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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46. 백운산 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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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7-29 17:36 조회1,1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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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46. 백운산 역사기행

"빨찌산 투쟁에서 광양 백운산은 전남도당의 핵심기지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1. 서언

역사기행은 현장 답사를 통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학습장이 돼야 한다.

동시에 왜곡되고 잊혀진 현대사를 바로잡고 정상적으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해야 한다.

현장답사에서 단순히 어떤 사건들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아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그 시절 그때로 돌아가 당시 펼쳐진 사건들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가

그 원인을 똑바로 규명하고

그 속에서 체득해야 할 역사적 경험과 교훈이 무엇인가의 핵심을 찾아내야 한다.

역사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현장답사의 물줄기를 과거로부터 현재, 현재에서 미래에로 지향해 가는

목적의식적인 현대 정치사로 연결시켜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주체적 역사관을 옳게 확립하는데도 기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기행문도 전개되는 사건들의 가감없는 진실을 밝히고

오늘의 조국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에 접목시켜

저마다 주어진 여건에서 당면한 과업 완수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기본 관점에서 기술하고자 하나 미흡한 점 많으리라 생각한다.


2. 피로 물든 섬진강을 가다

우리 일행에는 유복남, 박유배동지(백운산 빨찌산 출신) 들과 필자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노투사 (이성근, 안학섭, 양희철, 안희숙, 김영승, 나승하, 정관호, 전덕례, 정귀남, 윤혜자, 신평식, 손영심, 등)들 그리고 몇몇 젊은 일꾼(박지수, 김해령, 노진민 등)들이 함께 했다.

남원에서 구례를 통과하는 길에 밤재가 있다.

지금은 밤재에 산 터널을 뚫어서 가파른 고개를 넘지 않아도 직선으로 통할 수 있다.

그동안 많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 밤재에 얽힌 사연은 이렇다.

1951년 가을 이현상 부대가 백아산까지 와서 인원을 보충하고 지리산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당시 곡성과 구례 해방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구례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이 밤재 능선을 장악해야만 했다.

밤재 능선이 남원에서 구례로 넘어오는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유일한 작전지대였기 때문이다.

구례작전은 밤재와 곡성에서 들어오는 통로, 하동에서 구례로 들어오는 통로를

완전히 차단해야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 빨치산 무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전투였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끝까지 사수하지 못하고

피아간의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피어린 밤재 능선을 잊을 수 없다.

일행이 구례 산동면을 지날 때는 산동면 해방작전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동면은 지리산 자락에 골짜기 하나가 한 마을을 이루고 있기에 상동, 하동, 중동이라 불렀다.

이 세 골짝 마을의 끝에 산동면 지서가 위치해 있다.

산동면을 해방시키는데 마지막 지서 함락 작전이 전개됐다.

이 작전에서 지서안의 적들은 실탄이 다 떨어져서 총을 들고 나오려고 했었는데 아군부대는 모르고 날이 새 불리하다고 생각한 결과 후퇴했었다.

이 함락 작전에서 총사 연대 중 7연대 연대장 등 지휘 간부들과 대원 동지들의 희생이 있었다.

참으로 잊을 수 없는 한편의 역사 현장이었음을 되새겨 보면서 섬진강에 이르렀다.

구례 토지면에서 섬진강변을 따라 하동읍을 향해 달려가다 보면

강변 우측은 우리의 기행 목적지인 백운산이, 그리고 좌측은 지리산이 자리잡고 있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과 백운산으로 나뉘는 것이다.

토지면에서 강건너 백운산 쪽 간전면과 하동군 학예면을 가기 전

한순네골을 좌측으로 바라보면서 달리게 된다.

한순네골 가기 바로 전에는 강변 모래사장이 있다. 이곳도 잊을 수 없다.

백운산 따리봉에서 섬진강변까지 뻗어내린 능선을 중바위등 능선이라 부른다.

1953년 9월 15일 김선우 도당위원장을 보위한 우리 일행은 5명이었다.

권영용(체포후 총살 집행) 중대장과 연락지도원 윤석두(체포후 총살 집행) 동지가 후방을 감시하고 필자와 이선근 연락지도원이 적구 정찰 책임을 맡고 위원장과 조 보위병은 중간에 두고 섬진강을 건너는 과정이었다.

