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50 지리산 빨찌산 투쟁의 역사성과 그 의미를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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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8-24 22:15 조회1,09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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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50
지리산 빨찌산 투쟁의 역사성과 그 의미를 되새겨본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지리산은 소백산 줄기타고 뻗어 내린 유서 깊은 산이다. 아름답다기보다 웅대한 산이다. 겹산이 아니라 홑 산이다. 임진 조국전쟁 때나 갑오농민전쟁, 일제 때 항일투쟁, 위대한 조국해방전쟁 때 이 땅을 침략한 외세를 몰아내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가열차게 투쟁했던 피어린 산이다.
지리산은 능선마다 골짝마다, 돌부리 풀뿌리마다 피가 어리지 않는 곳이 없다 특히 조국해방전쟁 때 흘린 피는 지리산을 붉은 산으로 물들게 했다.
10여년 전만해도 등산할 때 해골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흙 한 줌으로 변하여간 열사동지들의 입김과 손길 그리고 피어린 흔적들이 지금도 생생한 산 역사의 증인으로 우리의 심장을 고동치게 하고 있다.
지금은 등산로가 만들어져 등산객들이 붐비고 있다.
그 많은 등산객들이 산이 크고 웅대한 산을 힘들게 등산한 만큼 보람과 쾌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리산에 얽히고설킨 한 많은 역사를 얼마나 음미해보고 등산하는지 모를 일이다.
필자는 약 1년간 지리산에서 빨찌산 투쟁을 전개한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전남 빨찌산 투쟁지역을 중심으로 각 골짝 능선마다 얽힌 피어린 사연들을 기억 나는 대로 윤곽만이라도 기술하고자 한다.
<노고단을 중심으로>
노고단 등산길은 구례군 산동면에 속한 성삼재에서 시작된다.
노고단 산장을 거쳐 능선에 올라 대소골과 피아골을 가로 지른 능선을 따라 돼지령, 피아골 삼거리, 임걸령 약수터, 노루목, 삼도봉, 화개재, 꽃대봉, 백소령, 세석평전, 장터목을 거쳐 상봉(천왕봉)에 이른다.
지금은 천운사골의 관광로가 성삼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전쟁 때는 화엄사골에서 노고단으로 오르는 하나의 길밖에 없었다.
지금 노고단 산장(대피소)터는 미국선교사들의 통신대(간첩단)가 있었다. 집들은 빼치카 벽돌집으로 한 마을을 이룰 정도였다. 수목은 사철나무로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고, 맑은 물은 성삼 재를 통해 대소골로 흘러가고 있었다. 통일되면 휴양소로 이용하면 좋겠다고 입을 모으기도 했다.
노고단에서 흐르는 물을 성삼 재에서 막아 땜을 만들고 화엄사 골로 흘러 보내 수력발전소를 건설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는 화엄사골 쪽은 경사가 급해 물의 낙차를 이용해 수력발전소 터빈을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적들은 빨찌산 거점으로 이용하고 있다하여 수 십차에 걸쳐 폭격과 방화로 파괴되어 골조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으나 소위 박정희 정권 때 근대화 개발 붐을 타고 교회당으로 사용했던 벽 골조만 남겨놓고 지금의 산장(대피소)으로 만들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적들은 사철나무를 모두 벌목해 민등성이를 만들었다. 수려한 옛 모습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이는 미제에 의한 전쟁이 낳은 상처의 하나이다.
노고단 상봉은 군사기지가 있어 출입 금지다. 노고단에 올라서면 남해 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펼쳐지는 전경은 말로다 표현할 수 없었다. 멀리 화순 무등산까지도 볼 수 있었다. 언제 올라 아름다운 전경을 감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조국의 자주적 통일만이 지름길이다. * 지금은 오전10시에서 오후3시 사이에만 개방하고 있다.*
노고단 능선에서는 1951년 여름 적들의 공세 때 지리산 부대원 4명이 203부대 1개 대대를 4시간 동안 방어한 영웅적인 기록도 남겼다.
