부와 언론에서는 공산주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일으킨 것이며, 광주는 무법자의 도시라고 언론플레이를 했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 30년이 지난 지금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재평가됐고 희생자들은 국립묘역에 안장됐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외신기자로서 80년 광주를 어떻게 평가하나?
= 내가 보는 광주는 일반시민이 민주화실현을 위해 자발적으로 동참하고 민주화의 중요성을 정확히 인식하게 된 역사적 분기점이다. 즉, 일반시민들이 폭력적인 공수부대의 무차별 진압을 경험하면서, 시민들이 더이상 군사정권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많은 대중들의 집단행동과 참여로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광주에서 보았던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고, 한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9살 때 2차대전 참상을 본 이후 처음 본 폭력적으로 잔인한 상황이다. 광주는 이런 점에서 내게 전쟁과 같았다. 단지 같은 동족이 같은 동족을 총칼로 살해했다는 것과, 취재와 인터뷰중 보았던 아주 용감한 시민들이 결국은 죽임을 당했다는 점에서 더 충격적이었다. 광주를 통해 느낀 것은 이런 희생 없이 결코 민주화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역사적 경험이었다. 1987년 대만 민주화시위를 취재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 기사 송고할 때 어려움은 없었나?
= 27일 서울로 올라와서, <로이터 통신>의 친구를 찾아 전화로 독일 신문사에 기사를 송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 호텔 같은 곳에서 전화연결은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그 친구가 다행히 아무것도 묻지 않고 회사규정에 어긋나는 것임에도 전화를 사용하게 해 주었다. 기사는 <쉬드도이체차이퉁> 28일자에 실렸다.
- 기자생활을 은퇴한 이후 근황은?
= 2000년 퇴직한 후, 요코하마의 한 대학에서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강의를 했고,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에서 2005년까지 강제노동과 교과서문제에 대한 심포지엄을 미국, 타이, 일본, 한국의 관계자들과 함께 열었다. 요즘은 우리 가족사에 대한 취재와 글을 쓰고 있다.
- 특파원생활을 시작한 이후 인생의 절반을 일본에서 거주했다. 지난 40년간 한국의 정치 경제적 변화를 지켜본 소감은?
= 한국은 어려운 역사적 시련을 이겨내고 환상적으로 정치·경제적 발전을 이뤘다. 한국의 생활수준은 놀라울 정도로 향상됐고, 시민의식도 성장했다. 다만,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남북이 갈라져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일본인 아내와 함께 일본에서 인생의 절반을 지냈지만, 한국은 내게 많은 친구가 있고 많은 경험을 하게 해준 가슴에 남는 특별한 나라이다.
** 힐셔는 1935년 동프러시아 틸리트 출생으로 1971년 2000년까지 한국, 일본, 대만을 담당하는 <쉬드도이체 차이퉁>의 극동 특파원으로 일본 도쿄에서 근무했다. <쉬드도이체 차이퉁>은 뮌헨에 본사를 둔 독일의 대표적 좌파성향 전국일간지이다. 1967년 처음 한국을 방문한 이래 2007년 한국 정부 초청으로 마지막 방문하기까지 40여차례 한국을 방문했고, <38번 찾은 한국> 등 한국 관련 저서도 출간했다.
뮌헨/글·사진 한귀용 통신원 ariguiyong@hotmail.com
“시민군 미국과 대화 원해…‘희생으로 민주화’ 확인”
“그날 그곳에서 본 장면은 내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지난 13일 뮌헨의 올림픽 경기장앞 아파트에서 만난 게브하르트 힐셔(75) 일간 <쉬드도이체 차이퉁> 전 극동특파원은 “만 30년 전 광주에서 목격했던 장면은 2차대전 막바지인 9살 때 독일의 어느 기차역 앞에서 본 어린이들의 주검들처럼 평생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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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 서울의 지인들을 통해 광주에 관한 기사를 쓰던 힐셔 특파원이 광주를 찾은 것은 군의 강제진압 바로 전날인 1980년 5월26일이었다. 힐셔는 25일 부산을 거쳐 화순에서 자전거를 빌려타고 시민군이 장악한 ‘해방된 광주’의 마지막날을 취재했다. 그러나 그날이 마지막날인 줄은 몰랐다.