우리 적구 정찰조가 강을 무사히 건너 모래사장을 지나 도로 언덕에 다달았을 때였다.

시계는 바로 해가 서산에 지고 어둠이 캄캄하게 깔린 상태였다.

그렇게 일몰 전에 건너편 중바위능선 중턱을 돌아내려 지리산 자락 도로변을 정찰하는데

한편 건너편에서 우리 일행을 발견한 적의 잠복부대가 막 도착해서 자리를 잡는 순간에

우리 정찰조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뒤의 일행은 별 일 없으리라 생각하고 강을 한참 건너오고 있는 순간이었다.

캄캄해서 실체는 보이지 않지만 적의 말소리가 들렸다. 바로 앞에서 "이곳에서 잠복하면 된다"는 말소리가 들렸다.

일단 적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나면 대응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뒤쪽으로는 물살을 가르며 건너오는 소리가 크게 들리고 있었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바로 그 순간, 우리 정찰조가 M1 8발을 쏘며 돌격 소리로 전진했다.

적은 당황한 나머지 한발도 쏘지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리 일행은 왕실봉 중터리를 단숨에 오르며 무사히 노고단을 넘을 수 있었다.

그런 사연이 얽힌 강변 모래사장을 회상하면서 한순네골 강변을 달리게 됐다.

이 한순네골은 백운산에서 지리산, 지리산에서 백운산으로 오는 연락통로 중의 하나였다.

그 당시 섬진강을 건너다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었던가.

물살에 떠내려가 죽은 동지들, 강을 건너다 건너편 매복에 걸려 강물에서 싸우다 희생된 동지들, 특히 엄동설한에 물살이 가슴까지 차오르는 속에 강을 건너야만 했고

건너다 싸움이 벌어지면 물살에 전사하고 빗발치는 적의 총탄을 맞으며 넓은 모래사장을 지나 적의 매복지를 뚫고 지리산으로 이동하며 투쟁했던 섬진강은 잊을 수 없는 역사의 피어린 현장이기도 했다.

지금도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있다. 한순네골에도 빼놓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하나만 소개한다면 1953년 8월, 제5지구당 조직위 결정으로 지구당을 해체하게 됐다.

그때 5지구당 결정서 문건을 지참하고 한순네골을 내려오던 도중

박영발 위원장 주치의였던 이행년 동지가 매복에 걸려 부상 생포당함으로써

문건을 빼앗겼던 아픔이 있는 곳이다.

부상당한 이 동지는 응급조치를 제대로 하지 못해 결국 파상풍에 걸려 죽고 말았다.

지금 그의 유골은 영광군 군서면 이 동지 선산에 묻혀 있다.

피아골 입구를 지나면서는 피아골 입구 전투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아골 입구는 1950년 9·28 후퇴 후 소위 유엔군 부대와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전적지였다.

구례에서 하동읍으로 이동하던 적들에 매복전으로 결정적 타격을 주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화개 장터를 지나면서

화개골 빗점골에서 이현상 동지가 매복에 걸려 희생됐던 1953년 9월 18일을 되새기면서 악양면을 바라보며 하동읍을 달리게 됐다.

악양면은 지리산 세석평지로 이어지는 한골짜기가 한 개 면인데 1951년 동기 공세 전 이현상 부대가 일시적으로 해방시켰던 곳이며 여기에서 보급한 식량을 동기 공세로 인하여 다 소모하지도 못하고 적들에게 빼앗겼던 기억도 새롭게 되살아났다.

하동읍을 통과할 때 지나는 강변 낭떠러지 입구는 1953년 7월 하동읍 파출소를 전남부대 소조가 습격해 괴멸시킨 곳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파출소 흔적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일행은 어둠이 깔린 속에 하동읍에서 광양군 진월면으로 통하는 섬진강 다리(새로 건설됨)를 건너 진월면 옥곡면을 거쳐 옥룡면 옥룡골 백운식당에 이르렀다.

이곳 민박에서 일박하면서 하루의 피로를 풀고 각자 소개와 하고싶은 말 한 마디씩을 남겼다.


