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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 가문, 조선인 1만명 강제징용…추도비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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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1-26 19:56 조회3,6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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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카는 지쿠호 지방의 최대 도시다. 규슈 전체로 따져도 후쿠오카, 기타큐슈, 구루메에 이어 인구가 4번째로 많은 도시다. 아소 가문은 이즈카의 영주라고 할 정도로 영향력이 크다. 시 한복판에 ‘아소이즈카 병원’이 자리잡고 있다. 탄광에서 사고가 났을 때 부상자를 치료할 목적으로 1918년 문을 연 이 병원은 출범 당시 병상 수가 120개였다. 이제는 병상 수 1천116개로 지역 최대의 의료기관으로 성장했다.

광활한 부지 안에 있는 아소 가문의 저택은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소 가문의 당주인 아소 다로는 1979년 중의원에 당선된 이래 10선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총리 재직시절에 길가에서 집 구경을 하며 사진을 찍으면 경찰이 달려와 사유를 묻곤 했다.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는 그런 광경이 사라졌다. 재력과 지역연고를 기반으로 한 아소 다로의 영향력은 이즈카에서 절대적이다. 이즈카시장 선거에 입후보하려는 사람은 우선 그의 승낙부터 받아야 한다고 한다.

» 일제 때 아소시멘트 다가와공장 인근의 석회암 광산에서 채굴작업을 하다 숨진 노동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세운 조혼비(오른쪽)와 신사.

아소 가문이 지역의 터줏대감으로 자리잡은 것은 탄전 개발과 직접 관련이 있다. 가문을 일으킨 원조는 다로의 증조부 아소 다이키치(1857~1933)다. 그는 1872년부터 석탄 채굴을 시작해 80년대 후반에는 아소상점이란 이름으로 탄광을 경영했다. 1899년에는 중의원 의원이 됐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따른 전시경제로 석탄 수요가 급증하자 급속히 사업을 확대했다.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석탄 시멘트 철도 금융 전력 임업 등 다방면에 손을 대 준재벌급 회사로 일으켰다. 1921년에는 석탄광업연합회 회장에 취임해 10여년 장기재직하면서 중앙정계에 대한 발언권도 강화했다. 아소상점은 일제의 식민지였던 조선에도 진출했다. 1927년 충남 안면도에 임업소를 설립하고 적송을 벌채해 탄광의 갱목 등에 사용했다. 30년대에는 홍성의 보성광산 등에도 손을 뻗었다.

다이키치는 크게 커진 사업의 경영을 손자 아소 다카키치(1911-1980)에 넘겼다. 다카키치는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셋째 딸과 결혼해 장인의 정치자금을 주물렀다. 이후 아소 가문의 중심기업은 아소상점→아소광업→아소시멘트→주식회사 아소로 이어졌다. 시멘트 쪽은 분리돼 프랑스 회사와 합작을 해서 아소라파르주시멘트가 됐다. 주식회사 아소의 계열사는 약 60개에 이르며 그룹매출 총액은 2009년도 결산으로 1409억엔이다. 현 사장은 아소 다로의 동생인 아소 유타카다. 다로는 정계에 진출하기 전 아소시멘트의 사장을 지냈다.

아소 그룹의 발전과정은 회사가 펴낸 <아소상점 20년사> <아소백년사>에 기록돼 있다. 하지만 방대한 분량의 사사에 빠진 부분이 있다. 조선인 강제연행에 관한 내용이다. 아소 가문은 조선인들의 피와 땀을 기반으로 일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기록에서 철저히 제외하고 있다. 후쿠오카현 지방직업소개사무소 자료에는 아소상점이 1925년부터 조선인을 사용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사찰 자료에는 이미 1910년대 후반부터 조선인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미쓰비시나 아소는 광산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밀항을 시켰다고 한다.

아소계열 탄광이 강제징용기에 조선인 노동자를 얼마나 썼는지는 44년 7월에 작성된 후쿠호카현 현정(縣政) 중요사항이라는 문서에 나와 있다. 현지사의 업무 인수인계를 위해 작성된 이 문서에는 치안·사상을 담당하는 경찰인 특별고등과가 집계한 ‘이입반도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표’ 가 첨부돼 있다. 이입반도인이란 일본 본토로 끌려온 조선인을 가리킨다. 아소광업은 이입자 7천996명, 도주자 4천919명, 현재인원 2천903명, 사망자 56명으로 기록돼 있다. 일부 연구자는 사망자의 수가 너무 적다며 집계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대기업은 광업소 별로 분리해서 집계를 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아소광업은 합쳐 놓았다. 계열별로 합산하면 강제징용자는 미쓰비시, 메이지, 미쓰이 등 재벌계가 훨씬 많다. 광업회사 규모를 따지면 아소는 미쓰비시 등 재벌에 이어 중상위 정도에 해당한다.