무장대원 동지들의 희생적인 투쟁으로 부대가 대소골에서 문수골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화엄사골에는 일제 때부터 여선교사들이 화엄사골에서 도보로 노고단까지 오르는데 힘들어 산동면에 사는 지게꾼 농민이 지게에 짊어지고 오르곤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화엄사골 중턱을 오르다가 겁탈을 하고 도주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 혼자 아닌 둘 이상이 동행했다는 웃지 못할 사연도 있었다. 그 때 지게꾼 농민은 입산해서 투쟁 속에 희생되었다. (그때 지개군 농민의 이야기를 듣고 모두 폭소하기도 했다.)
적들은 화엄사 사찰 본관만 남겨놓고 지리산 각 골짝의 사찰은 전부 소각 했다. 이유는 빨찌산 거점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본관을 남겨놓은 것은 소위 토벌대 사단장이 불교 신자였다고 한다.
문수골은 구례군 토지면에 속한다. 노고단에서 왕시루봉까지 뻗어 내린 능선은 문수골과 피아골을 가로 지르고 있다.
문수골에는 1952년도에 지리산 전투 지구당부, 구례군당부, 지리산 부대가 주둔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9.28후퇴 후 51년도 동기 공세까지는 전남 도당학교 분교가 있었다. 이곳을 답사하려고 하였으나 2005년 12월부터 휴식년으로 입산 금지 구역으로 되었다.
근년에 몇 차례 답사 했으나 지구당과 구례군당 아지트 흔적을 찾지 못하고 도당분교 아지트만 확인했다. 문수골의 당부 아지트는 반세기가 흘러서 위치만 추정할 뿐이다.
문수골에 들어가면 중대마을 뒷산 대밭 뒤에 천연 동굴이 있다. 이 동굴은 전쟁 전 여수순천 14연대 군인 봉기 때 입산해 지리산 문수골에 주둔했던 고 김지회 부대장이 얼마동안 썼던 동굴이라고 했다
이 동굴은 들어가는 입구와 안에서 뒤로 나가는 출구도 있다. 그리고 김지회 동지가 거처했던 집도 있다...
전쟁 때 소각되었던 것을 다시 세워 황덕순 할머니가 살고 있다. 집 주인이었던 덕순여사 시아버지는 그 당시 아지트를 제공하고 협조했다 하여 49년 가을에 소위 토벌군에 의하여 동네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다른 일명과 함께 단도로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했다 (현 과거사 진실위에 제기하여 진실결정 통고를 받았다).
중대마을 건너편에 현 산상학교 자리는 14연대 봉기군이 지리산에 입성할 때 주둔한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산상학교 위 골짝에 6.25 전쟁 전 빨치산들이 사용했던 동굴도 있다 한다.
수년 전에 이 동굴에서 3-4명의 유골과 유품도 발견 되었다고 한다. 이 동굴에서 나온 해골은 머리는 없었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머리는 적들이 잘라 간 것으로 확신한다. 왜냐면 전쟁 때 적들의 만행을 수없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문수골 산상학교 교장 김 종복씨(지금은 피아골 산장소장임)가 알고 있다고 했다.
답사를 알선해 주기로 약속 했는데 근년에는 거부하고 있어 아직까지 설득하지 못하고 있다.
전쟁 때 4년 동안 발견되지 않고 썼던 민간 동굴은 언제라도 답사할 수 있다.
문수골은 백운산 도당부에서 지리산 지구당부와 경남 도당부까지 레포 연락의 루트이기도 했다. 섬진강 건너 구례군 다압면, 간전면, 문척면에서 강을 건너 토지면 문수골 지구당부까지 연락 통로였기 때문이다. 1951년 동계(겨울철)공세 때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었다 노고단 쪽으로는 비트들이 있으나 답사는 엄두조차 못하고 있다.
문수골에서 피아골로 넘어가는 재를 질매재라 한다. 이 질매재에서 질등을 거쳐 섬진강으로 뻗어 내린 마지막 봉우리가 왕시루봉이다. 지금 이 봉우리에는 노고단에 있었던 미 선교사들의 통신대가 설치 되어있다. 이곳도 관광지로 이용되고 있다.