3. 한재를 오르다

한재는 해발 868고지이다.

한재 너머 구례군 간전면(지리산 문수골로 통함) 좌측을 오르면 따리봉, 우측으로 오르면 상봉을 향하는 원능선이다. 옥룡골은 도로와 민박들이 들어서서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아침 7시에 출발한 일행은 연병장을 통과하게 됐다.

이곳은 9·28 후퇴 후 해방구를 갖고 있을 때 빨치산 부대들이 훈련 등 각종 행사를 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개발되어 도로가 나고 새로 심은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옛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 연병장은 도당 지도부가 있던 88골짜기에서 연병장을 통해 도슬봉으로 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그래서 1951년 동기 공세 때부터 이곳을 지나다 적의 매복에 수많은 동지들이 희생되고 생포되기도 했던 곳이다.

이곳 근처에서 생포됐던 한 여성 동지는 지금 살아 생존하고 있다.

지금은 할머니가 되었지만. 이런 저런 일들을 생각하며 한재를 향해 올랐다.

원래 88능선에서 추모행사를 진행하려 했으나 사정상 변경하여 한재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러나 일행 중 노투사들의 건강이 허락지 않아 일부만 한재까지 오르고 나머지는 중도에 처지는 상태였다.

그래서 한재골의 소골짜기인 용지선 골과 한재로 가는 갈림길 골짝 물가에서 상봉을 바라보며 동지들을 추모하는 자리를 가졌다.

준비해 간 과일과 술을 따르고 조국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먼저 산화하여 간 동지들을 기리면서 엄숙한 마음으로 묵념을 했다.

일행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먼저간 동지들의 희생정신을 본받아 6·15 공동선언 고수이행으로 남은 생을 다 바쳐나갈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서로 손과 손을 맞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다.

한재는 동기 공세 전 백운산 부대가 거점으로 쓰던 곳으로 여기에서 각종 문화행사도 했다.

동기 공세 때는 적아간의 전투장이 되어 많은 희생자를 냈던 한재 전적지이기도 하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 한재는 잣나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당시 속된 말로 한재잣이 이승만의 진상에 오르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었다.

그만큼 한재잣이 유명했다는 것이다.

참고****지금 한재에는 우리 선생들 4분이 묻혀있다


4. 용지선골 학독터를 가다

백운산은 큰산이라 눈도 제법 많이 와서 눈을 밟으며 학독터를 찾아 오른다.

옛날에 밟았던 길이고 고리수를 받기 위해 비닐 파이프를 설치하느라 민간인들이 다녔던 길이기는 하나 눈에 덮여 제길을 찾아가기 쉽지 않아 숲과 너덜강 바위를 넘나들며 한참 헤맨 끝에 드디어 학독터를 찾아냈다. 용지선골에는 도당 연락부가 터를 쓰고 있었다.

이 학독은 넓다란 바위 한복판에 징으로 쪼아 만든 것이다. 이 작업은 당시 연락부원 형(이름 미상)이 목수였기에 며칠간의 작업 끝에 파서 디딜방아를 만들어 양쪽에서 발로 디디며 한 사람은 학독에 넣은 곡식을 밀어넣고 찧었던 곳으로 1951년에 만들었던 곳이다.

지금 살아있는 생존자로서 당시 방아를 찧었던 정관우 선생과 정덕례 여성 동지가 살아 있다. 현장을 답사한 감회와 추억이 새롭게 되살아나기도 했다.

이 학독에서 벼나 겉보리 등을 찧었는데 이 학독을 거쳐간 동지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 유일하게 이 두 동지만 남아 있는 상태다.

토벌대는 방앗고는 없앴어도 학독만은 파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말없는 역사의 증인으로 남아

그때의 생생한 모습을 전해주고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새로운 다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백운산에서 유일한 전적지의 생생한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일행은 여기에서 간단한 추모의 뜻을 표하고 사진촬영도 했다.

보충-++++ 근례에 금속탐지기를 이용해 선지골에서 새로운 동굴을 발견하고 유품도 많이 수습했다. 특히 인민군 훈장도 나와 전사들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다.


여기에서 원능선에 오를 선생들만 남고 나머지 일행은 옆 능선 너머 도당 지도부가 있던 88터를 답사하고 하산하여 집결지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기로 했다.