- 1980년 5월 광주를 가게 된 동기와 취재의 어려움은 없었나?
= 일본 도쿄에서 5월17일부터 계속해서 광주에 대한 기사를 <쉬드도이체 차이퉁>에 송고했다. 당시 도쿄는 서울보다 훨씬 빨리 사실에 가까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도쿄에서 서울의 지인들과 통화를 통해 상황을 파악하고 매일매일 기사를 송고했다.
21일 계엄군이 광주에서 퇴각한 이후 독일 본사와 한국취재를 의논했고, 5월 25일(일요일) 일본에서 부산을 거쳐 화순으로 가서 자전거를 빌려타고, 광주에는 26일 도착했다. 광주에 들어가는 너릿재 길목에서 군인들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다. 독일여권에 직업은 써있지 않기 때문에 신분을 밝히지 않고, 한국말로 “독일사람입니다“고 말했더니, 군인들이 “독일“이란 말을 알아듣고 나를 독일 신부쯤으로 생각해 통과시켜준 것 같다. (힐셔는 선천적으로 오른손이 없다. 뱃속에서 탯줄이 오른손목에 감겨 잘려나간 채 태어났다. “아마 불구 손을 가진 사람이 기자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해서 쉽게 통과시킨 것 같다며 인생에서 불구가 항상 손해는 아니기”라며 호기롭게 웃었다.)
검문 외에는 어려움은 없었다. 광주 가는 길에 일본말을 할 줄 아는 노인 한 분을 만났다. 유감스럽게도 그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기자 신분을 밝히고, 통역을 부탁했다. 그분은 하루종일 통역을 해주시면서 취재를 도와주었다.
- 5월 광주에서 겪은 일 가운데 특별히 기억되는 일은?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광주하면 무엇이 떠오르나? 기억나는 사람들은?
= 도청 앞에는 아마 군인들에게서 빼앗은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군차량이 있었다. 도청주변은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질서정연했고, 조용했다. 도청 안으로 들어갈 때 1차 계엄군 진입시도 때 죽은 신원미확인의 주검을 담은 13개의 나무관이 있었다. 도청 맞은편의 상무관에 는 60개 관이 흰색천이나 태극기에 뒤덮여 있었다.
상무관에서 본 광경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 젊은이가 관 앞에 주저앉아 “여기 내 동생이 죽어 있다. 어떻게 한국 군인이 같은 한국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라고 비통하게 절규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가족 전체가 죽임을 당한 3개의 관(부모와 7살 소년)이 있었다. 가족이 몰살당했기에 울어줄 사람도 없었지만, 누군가가 갖다 놓은 하얀 국화꽃만 조용히 놓여 있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몇명의 여고생들도 한 반 친구의 관 앞에서 목이 메여 울고 있었다. 한 여고생이 “17살의 앳된 우리 친구(박금희)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다“고 절규하며 애국가를 불렀다. 당시 언론들은 광주시민들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도라고 보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내 기사에 시민들이 애국가를 부르며 흐느끼는 장면을 묘사했다. 시민들의 시위와 항거가 북한의 사주나 공산주의 같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질서를 지키려 하고 한국의 민주화를 열망한다는 느낌을 취재 내내 받았기 때문에 나름의 방법으로 기사에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날 그곳에서 본 장면은 내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9살 때 2차대전 막바지를 경험했는데, 그때 독일 한 도시의 기차역에 죽어 널브러져 어린이를 포함한 주검들을 보았을 때 받았던 충격과 함께 광주에서 그 장면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
부상자 취재를 위해 조선대학 병원으로 갔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처음에는 외국인 기자가 취재하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한국인끼리 싸우는 것이 외국에 알려지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광주 실정을 세계에 알리는 일이 이렇게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가는 폭력적 상황을 막는 길이라고 동행했던 통역의 도움을 받아 의사와 간호사를 설득했다. 결국, 한 의사가 취재를 허락해서 중환자들이 있는 병동을 돌아볼 수 있었다. 병원에는 300명 정도의 환자가 있었다. 총이나 총검으로 눈, 가슴, 배 등에 총상과 자상, 타박상을 입은 환자들이었다. 심지어는 신장 밑부분(독일식 표현으로 성기 부분)을 다친 여성환자도 있었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참상이었다.