왕시루봉 중허리 피아골 쪽 한 골짝은 다래 넝쿨을 이루고 있다. 빨찌산들은 가을에 이곳에 잠복하게 되면 다래로 끼니를 때우기도 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백운산 똬리봉에서 섬진강으로 뻗어 내린 중바위등 능선이 있다. 이 능선을 타고 내려와 섬진강을 건너 토지면 한수내 골을 거쳐 왕시루봉 중허리 길을 돌아 대수골 지구당부까지 레포 연락 통로이기도 했다.
왕시루봉 기슭 한수내 골에서 1953년 8월 제 5지구당 조직위 결정 문건을 지참하고 한수내 골을 내려오다 적의 매복에 걸려 당시 박영발 동지 주치의 였던 이행련 동지가 부상 생포되고 연락부 지도원 1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이 한수내 골에서는 연락부 지도원 동지들이 매복에 걸려 많이 희생된 골짜기다. 이행련 동지는 파상풍으로 사망하여 가족 친지들에 의해 시신은 전남 영광 선산에 묻히었다.
피아골은 왼쪽 능선너머는 문수골, 우측 능선너머는 화개골, 정면의 능선 너머는 대소골이다 (원능선을 중심으로) 피아골은 악산골짜기다. 바위들로 거의 산골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골짝에서도 수많은 동지들이 희생되었다. 1951년 동계 공세 때 입산했던 한 가족이 큰 바위 밑에서 먹지 못하고 불도 지피지 못해 서로 얼싸안고 동사하기도 했다 한다. 지금 피아골은 피아골 삼거리까지 등산로가 나 있고 산장도 있다.
이 산장은 86년도에 세웠는데 그 때 유골들이 한 트럭쯤 나왔다고 한다. 나온 유골들은 민간인들이 약 효과가 있다하여 다 처분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유골들은 어떤 사람들의 유골일까 궁금해하고 있다. 다만 공세 때 생포되어 반항자들을 집단학살하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52년 여름 지리산 지구당부가 피아골 질매재 중턱에 트를 쓰고 있었다. 이 지상 아지트가 제 일구례군당 아지트이다. 이 아지트는 전쟁 전에 군당과 부대들이 썼던 아지트이기 때문이다.
이 아지트는 천연 요새로 되어 있다. 뒤는 암벽으로 절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지방자치단체에서 관광지로 사용하기 위해 아지트를 복원해 놓고 있으나 출입금지구역으로 되어 있다).
피아골에서 깊숙이 올라가면 산장이 있다 여기서 피아골 삼거리를 향하여 오르면 첫 중허리 철다리 건너기 전 50-60 미터 올라가면 제 2 구례군당 아지트가 있다 그리고 골짝을 타고 올라가면 토끼봉 밑 삼도봉에 이른다.
그 밑에는 일제 때부터 목기를 만들었던 자국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 근방에 5지구당 지도부(아지트)가 있었다. 그런데 52년 늦가을 새벽 적들의 기습 공격으로 5지구당 선전부장을 비롯한 간부들 4-5명이 희생되었다.
이때 이 현상 동지는 부관과 연락병의 영웅적 투쟁으로 무사히 구출되었다. 당시 필자는 지리산 지구당 위원장을 보위하고 아침 일찍 5지구당 지도부아지트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5지구당은 기습을 맞아 간부들이 맨몸으로 빠져 내려오는 과정에서 5지구당 조직부장 조병화 동지를 만나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다.
당시 기습사건에서 얻어진 교훈은 지구당과 경남도당을 오가는 연락부 지도원이 적들에게 생포되어 당 지도부 아지트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그 후부터 당 지도부와 연락부는 한 골짝에 있지 않고 서로 떨어져 있었다. 당 지도부 아지트는 연락부장만 알고 오가면서 연락 사업을 전개했다.
