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56. 우리 대렬보전을 위한 투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 사회, 문화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4년 10월 11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사회, 문화

[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56. 우리 대렬보전을 위한 투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2-04-11 08:58 조회1,051회 댓글0건

본문



지난 글에서 글쓴이는 "감옥은 단순한 휴식공간이 아니라 혁명 전선에 재진출하기 위한 준비의 기간이다.이 준비기간을 4편으로 나누어 기술하려고 한다. 첫째 생활권 옹호를 위한투쟁, 둘째 대열보전을 위한투쟁. 셋째 사상적 단결을 위한 투쟁, 넷째. 비전향 사수를 위한 투쟁으로 나누어 기술하려고 한다" 라고 하였는데 이번 글은 둘째, 대열보전을 위한 투쟁에 관한 글이다. 편집자 주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 한다 56

우리 대렬보전을 위한 투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둘째, 우리 대렬 보전을 위한 투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감옥안 특별사에서 죽느냐 사느냐하는 투쟁 (비전향 여부) 속에서 우리 동지들은 독방에 있는 동지, 혼거하는 동지들이 있다.

생활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적들이 생각한 동지는 독방에 두고 혼거하는 동지들 중에 투쟁에서 선발주자 역할을 하는 동지들도 독방에 넣는다. 그들의 맘대로 혼거했다가 독거도 하고 전방도 한다. 대전에는 특사가 5개 사가 있기 때문에 4사(76개방)가 전부 독거 방이며 그 후에 지은 7사(27개방)가 독거 방이다.

옆방 동지들과 통방교류는 사방 담당 간수나 사방뒤 순찰 담당 간수에게 잘 들킨다.

발각되면 통방한 두 방은 요절난다. 내용도 다 알아 버리니 불러나가 고문당하고 먹방에 들어가 1개월 내지 2개월 징벌 받는다. 그래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모로스 부호로 통방하였는데 아주 어려움이 많았다. 1961년 5.16 박정희 구테타 후 8월에 전국감옥 비전향장기수들이 대전으로 집결한 후부터는 대구 감옥에서 동지들이 통신타자를 새로 발견하여 쓰고 있는 국문 모음 자음을 이용한 타자가 보급되어 전 사방이 벽을 사이에 두고 있기 때문에 쉬운 타자로 소통하고 대렬결속을 가져오는데 중요 무기가 되었다.

그런데 처음 쳐서 전하는 말과 맨 내중에 받는 말이 달라지는 수가 많다. 그 이유는 잘 못듣고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방할 때 혼거하는 방은 한사람은 앞시찰구에 레타(유리조각을 구해서 이를 레타라고 함)를 대고 사방 간수나 소제들을 감시하고 또 한사람은 뒤 창틀에 올라가 감방 뒤를 순찰하는 간수들을 감시 하는 대원칙을 세워놓고 고도의 경각성을 제고 하여 소통을 강화하는 것이 바로 대렬 보존 투쟁이다.

그 내용은 바깥 소식이나 생활건 옹호에 관한 것이며 중요한 것은 학습자료를 받는 것이다.

생활에서 자주 간수와 말을 나누면서 소식을 들으면 자기 감방만 소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 대렬에게 타자를 통해 알려주는 것이다. 항상 내용은 조직적이고 형식은 산만적이어야 하는 원칙을 확립하고 생활 한다고 하는 것이다.

7사 독거 방인데 혼거하는 방도 있다. 각방에 스피카를 맨구석 천정위에 설치해 놓고 전향시키기 위해서 미리 녹음해 두었다 가냘픈 아가씨의 목소리로 선생들의 아내가 남편에게, 딸이 아빠에게 하소연하는 목소리로 방송하는데 이를 듣고 전향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낮 12시면 KBS 방송국에서 나오는 뉴스를 귀를 스피카에 들이대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감방 안에서 앞뒤 보초 보는 사람과 듣는 사람을 분간하여 배치한다. 그래도 들키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들은 소식은 정리하여 8사의 창틀에 올라 손가락으로 글을 써서 전달한다. 듣는 것과 다른 사에 전달하는 것은 내가 전부 책임을 지고 한다. 적들은 나중에 7사 각방 스피카를 전부 뜯어갔다.

이때 용케 한 방이 뜯어 감추었다. 그래서 대남공작원 통신사였던 허성철 동지가 잘 이용하여 소제에게 구매물을 사주고 철사를 얻어 그걸로 방안 천정에 있는 전구와 쁘라스 마이나스 연결해서 방안의 똥통에 연결해 박고 스피카에 연결해 밤에는 똥통에 쪼그리고 앉아서 밤새 듣는다.

들은 소식을 정리해서 7사와 8사에 전한다. 허성철 동지는 대전 테러 때 전향해서 대전에서 결혼도 하고 살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다.

그후 변치수동지가 나와 한방에 있으면서 그 전통을 이어받아 73년 9월 14일 광주감옥으로 20명이 이감 갈 때까지 들었다.

