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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51. 남원포로수용소에 감금돼 옥중투쟁의 첫발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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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9-04 09:45 조회2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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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51

남원 포로수용소에 감금돼 옥중투쟁의 첫발을 내딛었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1954년 2월 20일 광양백운산에서 전투 중 중상 생포된 필자는 적 대대본부 토굴에서 하루밤을 지새우고 21일 오전에 옥용골 마지막 마을 어떤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엔 중상환자 동무들 7-8명이 한 방에 있었다. 조금 후 스리쿼터에 실려 광양읍 연대본부 의무실에 들어갔다.

치료를 받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도당부위원장이었던 염형기 동지의 머리와 전남부대 정치위원이었던 양순기 동지 머리를 잘라 국방색담요로 싸서 가지고 와 한번 보라고 한다.

보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정보과 놈들은 이미 생포자들을 통해 세세한 정보를 수집해 어떤 것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도 있었다. 필자에 대한 정보를 잘 알고 있었다.

놈들은 내가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것과 투쟁 또한 용감하게 잘 싸웠다는 것도 알고서 접근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모른다고 거절했다. 중상환자이기 때문에 더 이상 추궁하지도 않았다.

들리는 말로 어느 골짝에 어느 부대를 전멸했다는 소식만 들리고 있었다.

2일쯤 있다가 남원 읍 5사단본부 의무실로 이송되었다. 여기서 읍 이동외과 병원으로 보내 치료할 사람과 포로수용소로 보내 치료할 사람을 가린다. 그래서 경상환자는 수용소로 보내고 중상환자는 외과병원으로 보내어 진다.

필자는 중상환자이기 때문에 외과병원으로 보내져 치료를 받았다. 가보니 큰 병동인데 한쪽은 우리 동무들이 차지하고 다른 한쪽은 육군 부상병들이었다.

그런데 우리 동무들이 20여명 되는데 두 발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여성동무들도 5-6명되었다.

놈들은 이미 죽어 갈 사람이라 여기고 치료도 제대로 해 주지 않는다. 매일 밤낮 신음소리만 병동을 울릴 뿐이다. 결론해서 살아서 수용소로 돌아온 동무는 나하고 일주만에 퇴원한 김석우씨 밖에 없는 것 같다.

비트에서 중상을 입고 생포된 리영원동무는 과거 동창생과 극적인 상봉을 하게 되어 살아났다.

그 동창생은 외과병원장인 소령이었다. 서로 노선이 달라 각기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여기서 극적인 상봉을 한 기쁨은 말할 수 없다. 자네만큼은 친구우정을 생각해서 꼭 살려내겠다고 하는 말을 내가 옆 침상에 있었기 때문에 듣고 있었다. 그리하여 성의를 다하여 치료해 주는 것을 보았다.

전남부대 참모장인 최복삼 동지는 배꼽을 관통해 등 뒤로 나갔는데 신경이 마비되어 하체에 피가 통하지 않아 발끝에서부터 썩어 들어와 양다리가 다 썩어서 결국 희생되고 마는 참상을 겪기도 했다.

최복삼 동지는 나의 퇴원 며칠 전에 영승동무는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나가 내가 이렇게 죽어갔다는 소식을 알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마지막을 생을 마감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눈만 감으면 선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김석우 도당 선전부부장은 배꼽을 뚫고 나갔으나 총탄이 창자사이만 뚫고 나갔기 때문에 입원한 지 일주만에 수용소로 들어갔다. 기사회생이란 말까지 나왔다.

필자는 3월 22일에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으나 걸어 다닐 수는 있어 퇴원하여 수용소로 이송돼 4월 28일 까지 감금되었다.

제1천막에 감금 되었다. 천막은 4동이 있는데 여자들은 1동을 차지하였다. 계엄하에서 지하나 산에서 체포된 사람은 남원수용소에 감금시켰다.

아는 바와 같이 1953년 7/27일 정전이 이루워지면 일선 정기군대가 후방 빨찌산 토벌에 동원 될 것을 예상해 지하로 내려갈 동무들과 남아 무장투쟁을 전개할 동무들을 대별해 지하로 내려갈 동무들은 속속 내려 보내고 있었다. 다른 도당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중경상 입은 환자동무들이 큰 문제였다. 환자동무들도 마찬가지지만 내려가지 않고 여기 남아 동무들과 함께 싸우다 죽겠다고 내려갈 것을 거부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나온 방책이 여기남아 있으면 다 죽으니 내려가서 자수를 하더라도 마음만은 변치 않고 있으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며 자수를 권고하며 내려가라고 하기도 했는데 구체적으로 몇사람이나 되었는지는 내가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기에 모른다. 단 이런 방책까지도 썼다는 것이다.


필자는 수용소에 들어간 지 10여일 만에 특무대에 불려나가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미 들어오기 전부터 조사가 시작되고 군법재판이 시작되고 있었다.

제 1차 조사 때는 나는 어린 소년으로 입산해서 총 한발도 쏘아 본적 없이 간부들 심부름만 했다고 진술해 그대로 조사서류를 꾸미면서 하는 말이 “내가 너를 동정해서 나가도록 할 것이니 학교공부나 잘하라”고 했었다.

그런데 일주일 후 다시 불려 나갔다. 나가기 전에 김원섭이란자가 밀고해 다 들통이 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15년형을 받고 전주감옥으로 이송준비하고 있다던 우리 전남부대 1중대장이 사형을 받고, 10년을 받은 김재복동무가 무기형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3중대원 윤석두 동지도 사형을 받았다.