우리 일행은 가파른 경사, 우거진 숲과 바위를 넘나들며 나무와 풀잎을 잡고 미끄러지고 또 오르면서 드디어 원능선에 도달했다.

오르는 과정에 지난 폭우 때 산사태가 나서 자연환경이 많이 훼손되었으나 이를 치유할 손길은 미처 뻗치지 못하고 있음도 실감했다. 일행 중에 젊은 한 친구 때문에 오르는 속도가 느리기도 했다.

"노장 선생들은 잘 오르는데 왜 젊은 친구가 그렇게 더디냐"고 가벼운 재촉도 했다.

그런데 뒤늦게 몸이 아픈 상태에서 역사기행을 취재하겠다는 일념으로 아픔을 참고 함께 올랐던 것임을 알고서 젊은 친구의 불편함을 사전에 감지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기도 했다.

다시금 지면을 통해 죄송함과 이해를 구한다.

추운 눈얼음 속에서도 진땀을 흘리며 원능선을 올랐을 때 그동안 막혔던 숨통이 확 트인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반세기 전 빨찌산 동지들이 생사를 걸고 단숨에 오르고 내리던 길을

단시간이나마 체험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값있는 경험이 됐으리라 생각한다.

드디어 고 김선우 위원장 유골이 묻혔던 능선고지에 다다랐다.

이 가묘에서 상봉을 향해 간단히 추모의 뜻을 표하고 백운산을 한눈으로 내려다보며 동서남북 방면 지형지세를 관찰했다.

선우 동지가 이곳에 묻히게 된 동기는 이러하다.

선우 동지는 전남 보성 출신으로 고매한 성품을 가진 지도자로서 매사에 다정다감하고 하부 일꾼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절대로 반말이나 '해라'를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부 일꾼들이 항상 그를 우러러 받들었다.

진월면 폐장 금굴에 잠복해 있다가 적들에게 발각돼 함께 있던 유상기 책임지도원 동지와 보위병 동지는 위원장 동지 구출 작전에서 희생되고 선우 동지만 다리 허벅지 관통상을 입고 단신으로 백운산에 들어왔다가 적들의 포위망에 걸려 최후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적들은 선우 동지의 인품과 인격, 그리고 지도자상을 받들어 시신을 이곳 능선에 묻게 했던 것이다.

그후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늦게나마 살아있는 노장들이 기억을 더듬어

유골이라도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몇 차례의 지형 답사 탐사 작업을 통해

지형지세 탐색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류락진 선생(암으로 작고했다)과 이복순동지가 유골지를 발견했다(복순여사는 당시 선우위원장 기요원인 동시에 비서로 사업했다).

골격과 옷, 그리고 묻힌 지점을 종합해서 선우 동지임을 여러 노장들과 함께 확인하고

선산인 보성군 웅치면에 안치했다. 그후 매년 참배를 하고 있다.


5. 한눈으로 바라보는 백운산의 지형지세와 역사적 의미

백운산은 역사적으로 임진 조국전쟁, 갑오농민전쟁, 일제 강점하 의병투쟁, 항일투쟁, 해방공간시의 유격투쟁, 조국전쟁 시기의 치열한 전투장이었다. 이 모두가 이땅에서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민족자주와 조국해방투쟁의 산 전적지 중의 하나임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백운산은 1227고지로 상봉, 따리봉, 도슬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3대 봉우리로 둘러싸인 안쪽을 내각이라 하고 그 반대 바깥쪽을 외각이라 불렀다.

내각은 제일 큰 옥룡골이라 부르고 상봉 너머는 진상골, 다합골, 서골, 독새바위골이라 부르고

따리봉에서 섬진강변까지 뻗어내린 능선은 중바위등 능선이라 부른다.

도슬봉에서 옥룡골 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은 봉강능선이라 부르고 그 골짝을 봉강골이라 한다.

그리고 도슬봉에서 순천 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에 용개산이 있고 용기동골이 있다.

섬진강 쪽으로는 문척골과 간전골이 있다. 상봉에서 하봉-삼각고지-기관포고지-800고지-박우리봉으로 이어지고 한 갈래는 옥룡면과 옥곡면 경계를 이루는 큰 능선이 길게 늘어져 있다.