빨찌산 투쟁원칙은 당 지도부와 연락부는 같은 골짝 아지트를 쓰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연락부 지도원은 연락사업 과정에서 적들에게 체포되거나 희생될 가능성 뿐만 아니라 적들에게 체포되면 당 지도부 아지트를 가르쳐 줄 위험성이 많기 때문이다. 실제 그런 사건으로 피해를 본 사례도 간혹 있었다.
피아골은 큰 바위 골짜기가 많아 봄 해동될 때는 바위 밑에 은신하는 것은 위험한 곳이었다. 해동과 함께 바위가 무너져 내려 압살될 우려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 바위가 무너져 굴러가는 소리는 골짝을 뒤흔들게 할 정도로 폭발음을 내기도 했었다.
특히 동절기에 적들의 대공세 때 큰 바위 새에 눈이 많이 쌓여 높낮이를 분간할 수 없어 급한 후퇴 길에 아차하면 바위사이에 쌓인 눈 속에 처박혀 주위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구출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피아골도 동굴 아지트가 있다고 하나 찾을 길이 없다.
대소골은 노고단과 반야봉, 만복대 사이에 있다. 지리산에서 가장 큰 골짜기라고 한다. 여기서 흐르는 물은 70리를 거쳐 낙동강에 이른다고 한다.
대소골의 노고단 쪽 중허리에 거자수 나무가 제일 많이 있다. 매년 곡우 때면 거자수 물을 받느라고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
전쟁 때도 예외 없이 많은 사람들이 위험 부담을 안고 물을 받아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적들의 스파이가 민간인으로 가장하여 빨치산 활동의 동태를 살피기도 했다. 1952년 곡우 때 대소골에 당부 아지트를 쓰고 있는 중 정탐꾼을 발견하여 체포한 사례도 있었던 것이다.
대소골에서 구례쪽으로 사업을 나가려면 성삼재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성삼재에서 적들의 매복에 걸려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1952년에는 식량문제 해결이 제일 어려웠다. 적과의 전투보다 식량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으로 제일 많이 희생된 한 달의 희생 통계는 23명이나 되었던 기억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고 있다.
전투부대가 식량의 자체 해결을 못 할 경우 부대원들의 사기는 떨어져 참으로 어렵던 때가 있었음을 실토하게 된다. 그래서 식량문제 해결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식량을 위한 투쟁은 조국을 위한 투쟁이라”고 했을 정도 였었다
대소골짝 마지막 기슭에 심원마을이 있다. 지금은 사람들이 들어와 밤이면 불빛이 요란하지만 전쟁 때는 모두 소위 토벌대들에 의해 소각되어 폐허가 되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남원군 산내면으로 가는 달궁 입구가 있다. 개울가에 몇 가옥들이 있었다.
반야봉 능선이 대소골로 뻗어내려 골짜기에 맞닿고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목에 마을이 있었다. 전쟁 전 김지회 부대가 운봉에서 투쟁하고 대소골로 들어오다 잠시 개울가 마을(주막)에 휴식을 취하면서 후방 보초를 세웠다.
보초를 선 대원 동지는 피로를 견디지 못해 잠이 들고 말았다. 적들은 꼬리를 물고 계속 추격해 오다 잠든 대원을 생포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김지회 동지를 비롯한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었다.
필자는 1952년 대소골의 반야봉 중허리에 아지트를 쓰고 있을 때 희생지를 가 보기도 했다. 지형을 살펴보니 협곡이라 기습을 당하면 어찌할 수 없는 곳임을 실감하게 됐다. 그 후 산내골을 김지회 골이라 이름 붙여 오늘에 이르게 됐다. 조선에서는 영웅칭호까지 수여했다고 한다.
필자는 52년 4월초에 노고단에서 약수터까지 능선을 타고 가는데 적들은 능선 길 좌우 20~30미터 정도를 완전히 벌목해 멀리서도 능선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확연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맨등 능선을 만들어 놓았다.