그런데 변절한 김원섭은 보성출신으로 무등산부대 부대장을 하면서 용사칭호를 두 번이나 받은 자로서 선우위원장동지가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1953년 가을에 백운산으로 이동시켜 전남부대 부중대장의 직책을 가지고 투쟁하다 1954년 2/20일 옥용골에서 생포되었다.

체포된 후 자기 전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살려고 1953년 10월부터 2/20일 까지 전남부대 전투상황을 특무대에 밀고함으로 빚어진 결과였다.

대내변절자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결국 그로 인하여 2명 총살집행, 1명 무기, 1명 15년형을 받는 등의 큰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2차 조서를 받을 때 “나는 소년을 동정해서 내보내려고 했는데 어마어마한 범죄를 솔직히 진술했으면 동정을 받았을 터인데 자기를 속였으니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살아나가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후 4/28일 남원읍에 설치된 군법재판이 열렸는데 20여명이 한번에 받기도 했다.

처음에는 검찰의 논고가 첫 조서받은 것만 논고하기에 엄포만 놓고 기소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철부지한 생각도 했었다.

관선변호인의 변론이 끝난 다음에 검찰은 “이외에도 어마어마한 범죄사실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진술하지 않았다" 하면서 적의 살상을 논고해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한다”고 했다.

이후 몇 분간 휴정을 한 후 선고에서 일이차로 간격을 두고 마지막에 “심중성을 고려하여 서면통지함”이란 말을 남기고 폐장했다.

선고가 끝나자마다 현병들은 달라붙어 수정을 채우고 사형언도를 받은 동지들만 수용소로 보내지 않고 남원경찰서 유치장에 감금시켰다.

그래서 경남도당위원장 조병화동지와 한방에 있게 되었다.

유명한 남태준 동지는 옆방에 있었다. 수용자들 중 같이 두어서서는 안되겠다고 여긴 사람들은 남원유치장에 분리 감금시켰던 것이다.

그후 5/10일에 제1차로 10명의 사형수 동지들과 대구 미결감에 감금시켰다. 이 때 사단본부 헌병대 중대장이 찾아와 “그렇게 악질인지는 몰랐다" 하면서 "앞으로 서류재심이 있으니 실망하지 말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

그후 2차로 받은 남은 사형수동지들을 한 사동에 감금시켰다. 이 때 조병화, 남태준, 박계현, 권영용, 윤석두, 이영호등 동지들이 모두 20여명 가까이 되었다.

이들 동지들 중 10여명이 9/10일에 무기 또는 15년으로 감형을 받아 감옥에서 비전향여부를 가리는 투쟁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사실 감방에서 불려나가 복도에 서서보니 동지들 10여명이 눈을 둥그레 뜨고 서로 바라보고 눈인사만 하고는 중앙으로 불려나갔다. 관구부장이 대뜸 하는 말이 여러분은 이제 살았다고 하는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머지 확정되지 않은 동지들은 1954년 12/24일에 현병들에 의해서 수색 사형장에서 총살당하는 치욕의 역사적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또한 남조선 발찌산투쟁의 종막을 고하는 아픈 기록을 동시에 남기게 되었다.


참고@@ 남원수용소는 처음에는 “공비수용소”라고 했다가 내중에는 “갱생 포로수용소”라고 했다.

남원 뒤산을 깎아 만들었는데 마치 똥섬과 같아 주위는 골작으로 논과 밭이 있고 마을들이 들어서 있다 여기서 내려다보면 남원읍을 관통해 흐르는 냇물과 모래사장이 보이기도 한 위치에 수용소가 들어서 있었다.

당시는 유일하게 남원수용소밖에 없었다. 수용내부 상황을 말한다면 천막마다 그들이 임명한 소대장(대내에서 제일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이 있어 통솔케 하고 있었다.

취사장이 따로 있어 취사장 출역을 서로 할려고 기를 쓰는 웃지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군목은 매일 천막마다 돌아다니며 기독교를 믿으라 설교하면서 눈을 감으라 하고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매일 낭송을 하기도 했다.

종말에 와서는 모두 눈을 감으라하고서 예수를 믿을 사람 손들어보라고 하였는데 우리 천막에서 다 손을 들고 나만 손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손을 든 사람들은 진정 믿어서가 아니라 믿겠다고 손을 들면 조금이라고 살아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해서 였었다.

그리고 소대장, 면당위원장 이상의 직책을 가진 사람들은 놈들이 호명하여 남원방송국에 강제로 불려나가 반공성명을 하게 하기도 했었다.

또 경남 총사령부 정치위원을 했던 이봉갑은 체포된 후 적들에게 이용당하는 중에 수용소에서 사단 헌병 중대장과 함께 매 천막을 돌아다니며 인사시키고 참으로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헌병대위 놈은 말하기도 했다. 그후 이봉갑은 다시 감옥에 들어오기도 했으며 정신이상이 되어 살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변절자의 말로는 비참함을 실증시켰다.

......................


일단 이것으로 빨찌산 편은 끝내려고 합니다.

감옥편과 사회편은 다음에 서술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빨찌산편을 종결하면서 독자들의 많은 비평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다음에 더 수정보충도 할 것을 알려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1. 9월 2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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