그 외에 이름모를 능선들과 골짜기들이 수없이 펼쳐진다.


6. 백운산 봉우리와 골짜기들의 새로운 명칭 부여

재산시 잘 싸우다 희생된 간부들이나 전투원들의 이름을 따서 백운산 봉우리와 골짜기들을 새로 명명했었다.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것만 열거한다면,

백운산은 전남 도인민위원장 김백동 동지 이름을 따서 백동산,

상봉은 도당위원장 김선우 동지 이름을 따서 선우봉,

따리봉은 도당부위원장 인철 동지 이름을 따서 인철봉,

도슬봉은 백운산지구 사령관 유몽룡 동지 이름을 따서 몽룡봉,

옥룡골은 당시 도당 부위원장 염형기 동지 이름을 따서 염기동골,

상봉 너머 진상골은 당시 도당 책임지도원이었던 유상기 동지 이름을 따서 유상기골,

박우리 봉은 광양 군당위원장 박정기 동지 이름을 따서 박정기봉,

진상골 잣나무터는 부대장인 이봉상 동지 이름을 따서 이봉상터라 불렀으며

다합골은 당시 전남 연대장이었던 이정태 동지 이름을 따서 이정태골,

간전골은 당시 도당 부위원장 정귀석 동지 이름을 따서 정귀석골,

용개산은 당시 정공대장 조동만 동지 이름을 따서 동만산이라 불렀다.

용기동골은 당시 사령관인 남태준 동지 이름을 따서 남태준골,

옥룡골 쪽 88터 능선 너머 백암골은 동기 공세 때 지구사령부 참모장이었던 조갑수 동지 이름을 따서 조갑수골이라 불렀다.

안타깝게도 그 외에는 생각나지 않는다.

참으로 다 기억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7. 옥룡골에서 잊을 수 없는 몇가지 역사적 사건들

옥룡골은 우선 필자가 1954년 초봄에 총 세발을 맞고 체포된 곳이며 전남 부대가 최후를 마쳤던 곳이다.

옥룡골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오면 똥섬이 있다.

이 똥섬은 1953년 8월 14일 저녁 기습작전에 들어가다가

지뢰를 밟아 50여 군데 파편을 맞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던 곳이며

특히 소년전사 구춘길 동지가 장렬하게 전사한 골짜기다.

따리봉 밑에서는 토벌대들의 포위공격에 인철 부위원장 동지가 희생됐다.

토벌대가 그의 목을 잘라 배낭에 넣어 한재에서 상봉으로 가는 첫 봉우리인 민세등에 놓아둔 것을 유봉남 동지가 발견해서 정귀석 부위원장과 전영선 여성동지가 머리를 시신 몸통에 붙여 매장했다.

하지만 지금도 매장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1954년 봄 염형기 부위원장 동지가 비트에 있다가 수색에 발견돼 전사했다. 토벌대는 그의 목을 잘라 담요로 싸서 광양읍까지 가져왔다.

염형기 동지는 당시 순천군당위원장이었던 남상훈을 소환하여 오는 과정에서 도슬봉 밑에서 잠시 쉬는 중이었는데 칼빈으로 저격하여 염동지와 보위병을 쏘아죽이고 자수하는 웃지 못할 비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88능선 너머 백암골에는 민청학원이 있었고 이 골짝에 도당 정공대 3대대 부부대장 심 동지(여수 출신으로 기관총을 소총 다루듯 한 우람한 체격을 가지고 있던)가 단신으로 토벌대 12명을 사살하고 마지막에 희생된 곳이다.

시신은 공세가 끝나고 묻었으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8. 두 소년 전사

한 소년 전사(이름 미상)는 1951년 동기 공세 때 백운산 지구 사령부 부정치원 연락병이고

또 한 소년 전사 구춘길은 전남 부대원이었다.

이 소년 전사는 부정치원과 함께 한재골에서 기술 잠복하고 있었다.

토벌대는 수색작전을 펴며 능선에서 골짜기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토벌대 중대장이 부정치원 대학동창이었다.