그 다음으로 시민위원회를 찾아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시민위원회 대변인와 인터뷰를 했다. (힐셔는 학생으로는 보이지 않고, 졸업생 정도로 보인다고 했다. ‘윤상원이 아닌가’라고 묻는 질문에, 확실히 이름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인터뷰 도중 인상적인 점은 두 가지다. 그 때까지 161명(5월 26일 당시)의 죽음을 확인했다며, 이렇게 많은 희생이 있는데 전두환의 신군부가 물러날 때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 대변인은 1달간 버틸 식량은 충분하다며 끝까지 가겠다고 결의를 보였다.
두번째로는 현재 광주가 처한 상황에 대한 설명과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의 모색을 위해 미국과의 대화를 가능한 빠른 시기에 원한다고 한 것이다. 미국과의 대화를 하는 것 외에 광주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해결방법은 없다며 기자인 내가 서울로 가게 되면 이런 시민군의 의사를 미국 대사관 측에 연락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런 시민군의 입장은 내게 놀라웠다. 한편으론 당시 시민군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군들이 어떻게 군인과의 대치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 시민군의 부탁대로 미 대사관과 접촉했나?
= 26일 자정 가까운 시각 광주를 빠져나왔다. 27일 아침 화순의 숙박집에서 라디오방송을 통해 계엄군이 다시 진입했고, 도청에 있던 모든 시민군이 사살되거나 잡혔다는 것을 들었다. 나와 인터뷰를 했던 대변인도 죽은 것이다. 나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부탁받은 대로 미 대사관에 연락을 취하려 생각했지만, 모든 것이 내가 서울에 가기도 전에 끝나 버렸다. 나와 인터뷰를 마친 몇 시간 뒤에 계엄군은 2차 진압에 들어갔고, 어떤 시도도 도움도 될 수 없도록 모든 것은 이미 끝나버린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계엄군 1차 진입 때 161명이 죽었다는 얘기를 광주에서 바로 몇 시간 전에 보고듣고 나왔는데, 그 몇 시간 후 아침(27일) 화순 숙박집에 들은 라디오에선 두명이 죽었다는 공식발표를 들어야 햤다. 새벽 2~5시경 군경이 2차로 진입해 광주 시내를 다시 접수했고, 200명 이상의 학생들이 투항했고 투항을 거부한 2명을 사살했다는 것이다. 당시 라디오 주변에는 많은 동네사람들이 있어서 함께 들었다. 그 중 한 명이 “2명만 사살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거짓말이다. 분명히 훨씬 더 많을 것이다“며 비통해 했다.
- 광주항쟁 이후 신군부는 디제이등 재야 인사 20여 명에 대해 북한의 사주를 받아 광주항쟁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해 디제이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디제이와 광주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 김대중의 체포로 인해 학생 시위가 일어났고, 이런 맥락에서 광주 민중항쟁의 여러 계기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광주 민중항쟁은 궁극적으로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이 주동이 된 군부가 정권을 탈취하려는 것에 대한 항거이고, 민주화 실현을 위한 민의의 분출이다. 물론 광주와 김대중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렇다고 김대중 체포만으로 광주민중항쟁의 원인을 찾는 것은 너무 협소한 시각이라 생각한다. 그것보다는 북한 공격시 투입되기로 한 공수부대가 같은 국민인 학생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면서 시민의 분노를 일으켰고 광범위한 참여를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1967년 이후 한국을 40여차례 방문했고, 1971년 대선 때도 취재했다. 김대중이 전라도민의 많은 지지를 받은 이유는 물론 고향인 점도 있지만, 그의 농민정책이 중요한 원인의 하나였던 것 같다. 1971년 이후 한국의 정당 대표는 서울과 경상도에서만 계속 나왔다. 내가 보기에 이중양곡수매제(이중곡가제)를 주장한 김대중은 지방 특히 농촌의 지지를 크게 받았다. 그때까지 어떤 정당지도자도 김대중과 같은 농민정책을 제시하지 않았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농민들이 많았던 전라도 지방에서 김대중은 당연히 환영받는 정치인일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이 당시 나한테는 흥미로워 1971년 대통령선거유세를 취재했다. 그때 김대중씨에 대한 농민층의 열렬한 지지를 직접 확인했다. 디제이와는 이후로도 계속 친분관계가 유지돼, 일본 시절은 물론 동교동 시절도 집을 방문해서 조찬을 함께하기도 했다. 유감스럽게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는 독일에 있어서 문상하지 못했다.