51년 적들의 동계 공세 때 대소 골에서 피아골로 넘나들거나 전투에 희생된 동지들의 시신이 눈이 녹음에 따라 여기저기 늘펀하게 쓰러져 있음을 목격하면서 대성골의 빗점골에 아지트를 쓰고 있었던 이 현상 동지를 찾아 뵌 적이 있었다.
이 때 가는 길에 꽃대봉(지금은 지도에서 토끼봉으로 되어있음)을 거치는데 이 꽃대봉은 참꽃나무로 봉우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빽빽하게 들어선 참꽃대들이 총탄을 맞아 그렇게도 많이 부러져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사연을 알아 본 즉, 동계공세 때 이 현상부대가 뱀사골에서 대성골로 넘나들면서 꽃대봉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렸다고 한다. 지금도 이때 본 인상이 지워지지 않고 있다.
꽃대봉의 일화: 53년 여름, 제 5지구당 특수부대(김택유 소조)가 꽃대봉 능선에서 포진한 서남지구 경찰대 1개 연대를 생포했다. 부대장을 비롯한 3명이 군 복장을 하고 능선을 무사히 통과해 꽃대봉 지휘본부까지 갔다. 여기에서 서남지구 경찰대장과 대치했다. 적들의 포위 속에 김부대장은 권총을 경찰대장의 가슴을 겨누고 있고 적장은 자기권총을 미처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위기일발에 처한 부대장은 두 대원에게 쏘라고 외첬다. 그러나 대원들은 엄포로 생각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우리 측에서 먼저 발사했다. 경찰대장은 넘어지면서 권총을 빼내 쏘면서 넘어 졌다 .
이 흉탄에 우리 부대장의 눈을 관통 시켰다. 경찰대장은 사살되었다. 그런데 이때 능선 중간쯤에 경찰대 일개 대대를 생포한 이현상 동지 부관은 위기를 느끼고 총만 거두고 모두 놓아 보냈던 것이다. 꽃대봉 전투 승전보는 빨치산 신문에 보도됐다.
세석평전은 51년 동계공세 때 적들은 남원 음봉에서 민간인을 강제 동원시켜 포탄을 짊어지게 한 후 세석평전까지 오르게 했다.
그 때 민간인들은 바지저고리에 고무신이나 짚신을 신고 있었는데 산상에서 밤을 새우는데 빨치산 기습을 당할 우려가 있다고 불을 지피지 못하게 하고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아 70~80명이 전원 동사했다고 한다.
동기 공세 끝난 후 세석평전을 지날 때 주인을 잃은 지개들만 널부러져 있었다. 당시 참혹상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적들로 말미암아 참혹하게 죽어간 무의식 농민들을 생각하면서 이 땅에서 전쟁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미제를 기필코 몰아내는 길만이 무참하게 죽어간 농민들의 원귀를 달래는 길이 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추모제를 지낸 지리산 대성골은 52년 1월20일 경 이 현상 부대와 경남도당과 부대들의 주력이 적들의 무자비한 공세로 2000여명이 희생된 골짜기라는 것을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때 적들은 비행기로 네이판탄까지 투하하여 초토화 시켰던 것이다. 대성골 전투를 겪으며 살아남은 여성 빨치산 동지가 있다. 이 동지의 증언에 의하면 최악의 위기에 봉착해 있을 때 부상을 당해 거동이 불편한 20~30명의 동지들이 사령부를 구출하기 위해 각자 수류탄을 들고 차례로 자폭함으로써 적들의 화력이 여기에 집중되는 틈을 타 약한 고리를 뚫고 무사히 지도부가 구출 되었다고 한다.
만일 자폭한 동지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이 때 지도부는 완전 몰살했을 것이라고 했다. 지도부를 구출하기 위해 자폭한 열사동지들! 이 동지들이야 말로 빨치산투쟁사에 지울 수 없는 횃불이 되었다. 이 분들의 영웅적인 희생정신을 본받아 조국의 자주적 통일 성취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투쟁할 의지적 결심을 다짐하기도 했다.