부정치원은 이를 알고 위기의 순간 손을 들고 투항하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자기 연락병에게 함께 투항하자고 했다.

그러나 소년병은 완강히 거부했다.

아무리 설득해도 듣지 않아 자기만 투항했다.

그래서 그는 살았다.

그러나 소년 전사는 발각돼 생포됐다. 그 순간 소년 전사는 끝까지 저항했다.

"나는 너희들에게 투항할 수 없다. 미제의 앞잡이들아, 쏠테면 쏴라" 하면서 완강히 저항하자

결국 토벌대는 할 수 없다고 체념하고 참으로 악질이라면서 저항하는 소년 전사에 8발의 총탄을 퍼부어댔다. 그리하여 장렬하게 전사했다.


구춘길 소년 전사는 우리 전남부대 전투원으로서 1954년 초 토벌대와 치열한 전투 끝에 다리 부상으로 걸을 수 없게 됐다.

동무들은 할 수 없이 그를 바위 밑에 은신시켜 두고 전투가 끝나면 데리러 오려고 했다.

그러나 적과 전진 후퇴를 거듭하는 투쟁 속에 구춘길 동무는 발각됐다.

적은 그를 생포해서 데리고 가려 했다. 그러나 구춘길 동무는 완강히 거부했다.

"미제의 앞잡이, 개새끼들아, 쏠테면 쏴라, 죽어도 너희들에게 투항하지 않겠다"고 성토했다.

적들은 수차례에 걸쳐 위협도 하고 달래도 보았지만 도저히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빨갱이 악질이라며 3명이 집중사격을 가함으로써 소년 전사는 몸이 벌집이 돼 붉은 피를 쏟으며 최후의 장렬한 죽음을 맞게 됐다.

이 소식을 듣고 포로된 동무들은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구춘길 동지는 구례 간전면 출신으로 노래도 잘 부르고 활달한 성격에 한마디를 하더라도 야무지게 하며 돌격전에도 항상 선두에 서서 진격하며 생활에서 적극성과 자발성을 갖고 다른 전사들의 모범이 돼 사랑을 독차지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때의 그 모습이 선하게 남아있다. 이제는 한줌의 흙이 되었지만 항상 머리 위에서 지금 동무들은 어떻게 살며 무얼 하고 있는가 말하는 것 같다.

백운산을 그리며 동지를 되새겨보게 된다.


9. 진상골에 얽힌 몇가지 역사적 사실들

진상골 발치에서 상봉까지 폭 50m로 웅장하게 심어진 나무를 벌목해서 상봉에서 골짝을 내려다보면 개미 기어가는 것도 다 보일 정도로 민둥하게 만들었는데 전쟁 기간 내내 그 형태 그 모습이 남아 있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은 1948년 10월 19일 여순 애국병사 봉기 후 백운산 빨찌산의 거점과 부대 이동을 한눈으로 감시하기 위해서 벌목했던 해방공간시의 역사현장이기도 했다.

잣나무터(전남부대 터)는 1953년 8·15 경축행사를 하던 중 그날 밤 적들이 들어와 포위하고 날새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우리의 새벽정찰이 적들을 발견해 부대가 무사히 포위망을 탈출했던 일이 있었던 곳으로 당시 적들과 대치하며 아군의 사상자까지 내면서 싸웠던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소능선을 넘으면 소령터가 있다. 1951년 적의 군용차를 습격하여 소령을 생포했다가

다시 내려 보냈던 곳을 소령터라 명칭을 부여했던 것이다.

또한 전남 연대장이었던 이정태 동지가 적의 매복에 희생돼 박영발 동지의 애정어린 동지애의 눈물을 자아냈던 아픈 사연도 있다.

그 외에 많은 역사적 사연들이 있으나 한정된 지면에 다 열거할 수 없어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리고 하봉에서 800고지로 가는 삼각고지는 1952년 1월 중순 도당 정공부대가 토벌작전에 동원된 육군 수도사단이 막 삼각고지에 짐을 푸는 순간 대낮 기습전을 감행해 많은 무기와 탄약 보급품을 노획했던 고지이다.

이때 노획한 M1 탄 1만여 발을 한재골 바위 밑에 비장했으나 비장한 동지가 모두 희생돼 지금껏 찾을 길 없다.

