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주의 생활에세이] 승부는 피할 수 없는 것

싸움이 벌어졌으면 언젠가는 결단내려 승부를 결정하고 결산을 해야 한다. 더구나 집요하게 불굴의 의지로 대드는 상대와의 승부를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다.

저자: 이범주. 통일시대연구원 연구위원.

점점 남북 간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다. 사태가 이리 되어가니 새삼스레 무산돼 버린 몇 년 전,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이 생각난다.

요즘 북이 미사일과 핵 역량을 질적, 양적으로 나날이 급격히 늘려가는 장면 보면서 지난 협상을 날려먹은 미국 심정이 착잡할 거라 생각한다.

당시 북은 상징적인 조치로 핵 폭발 시험장을 폐쇄했고 휴전선 부근의 미군 유해를 발굴, 송환하는 인도적 조치를 취했으며 미국에게 약속한 바대로 추가적인 미사일 발사시험을 전면적으로 중지했다. 더불어 그때까지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건설했던 영변 핵시설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반대로 북이 요구한 것은 다만 인민생활 개선에 큰 장애가 되는 두 어 가지 영역에서의 제재해제 뿐이었다. 그런 조건에서 상호 신뢰 아래 비핵화를 향한 각자 취할 조치를 밟아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돌연 ‘북한만의 전면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를 선차적 조건으로 내세우며 북이 제시한 조건을 차 버렸다. 미국은 왜 거부했을까.

북미 간 적대관계가 해소되면 국가보안법이 유명무실해진다. 국가보안법은 같은 민족인 북을 적으로 규정하는 법... 사실 생각해 보면 같은 민족인 남과 북이 원수처럼 증오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왜 그 말도 안 되는 악법이 이 나라에서 왜 이리 오랫동안 기승을 부려온 것일까.

국가보안법은 분단체제의 법률적 표현이다. 그 분단체제의 실제적, 물리적 바탕은 북과 미국(그리고 미국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국내 세력) 사이의 적대관계, 전쟁관계다. 따라서 북미 간에 평화협정 체결되고 국교 수립되어 정상적인 국가관계로 되면 법의 존재 이유인 북미간 대립관계가 소멸되므로 국가보안법은 유명무실로 된다.

그리되면 남북 인민들 사이의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필연적으로 활발해질 것이니 그간 폐쇄되었던 개성공단도 열리고 금강산 관광사업도 재개될 것은 물론 각 영역에서 남분 간의 공동번영을 향한 노력이 급속히 활성화되었을 것이다. 이리 되면 남북 인민들 사이의 적대감, 이질감이 급속히 와해되며 실제적 통일을 향한 아래로부터의 요구가 뜨겁게 올라왔을 터이다.

미국과 국내의 반통일 세력이 우려한 게 바로 이거 아니었을까.

자신감으로 충만하면 섞이는 걸 꺼리지 않는다. 오히려 섞이기를 기대한다.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줄 수 기회를 제대로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없으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섞이기를 거부하고 안전하게 멀리 떨어진 조건에서 제 영향 하의 인민들에게 거짓된 정보를 유포하고 욕설을 해대며 상대방을 악마화 한다. 이질적인 존재의 섞임은 승부다. 숨길 게 많고 두려움이 많은 자는 섞이려 하지 않는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지난 번 북에서 제안한 협상조건은 극히 유리한 거였다. 그런데도 그걸 거부한 이유는...적대관계가 청산된 조건에서 합법적으로 남북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나고 섞이면서...그간 70여 년 동안 남쪽에서 숨겨 온 역사, 숨기고 싶은 비밀들이 필연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을 미국과 국내의 반통일 세력이 꺼려서가 아니었을까...이로 인한 분단체제의 균열을 미국이 두려워한 때문이 아니었을까...하는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지금의 변화된 조건에서 비핵화 협상 당시만 해도 유효했던 몇 가지의 제재해제 제안으로 북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천만에.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이 산업생산, 자원, 원료, 에너지 대국인 러시아와 중국을 적대관계로 몰아 북중러를 같은 편으로 묶어버린 지금의 조건에서 어쩌면 역으로 제재를 당하고 있는 것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일지도 모른다. 북에 대한 전면적인 제재해제 정도의 제안도 이젠 코웃음 꺼리로 되어 버렸을 수 있다. 전엔 손목 하나만 내줘도 됐는데 이젠 몸통을 내줘야 할 판이다.

개인사에서 지난 날의 결정을 후회하며 '그때 이렇게 했었더라면...' 하는 가정적(假定的) 상상을 종종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만약 사람이 그 동일한 조건, 동일한 상황에 다시 놓여지게 된다면 그는 거의 틀림없이 동일한 선택을 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지금 보기에 과거의 선택이 황당하게 느껴질지라도 당시로서는 그게 아마도 가장 합리적이고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 사이의 일도 비슷하지 않을까. 당시로서는 미국도 그들이 최선의 수라고 생각했던 것을 고민 끝에 두었을 것이다. 이리 생각하면 지금까지의 북미 사이에 있어 온 숱한 우여곡절들도 크게 보아 아직 때가 아니었던 탓이라고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한쪽은 아직 충분히 강하지 않았고 한쪽에겐 아직 힘이 남아 있어서 그랬던 것이니 과거를 자꾸 부르며 안타까와하고 분노할 일이 아니다. 상황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던 것이다.

싸움이 벌어졌으면 언젠가는 결단내려 승부를 결정하고 결산을 해야 한다. 더구나 집요하게 불굴의 의지로 대드는 상대와의 승부를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다. 이런 절박한 승부판에서 회피, 무시, 부정, 도피, 도망...등으로 승부를 유예하면 결국 깨지는 건 체면이요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건 미루고 미뤄온 데 대한 비용이다. 빨리 결단하고 승부에 쫑을 내는 게 상책이다. 여차하면, 그간 당신들이 저질러 온 무수한 행악으로 인해, 원한가진 나라들한테 집단 다구리 당하는 수가 있다.

이건 속절없이 밀리는 처지의 미국에게 하는 말이다.

출처 : 통일시대(http://www.tongil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