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석의 정치탐사] 식민지 조선의 어둠 속에 비친 불빛 > 사회, 문화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4년 3월 28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사회, 문화

[한호석의 정치탐사] 식민지 조선의 어둠 속에 비친 불빛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3-02-24 18:05 조회1,332회 댓글0건

본문


한호석의 정치탐사 제39화

식민지 조선의 어둠 속에 비친 불빛

2023년 2월 22일




낙후한 반봉건농업국이었던 식민지 조선에서 자본주의 공업화는 밑바닥을 맴돌았다. 이를테면, 1929년 당시 식민지 조선의 공장은 520개밖에 되지 않았고, 노동자는 36,618명이었다.

그 무렵 세계사회주의운동을 지도하고 있었던 코민테른(Comitern)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서 계급투쟁이 일어나고, 계급투쟁에 의해 낡은 생산양식이 새로운 생산양식으로 교체된다는 맑스주의를 자기의 지도사상으로 신봉하였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사회력사발전(혁명)의 원동력으로 규정한 맑스주의 명제는 코민테른에 의해 불변의 진리로 공인되었다.

맑스주의가 말하는 생산력이라는 개념은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포괄하는데, 생산력의 결정적인 요인은 노동력이다. 그러므로 생산력이 발전하여 생산관계와의 모순이 발생하려면, 노동력이 증대되어야 한다. 노동력의 증대는 프롤레타리아(공장노동자)의 계급적 증대를 의미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성립되어야 계급투쟁이 일어난다는 맑스주의 명제에 감히 의문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성립되어야 계급투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낙후한 반봉건농업국 식민지 조선에서 비현실적인 명제였다. 1930년 당시 식민지 조선의 총인구는 20,438,000명이었는데, 프롤레타리아는 약 36,000명밖에 되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가 차지한 인구비률은 0.18%에 불과했다. 0.18%라는 수치는 식민지 조선에서 계급투쟁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근거로 되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혁명의 원동력으로 보았던 맑스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이 일어날 수 없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 앞에서 낙담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성립되려면, 100년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식민지 조선의 맑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조선혁명은 아득히 먼 미래의 꿈이었다.

혁명의 길을 찾지 못한 식민지 조선의 맑스주의자들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 갈래는 1917년 로씨야 10월혁명의 역사적 경험을 식민지 조선에 교조주의적으로 대입하면서 좌경화되었다. 다른 한 갈래는 불가능해 보이는 조선혁명을 포기하고,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존재하는 일본의 계급투쟁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혁명투쟁에서의 좌경화는 몰락의 서곡이었고, 조선혁명을 포기하고 일본혁명에 투신한 것은 정처 없는 방황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맑스주의자들은 조선혁명의 앞길을 밝혀줄 불빛을 갈망했다. 마침내 만주 길림성 장춘현 카륜에서 환한 불빛이 비쳤다. 만주 각지에서 활동하는 청년 맑스주의자들이 1930년 6월 30일 카륜의 허름한 농가에 모였다. 카륜회의 첫날 다음과 같은 놀라운 보고발언이 있었다.

"조선혁명의 기본임무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는 것과 함께 봉건적 제 관계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있습니다. 조선혁명의 기본임무로부터 출발하여 현 단계에서 조선혁명의 성격은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되는 것입니다."

맑스주의에서 말한 프롤레타리아혁명도 아니고, 레닌주의에서 말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도 아닌 새로운 혁명의 길이었다. 조선혁명의 진로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고 역설한 카륜회의 보고자는 당년 18세의 청년혁명가였다. 청년혁명가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서 혁명이 발생한다는 기존 공식을 뛰어넘어 혁명의 주체에 의해 혁명이 일어난다는 새로운 명제를 제시하였다.

청년혁명가는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 소자산계급, 민족자본가, 종교인들까지 포함한 광범한 반제력량"을 혁명의 새로운 주체라고 정의하였다. 로농동맹을 중시한 코민테른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적대자인 소자산계급과 민족자본가를 청산대상으로 보았지만, 청년혁명가는 소자산계급과 민족자본가까지 포함하는 인민대중을 혁명의 주체로 보았다. 식민지 조선에서 인민대중을 단결시켜 혁명의 주체를 세우면 조선혁명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청년혁명가의 열화 같은 신념이었다.

그 무렵 계급해방혁명의 객관적 조건(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성숙되지 못한 반봉건 식민지에서 노농동맹에 의해 반제투쟁이 일어난다고 보았던 코민테른은 유럽과 미국의 계급투쟁을 세계혁명의 중심으로 인정했고,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반제투쟁은 변방에서 일어나는 민중항쟁 정도로 여겼다. 코민테른에 있어서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은 계급해방혁명의 '방조자'였고, 식민지 인민대중의 반제력량은 유럽과 미국의 계급투쟁을 지원해줄 보조력량이었다.

그러나 93년 전의 카륜회의에서 청년혁명가는 식민지민족해방혁명을 '변방의 혁명'으로 보았던 기존 혁명리론을 뛰어넘어, 반제투쟁에 나선 식민지 인민대중도 계급투쟁에 나선 프롤레타리아와 동일한 혁명의 주체라는 새로운 혁명리론을 제시했다. 혁명의 원동력을 혁명의 객관적 조건(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혁명의 주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청년혁명가가 설파한 새로운 혁명의 진리였다.

그로부터 52년이 지난 1982년 3월 31일 김정일 총비서는 장문의 논문 '주체사상에 대하여(On Juche Idea)'를 발표하였다. 주체사상을 전면적으로 체계화한 그 논문에서 김정일 총비서는 1930년 6월 30일 청년혁명가가 새로운 혁명의 진리를 밝힌 것은 "주체사상의 창시와 주체의 혁명로선의 탄생을 선포한 력사적 사변"이었다고 언명하였다. 새로운 혁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4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