아마도 무언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겠지만 영원히 빛을 발하지 못하는 흙진주가 될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서골에는 환자터가 있었다.

이곳 환자터는 공세 때 부실하기 짝이 없는 흙땅굴 비트에 들어가 있었다. 1953년 늦가을, 적들의 대대적 수색작전에 모조리 발견돼 끝까지 저항하는 환자 동지들은 사살하고 나머지는 생포해 갔던 피의 투쟁이 서린 골짜기이다.

이때 모자가 입산해 어머니는 저항하다 사살되고 아들은 생포되는 비극도 있었다.

아들은 지금도 살아 있을텐데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그리고 800고지는 1953년 초가을 미 전투기 5대가 한 편대를 지어 타원을 그리며 맹폭격과 기관총을 난사하고 소이탄을 터뜨려 불바다가 된 상황에서 고지에서 살아나온 기억도 생생하게 남아 있어 평생 잊을 수 없다.


10. 용기동골에 얽힌 역사적 사실들

1951년 야산지대에서 활동하던 동지들 백여명이 용개산에 들어갔을 때는 적들의 일차 공세 중이었다. 그래서 백운산 내각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일차 공세가 끝나면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 독자적으로 연락원 2명의 인솔 하에 공세를 막고 있었다.

보급로가 차단돼 며칠을 굶으면서 비무장 동지들은 매일 계속되는 포위 공격 수색작전에 걸려 일부는 체포되고 일부는 죽어 갔다. 이 와중에 공세 전 방앗간 터에 쌓인 멧재를 눈과 얼음을 깨고 손으로 한줌씩 불어서 싸래기 한 주먹을 알루미늄 솥에 넣어 물을 붓고 끓여서 한 모금씩 나누어 먹으면서 공세를 극복해야 하는 처절한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투쟁의식이 약화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이니 날이 새도 산상 잠복 나가지 않고 그대로 터에 남아 있다가 토벌대들의 총탄에 맞아 소각당해 검게 타버린 앙상한 시신을 수없이 보게 되었다.

그 역경 속에서도 투쟁의 의지를 불살랐던 동지들은 살아남았고 완전히 자포자기한 동지들은 수없이 죽어갔던 피어린 역사의 현장, 용기동골을 잊을 수 없다.

필자 역시 살아남은 유일한 몇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 그때의 일을 회상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마음 속 깊이 되새기면서 하산길에 들어섰다.


11. 88능선과 88터 답사

일행은 내려올 때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88 보초선 능선에 도달했다.

이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빠꾸바위가 있다. 빠꾸바위라는 이름은 동기 공세 때 도당 지도부 산하 각 기관 단체성원 약 백여명이 88터에서 중허리를 돌아 큰바위 밑에 왔으나 토벌대의 공격으로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 후퇴하게 된 데서 붙여진 것이다.

부대 이동 때 이 빠꾸바위 밑은 이따금 하루쯤 묵다가 이동하는 이른바 정거장, 거점으로도 이용됐다.

88 능선에 도달한 일행은 새삼 88 보초선 위치가 그 얼마나 전략적인 위치인가를 실감하게 됐다.

여기서는 백운산 내각 원능선을 한눈으로 살펴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다. 적들의 진격에 따라 사면팔방으로 후퇴할 수 있는 요충지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사실 위령비를 세우려고 다 준비했다가 비문의 사전 발각으로 일단 계획 실천을 접게 된 일도 있다.

가파른 경사를 따라 내려오던 일행은 중간쯤에서 도당위원장 바위밑 터와 구들장도 발견하게 됐다.

그때 바위밑에서 불을 지폈던 검은 그을음이 반세기가 지났어도 아직 남아 있었다.

88이란 도당 암호이다.

이 골짝에는 위원장 터를 비롯해서 도당 각 부서와 인민위원회 터들이 있었다. 동기 공세 전에 구들장을 만들고 잣나무로 귀틀집을 사각형, 직사각형으로 짜서 틈새를 진흙으로 발라 바깥 공기를 차단시키고 지붕은 서까래를 얹어 흙을 바르고 쐐를 둘렀다.