이 현상 동지는 그 후 1953년 9월18일 빗점골에서 적들의 매복에 걸려 희생되었다. 지금 희생된 현장에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골짝에서 100여 미터 올라 가면 이현상 사령관 지휘부 아지트가 있다. 여기에도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전북빨치산 활동지역에 속하는 뱀사골은 지리산에서 제일 깊은 골짜기라 한다. 벽소령 쪽 양지바른 골짝 중턱에 제 5지구당부가 아지트를 쓰고 있던 때도 있었다.
1952년 10월 이 아지트에서 이현상, 박영발, 조병하, 김병인, 박찬봉 동지들이 회합하여 9.28후퇴 후 당시까지 총화도 지었다.
여기에서 대 부대 활동으로 많은 유생역량을 소모시키게 한 이현상 동지가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것은 김일성 수령님의 항일 빨치산 투쟁전술을 적용하지 않고 반정규군 작전과 대부대활동과 적들의 토목화점 작전으로 많은 희생자를 냈기 때문이다.
뱀사골 반야봉 쪽에는 방준표 동지 아지트가 있다. 그러나 그 위치를 예측할 수 없어 숙제로 남아있다. 앞으로 반드시 찾겠다는 결심은 변함없다. 작금에 답사한 아지트를 추정은 하나 단정은 못하고 있다
방준표 위원장 동지에 대한 남아 있는 인상은 52년에 박영발 위원장 동지가 백운산에서 지리산으로 왔을 때 방준표 동지, 이현상 동지 일행이 마중을 나와 함께 뱀사골까지 보위 하며 동행한 적이 있었다.
임걸령 약수터에서 잠간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한 간부 동지는 “권총만 있으면 됐지 왜 칼빈 소총까지 메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답하는 말씀이 ”적과 전투 때 권총만으로는 약하다. 칼빈 총만이 전투를 할 수 있다. 위기에 처했을 때 보위병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면서 “자신이 직접 들고 싸울 수 있는 전투력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당 간부들은 ”대부분 전투력이 부족하다. 나 자신 전투력을 연마하여 자신의 문제는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는 전투적인 무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말씀에 분위기는 너무도 숙연했다. 방위원장은 동계공세 때 보위대도 있었지만 스스로 전투력을 갖지 못해 비통하게도 중상을 당했다고 했다.
그 당시 전북에서는 의사가 다 희생되고 없었다 그래서 이 소식을 접한 박영발 위원장 동지는 재빨리 당시 지리산 부대 의무과장 이영원 의사 동지를 보내 비트에서 치료함으로써 “오늘의 건강한 모습을 찾게 되었다”고 감사했다.
이와 같은 쓰라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간부들은 절대로 보위병에 의존하지 말고 자신의 전투력을 향상 시켜야 한다고 했던 말씀을 한 그 후 53년부터 항일 빨찌산 부대 편제에 입각하여 보위병제를 없앴다.
위험할 때만 집단 보위하고 평소에는 자신의 문제를 자체적으로 보호하는 전투력 향상에 주력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데 일익을 담당했음을 지금도 그때를 잊지 않고 우러러 마음속으로 존경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도당위원장이나 간부들과 다른 하나의 특별한 차이점이었다.
우리는 자기머리로 사고하고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확고한 주체적 관점을 갖고 소신 있게 행동하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그리고 52년 여름 가을 2차에 걸쳐 필자가 방위원장 비트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52년 12월에 세 번째 남원군당 아지트까지 갔다가 눈 족적 때문에 되돌아 온 적이 있었다. 방위원장 동지는 반야봉 중턱 아지트에서 현지에 나가 함께 싸우겠다고 했다 한다. 그러나 현지 간부들은 한사코 만류 했다 한다. 도당 연락부가 뱀사골 기슭에 있었다. 연락부 동지들이 현지 지도부와 레포 연락 사업을 하는데 오가는 도중 달궁 능선에서 적의 매복에 걸려 희생되거나 부상을 당한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52년 여름 연락부를 찾았을 때 부상환자 동지들이 몇몇 있는 것을 확인하고 위로한 적도 있었다.