- 당시 광주에 대한 기억과 인상은?
= 26일 내가 본 광주는 아주 조용했고 질서 정연했다. 상점은 셔터를 내렸지만, 상점 앞에 야채나 필수품을 내놓고 팔고 있었다. 자동차는 다니지 않았고 시민들이 길거리에 모여 웅성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경찰서, 전남매일신문, 방송국이 불탄 것을 볼 수 있었다. 사실대로 언론보도를 하지 않은, 혹은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표출된 것이다. 이에 대해 신군부와 언론에서는 공산주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일으킨 것이며, 광주는 무법자의 도시라고 언론플레이를 했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 30년이 지난 지금 광주민주화 운동으로 재평가됐고 희생자들은 국립묘역에 안장됐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외신기자로서 80년 광주를 어떻게 평가하나?
= 내가 보는 광주는 일반시민이 민주화실현을 위해 자발적으로 동참하고 민주화의 중요성을 정확히 인식하게 된 역사적 분기점이다. 즉, 일반시민들이 폭력적인 공수부대의 무차별 진압을 경험하면서, 시민들이 더이상 군사정권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많은 대중들의 집단행동과 참여로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광주에서 보았던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고, 한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9살 때 2차대전 참상을 본 이후 처음 본 폭력적으로 잔인한 상황이다. 광주는 이런 점에서 내게 전쟁과 같았다. 단지 같은 동족이 같은 동족을 총칼로 살해했다는 것과, 취재와 인터뷰중 보았던 아주 용감한 시민들이 결국은 죽임을 당했다는 점에서 더 충격적이었다. 광주를 통해 느낀 것은 이런 희생 없이 결코 민주화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역사적 경험이었다. 1987년 대만 민주화시위를 취재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 기사 송고할 때 어려움은 없었나?
= 27일 서울로 올라와서, <로이터 통신>의 친구를 찾아 전화로 독일 신문사에 기사를 송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 호텔 같은 곳에서 전화연결은 믿을 수가 없어서였다. 그 친구가 다행히 아무것도 묻지 않고 회사규정에 어긋나는 것임에도 전화를 사용하게 해 주었다. 기사는 <쉬드도이체차이퉁> 28일자에 실렸다.
- 기자생활을 은퇴한 이후 근황은?
= 2000년 퇴직한 후, 요코하마의 한 대학에서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강의를 했고,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에서 2005년까지 강제노동과 교과서문제에 대한 심포지엄을 미국, 타이, 일본, 한국의 관계자들과 함께 열었다. 요즘은 우리 가족사에 대한 취재와 글을 쓰고 있다.
- 특파원생활을 시작한 이후 인생의 절반을 일본에서 거주했다. 지난 40년간 한국의 정치 경제적 변화를 지켜본 소감은?
= 한국은 어려운 역사적 시련을 이겨내고 환상적으로 정치·경제적 발전을 이뤘다. 한국의 생활수준은 놀라울 정도로 향상됐고, 시민의식도 성장했다. 다만,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남북이 갈라져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일본인 아내와 함께 일본에서 인생의 절반을 지냈지만, 한국은 내게 많은 친구가 있고 많은 경험을 하게 해준 가슴에 남는 특별한 나라이다.
** 힐셔는 1935년 동프러시아 틸리트 출생으로 1971년 2000년까지 한국, 일본, 대만을 담당하는 <쉬드도이체 차이퉁>의 극동 특파원으로 일본 도쿄에서 근무했다. <쉬드도이체 차이퉁>은 뮌헨에 본사를 둔 독일의 대표적 좌파성향 전국일간지이다. 1967년 처음 한국을 방문한 이래 2007년 한국 정부 초청으로 마지막 방문하기까지 40여차례 한국을 방문했고, <38번 찾은 한국> 등 한국 관련 저서도 출간했다.
뮌헨/글·사진 한귀용 통신원 ariguiyo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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