아소광업에 대한 기록 중 가장 큰 특색은 도망자의 비율이 61.5%에 이를 만큼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이다. 그만큼 다른 광업소에 비해 작업환경이 열악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아소는 재벌이 운영하는 광업소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저임금으로 일관했고, 대공황이 일어나고 중국에서 값싼 석탄이 수입되자 조선인부터 대량 해고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터진 유명한 사건이 1932년의 조선인 총파업이다. 파업 당시 일본석탄광부조합이 발행한 <아소 죄악사>에는 조선인 노동자의 상황이 ‘착취 지옥’ 으로 묘사돼 있다. 회사의 하청을 받아 조선인 갱부를 쓰는 조선인 두령(나야 가시라)은 갱부들의 월급 가운데 3할을 떼어 중간착취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가장 위험한 작업장에서 하루 16~17시간의 노동을 했다. 총파업 당시 아소계열 탄광에서 일하는 조선인은 1천명 정도였다. 1939년 후반부터 패전 때까지 아소계열에 강제연행된 조선인은 1만1천명 정도로 추산된다.


» 아소시멘트가 1976년 재일동포 연구자의 요청으로 다가와시 미다테 묘지에 세운 납골당. 아소 그룹이 전후 조선인 희생자를 위해 만든 유일한 시설이지만, 조선인 유골이라는 설명이 어디에도 없다.


아소광업이 다른 재벌급 회사에 비해 특출했던 점은 재빠른 식민지 경찰 활용과 억압적 노무관리였다.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조선인 또는 일본인 순사 출신을 노무관리자로 채용해 조선인 장정을 무자비하게 끌고 왔다. 이 방식은 바로 다른 기업에도 전파됐다. 노동자들의 쟁의가 발생하면 외부에서 재향군인회, 청년단, 친일조선인들의 모임인 협화회까지 이용해 힘으로 눌렀다. 일본 패전 때 가혹한 노동을 견디고 살아남은 조선인들이 귀국할 때도 약간의 여비만 주고 저금 등 미불금은 지급하지 않았다.

납골당비 정식명칭 없고
조선인이란 단어도 없어

그러나 지쿠호 전역에서 아소 그룹이 조선인 희생자를 위해 세운 추도비는 없다. 억지로 비슷한 것이라도 찾으려 하면 다가와시 미다테 묘지로 가야 한다. 이 묘지는 1934년 가동을 시작한 아소시멘트 공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묘지 입구에서 일본인 이름이 쓰인 묘소들을 제법 지나 한쪽 구석에 가면 석비가 보인다. 기이하게도 이 비에는 누구의 묘라는 것이 없다. 비 앞면에는 ‘一佛成道 觀見法界 因業等空 悉皆成佛’라는 한문 16자가 새겨져 있다. 억지로 풀이를 한다면 “한 부처가 도를 이뤄 법계 인업이 공(空)임을 깨달으니 모두 부처가 된다” 는 뜻이 될까? 뒷면에는 비 건립일시가 1976년 8월로 돼 있고, 아소시멘트 다가와 공장과 사찰 주지의 이름이 보인다. 비문을 보고서는 어떤 유래로 세워졌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묘소 주변에도 아무런 설명판이 없다. 비 밑에는 납골당으로 보이는 구조물이 있다.

아소시멘트의 현재 이름은 아소라파르주시멘트다. 몇 년 전 프랑스 라파르주와 합자를 하면서 이름을 바꿨다. 거대한 공장 옆에 산업공원이 있다. 일제 때 회사가 조성한 공원이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평평한 대지가 나온다. 왼쪽에는 신사가 있고 오른쪽에는 큰 석비가 보인다. 조혼(弔魂)비라고 써 있다. 뒷면에는 1935년 8월 산업시멘트철도주식회사의 중역·사원·노무자 일동이 세운 것으로 돼 있다. 산업시멘트는 일제 때 아소시멘트의 이름이다. 시멘트를 수송하기 위한 철도도 갖고 있었다. 비 밑에는 납골당 같은 곳이 있어 전쟁이 끝난 후 열어보니 유골은 없고 405개의 위패만 있었다. 조선인 이름의 위패가 45개였다.

동행한 요코가와 데루오의 설명을 듣고서야 불법을 설파한듯한 미다테 묘지 비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강제연행 문제를 연구해온 재일동포 김광열이 아소 쪽과 줄다리기 교섭을 벌여 세우도록 한 것이다. 미다테 묘지 인근에 관음보살이 있다고 주민들이 믿는 동굴이 있다. 현지인들이 ‘아나간논’ 이라 부르는 곳이다. 동굴 바로 옆에 조그만 목조사당이 있는데 일제 때 숨진 조선인들의 유골과 위패가 있었다. 조혼비와 아나간논에 있던 조선인 유골과 위패를 비 아래 있는 납골당에 모아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비에는 조선인이라는 단어가 없다. 비의 정식명칭조차 없다. 묘지에서 무심코 지나치다 이 비를 본 사람은 시멘트공장에서 작업을 하던 일본인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당한 정도로 이해를 할 것이다. 미다테 묘지에 조선인 징용희생자 관련비가 있다는 말을 듣고 외지에서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런 안내판이 없으니 한창 헤맬 각오를 해야 한다. 이런 현실은 아소 그룹이 불미스런 과거의 역사를 얼마나 감추려 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하지만 어찌 아소 그룹뿐이겠는가? 역대 일본정부와 대기업의 인식도 아소 그룹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다가와/글·사진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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