방위원장 동지는 “나 하나 때문에 금싸라기 같은 동지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고 항상 말씀 하셨다 한다. 그 후 53년 봄경에 현지로 갔다가 무주군 덕유산에 위치한 망봉에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54년 1월19일). 그런데 방위원장은 53년 몇 월 달에 현지로 나갔는지는 지금껏 알지 못하고 있다. 당시 같이 있다 살아남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 아들 한 분이 생존해 있지만 잘 모르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부인은 몇 년 전에 작고했다.
노고단의 차일봉의 능선따라 뻗어 내린 능선이 구례군 광의면까지 닿는다. 마지막 봉우리가 지초봉이다. 52년 여름 대소골의 피아골 능선쪽 중허리에 아지트를 쓰고 있을 때 광의면으로 보급투쟁을 나갔다가 여의치 않아 이곳 지초봉 중허리 길에서 하루 더 잠복을 하고 있었다. 보급량이 너무 적어서 보급투쟁을 다시 하기 위해서였다.
비는 내리고 있었다. 날이 밝자 안개는 자욱히 끼었다. 부대는 휴식을 취하면서 아침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전방 중초 선에서 적들이 꼬리를 물고 올라오는 것을 안개가 벗겨지자 먼저 발견하고 사격을 가함으로써 전투는 시작 되었다. 필자는 재빨리 엠원을 메고 전방에 나갔다.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이었다. 빗물이 총구를 통해 들어가 약실에 녹이 슬었기 때문이다.
무명베 조각으로 약실을 닦아 다시 실탄을 장전하여 방아쇠를 당기니 비로소 싸울 수 있었다.
안개가 벗겨진 후 주위를 살펴보니 적들이 우리 부대 후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앞 능선따라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비무장 후방부대를 안전하게 성삼재까지 후퇴시켜야 할 위험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소대장 동지와 함께 적들보다 먼저 후퇴로 고지를 점령해야 남은 부대가 완전하게 후퇴 시킬 수 있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하여 아군 후퇴로 고지를 간발의 차로 먼저 점령하여 적들에게 공격을 가했다. 남은 부대는 무사히 위기를 넘기고 성삼재 중허리 까지 후퇴 할 수 있었다. 우리 둘이 방어하는 동안 2명이 보충됐다. 마지막은 우리 4명이 어떻게 무사히 후퇴 하느냐 였다.
필자는 당시 지형지세와 상황을 고려할 때 중허리 길로 후퇴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했다. 그러나 중대장은 바로 뒤 고지로 후퇴해야 빨리 본 대열과 합류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위험 하다고 한 나의 말은 절박한 상황에서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뒤 고지로 후퇴하다 소대장은 즉사했고 중대장은 팔이 부서지고 대원 1명은 궁둥이 관통상을 입었다. 지형지세로 볼 때 후퇴로는 직선거리이기는 하지만 직탄거리이기 때문에 모험을 강행한 결과였음을 알게 되었다. 사실 희생된 소대장 동지를 구출하려고 시도했으나 직탄거리 60-70미터 거리의 민등성이라 또 다른 희생을 염려해 포기하고 돌아섰던 아픔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필자는 마지막 수류탄을 적들에게 던지고 부상당한 두 동지와 함께 중허리를 돌아 무사히 본 대열과 합류했다.
또한 동지 1명이 후퇴하다 우리 뒤 고지에서 전투 장면을 넘어다 보는 순간 적들의 유탄에 맞아 희생되었다. 결국 2명 희생 2명 부상 필자만 무사했다. 이 비보를 접한 지구당 위원장은 얼마나 마음 아파한지 모른다. 그 후 총화에서 필자의 말을 묵살한데 대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적들이 퇴각한 후 희생된 현장을 찾았다 적들은 우리 소대장동지의 목을 베어갔다. 그 당시에는 희생된 동지들의 머리나 귀 코를 베어가기도 했다. 허위 과장된 전과를 올려 훈장이나 휴가의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리 코 귀를 잘라 오도록 했다는 것이다.