나중에는 천정 전구에 연결해서 변소간 벽을 홈을 파서 그안에 전선줄을 넣고 하얀 회를 발라 위장하여 똥통에서 밤새 들었다. 그때 들은 뉴스가운데 7.4공동성명을 직접 듣고 전파했다. 그때 동지들은 모두가 수고한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그런데 스피카 통을 감추는 것이 큰 문제었다. 매일 검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개속에 감추었다. 광주와서 들은 소식에 의하면 내방에 잡범이 있었는데 전구불이 나가서 갈아 줄려고 보니 선이 연결되어 있어 들통이 났다고 하며 그방에 있던 잡범은 몽땅 두들겨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웃었다.

1962년도에 박정희 팟쇼 정권은 비전향자들을 소위 재건체조라 하여 운동시간은 들고 나가는 시간이 15분인데 우리동지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운동시간에 재건체조를 시키고 있었다. 내가 2방에 있는데 전부반대하지 않고 시키는대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반대하여 담당 간수와 싸우는데 당시 사방부장의 이름은 이응하였다. 운동장 간수의 보고에 의하여 4사 먹방에 집어 넣었다.

이유는 다른 방은 아무 말 없이 하는데 나만 반대하고 선전 선동한다고 두들겨 패고 뒷수정을 채워서 먹방에 집어넣어서 점심시간 배식을 하는데 뒷 수정을 풀어서 밥을 먹으라고 하는 틈을 타서 먹방 뒤창문을 깨뜨려서 손목과 배를 자르는데 마침 간수에게 들켜서 자살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부터 15일간 먹방에서 죽을 고생을 했다. 내가 들어감으로 인하여 재건체조는 시키지 않았다.

1964년 3월 9일을 3.9투쟁이라고 우리 동지들은 부르고 있는데 발단은 당시 목욕시간은 10여분이다.

한번 물을 덥히면 돼지 털을 벗길 정도로 뜨겁게 하여 수건을 적실 수 없을 정도였다. 뜨겁게 하여 76개 감방을 다 시킨다

그래서 목욕날 싸움이 없지 않은 때가 없다. 당시 박병일 동지는 빨찌산 출신도 아닌데 충남 공주감옥에 살다가 대전으로 이감 온지 얼마되지 않았다. 그때 목욕시간이 짧다고 담당간수와 입절음이 있었는데 간수가 넘어졌다. 소제와 목욕탕에 들어가는 문을 사이에 두고 입절음이 있었는데 복도가 물에 젖은 곳에서 시비하다 소제가 넘어저 목욕탕문의 유리가 파손되었다.

이 파손 책임을, 그리고 간수가 넘어진 것을 문제 삼아 보고하여 두드려 패고 먹방에 수정을 채워서 집어넣었다. 그리고 박동지 통장을 통해 창문유리를 강제로 변상 시켰다.

이 억울한 처사에 대한 불만이 창문유리를 부셔 박동지의 자살로 이어젔다. 청소가 나중에 먹방에 들어가 보니 철장에 목매달은 상황을 보고 당황하여 소리를 질러 우리 동지들이 알게 되었다.

자살 일자는 3/8일인데 3/9일 아침에 내방에서 3방 거리에 있는 당시 60대 동지가 (이름미상) 시찰구에 대고 전체 단식투쟁을 선포하여 아침부터 4사 전체가 단식에 들어가며 죽이지 말라고 각방이 고함을 질렀다.

이에 당황한 윤병희 소장은 겁에 질려 사방 중앙과 고망대에서 4사를 향해 총을 갈겨대었다.

이는 감옥사상 처음 있는 총포였다. 이후 3일이 되니 한방씩 불러내 두들겨 패면서 복식하라고 했던 것이다.

윤병희 소장은 별명 돼지 빠꾸샤라고 하였는데, 전쟁 때 전주 감옥 서무과장을 하며 1800명의 우리 동지들을 명단을 불러주었다고 반공강연을 위해 강당에 모이게 해놓고 자랑스럽게 말을 뇌까리는 것도 들었다.

감옥 역사상 4사 전체가 단식 투쟁을 하는 것도, 놈들이 총탄을 퍼부은 것도 처음이었다.

1975년 7/15일에 나를 전향시키기 위해서 서울에 살고 있는 형님과 누이동생 부부를 모 식당에서 밥을 먹게 하였다. 전향하라고 형님이 말하기에 전향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내 말 끝에 형님은 그러다 네가 죽어도 난 모른다고 하기에 “내가 나오지 못하고 감옥에서 죽거든 내 무덤에 공산주의자 김영승묘” 라고 팻대기 하나 새워달라고 말하니 당시 교화사는 유종음이었는데 성을 내며 이젠 그만 가자고 해서 다시 대전사사로 들어 온 적이 있다.

이렇게 단호하게 대응해야 찝적거리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전체동지들에게 사실대로 알리었다 .그래야 다음 동지들도 그 영향을 받아 전향을 안하는 것이 우리 비전향 대열을 공고화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2022년 4/10일 필자 씀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4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