52년 여름 지구당부 조직부 지도원들 5명이 지초봉 능선을 타고 광의면에 투쟁 나갔다가 백주에 발각돼 지도원 4명이 희생되고 외팔이 책임자 동지만 살아 돌아 왔다. 이 때 아까운 젊은 간부동지들을 잃은 사연은 두고두고 가슴을 때리고 있었다.
구례군당의 최후
54년 초에 구례군당 장을수 부위원장은 군당 성원 20여명을 구례읍 모 초등학교 교실 밑에 약 한 달간 잠복했다가 결국 모두 자수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래서 구례군당은 종막을 고하게 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기타 사항은 필자의 역사 기행문에서 밝혔기 때문에 생략한다.
뱀사골 중허리 박위원장 동굴 아지트는 2월 14일 광주시민의 소리 신문사와 2월27일 엠비씨 촬영팀과 답사하고 촬영한 기사를 지리산 반야봉 중허리 동굴답사 기행문 제 1신 제2신을 참조하기 바란다
전남 도당은 51년 동계공세 전에 야산에서 활동하던 많은 동지들을 지리산으로 파송했다 지리산 동지들은 동계 공세 때 거의 희생되거나 체포되었다. 공세 끝난 후 부대원 동지들 몇 십명 정도 남은 사람들로 부대를 조직했다.
54년에 지리산은 적들의 마지막 공세로 종막을 고하다시피 했다. 아니 지리산 전체가 조직적인 투쟁은 끝났다고 했다. 남조선 빨치산 투쟁이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예견 되어 있었다고 한다
빨치산 투쟁 전술에서도 항일 빨치산 투쟁 전술을 적용하지 못한 오류에도 근거하지만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첫째 조선전쟁은 세계의 최강국인 미제와 전쟁을 하고 있다는 어려움이며, 두 번째는 지역이 협소하고 은폐 할 곳이 없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대중적 지반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월남의 투쟁과 대조적이다. 특히 정전이 되면서 일선정규군들이 후방 토벌작전에 집중됐다는 것이었다.
4년여의 빨치산 투쟁에서 수많은 영웅 열사들이 배출되었다. 이 땅을 침략한 미제를 비롯한 16개 침략군을 물리치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희생된 수많은 영웅열사 동지들이었다.
우리는 누가 누구를 위하여 처절한 싸움에서 고귀한 생명을 바쳤는가를 마음속 깊이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미제는 남쪽 땅에서 둥지를 틀고 있다. 조국분단은 전적으로 미제에 의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자주적 역량부족에서 분단을 자초하게 됐다는 점도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6.15시대를 맞아 살고 있다. 반동 냉전수구세력들은 미제에 편승하여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갖은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발광적인 공세를 취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민족끼리>라는 이념의 기치 하에 3대 공조를 실천투쟁을 통해 하나씩 구현시켜 나가야 한다. 우리민족 대 미제와의 대결구도를 완전히 정착시켜 미제를 구축(축출)하기 위한 투쟁을 강력히 전개해야 할 역사적 민족적 과업이 주어져 있다. 진정으로 통일을 염원한다면 미제를 이 땅에 그대로 놓아두고는 이룩할 수 없다.
2005년은 광복60년, 미군 점령60년, 6.15공동선언 5주년이란 뜻 깊은 해이다. 우리는 구호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미군철수 원년의 전환적 국면의 해로 만들려면 미군을 어떤 방법으로도 구축 시키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미군철수 남북공동대책위를 하루라도 빨리 구성해야 한다.
이는 민족적 요구이며 시대의 흐름이다. 시대적 요구와 흐름에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실천 투쟁뿐이다 .이를 외면하거나 방관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규탄 받아 마땅하다.
우리는 조국 해방전쟁 때 희생된 열사동지들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똑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열사동지들의 희생정신과 위업을 받들어 미제를 구축하는 투쟁에 우리 모두 함께 떨쳐 일어날 것을 다짐하는 역사 기행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위 글은 2005년에 기록한 것임.
2021. 8/24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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