공세 때 토벌대가 수차에 걸쳐 불을 질렀으나 지붕은 타고 통나무는 타지 않고 그을린 채로 1954년 봄까지 그 형태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는 귀틀집은 흔적조차 없고 나무와 숲만 우거져 있었다.

88터에도 잊지 못할 사연이 하나 있다.

1952년 1월 27일 정공대장이 88 보초능선에서 전투하다 다리 관통상을 입었다. 그래서 도당 위원장 비서 정태 동지, 주치의 행년 동지, 그리고 필자와 같이 조동만 대장을 보위하고 임시 땅밑 환자터에 들어가 있다가 발각돼 적들을 물리치고 3명은 살아났으나 조동만 대장은 희생되고 마는 아픔을 겪은 곳이다.

시신은 살얼음판 속에 낙엽으로 묻어주고 공세 끝나고 해동되면 다시 매장하려 했으나 이후 그곳을 가지 못했다.

그후 반세기 후 찾았으나 흔적조차 없었다(지금도 위치는 알고 있지만).

당시 정공부대는 8명으로 출발해서 공세 때 잘 싸워 100여 명의 무장대오로 발전했다.

이 정공대는 도당 산하 기관 동지들을 보위하고 보급을 해결하는 강력한 무장부대였다(부대원은 모두 도당 학생들, 군관학생, 민청학원생들이었다).

이렇게 무적을 자랑하던 부대였으나 대장이 부상으로 비트에 들어감에 따라

부부대장에게 지휘권을 위임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전투에 피로에 지친 나머지 적의 집중 공세를 예견하고 밤에 외곽으로 이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음에도 이를 어기고 날이 새자 88 능선 너머 백암골에 분산 잠복시킴으로써 1월 27일 하루 사이에 종막을 고하는 아픔도 겪었던 곳이다.

지도자나 지휘관의 역할이 그 얼마나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느꼈으며 원칙을 저버리면 어떤 결과가 오는가를 실감하게 되었다.

그 역사적 경험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이와 같은 생각을 되새겨 보면서 집결지에 시간 맞춰 도착해서 먼저 하산한 동지들과 합류했다.

우리 일행은 양지 바른 잔디에 앉아 마무리 인사를 마치고 기념 촬영한 후 상경 길에 오르게 됐다.

우리 몇 사람은 따로 남아 다른 곳 기행답사도 진행했다. 이 기행문은 다음에 쓰고자 한다.


12. 결어

이번 백운산 역사기행은 원래 9·28 후퇴 후 도당부와 빨찌산 총 사령부 산하 부대들이 활동하며 싸웠던 백아산을 돌아가기로 했었지만 시간 관계상 부득이 취소하고 섬진강변을 돌아가게 되었다. 또한 상경길에 노장들이라 피로했겠지만 역사기행의 소감들을 각자 한마디씩 남기는 시간을 갖지 못한 아쉬움도 남았다. 그러나 오랜만에 찾는 기행에서 노장들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사고나 낙오자도 없이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도 잊을 수 없다.

또한 기행을 통해 과거 빨찌산들의 어려운 역경을 짧은 시간이나마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역사현장 답사를 통해 자신들의 정신적 육체적 단련을 했음은 물론 일사불란하게 정해진 시간표대로 모든 일정을 마침으로써 단결되고 단합된 강철의 대오를 실천으로써 증명했다.

우리는 이번 기행이 이땅에서 외세를 몰아내고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조국을 자주적으로 통일할 문을 활짝 열어 준 6·15 공동선언 고수이행 관철에 우리의 운명을 걸고 남은 생을 값있게 바쳐야 한다는 다짐을 굳게 맹세하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항상 오늘의 현실을 단순히 조국분단에서 오는 비극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 분단의 원인제공자가 누구이며 왜 확고한 주체성을 확립하지 못했는가 하는 냉철한 반성과 함께 누가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도 많은 피를 흘리고 죽이고 죽임을 당해야 했던 그 처절한 역사의 경험과 교훈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이땅에서 외세를 몰아내고 간섭을 배제하지 않는 한 비극의 역사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참고@@ 이상 전남광양백운산은 전남도당의 핵심기지로서 1954년까지 빨찌산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하다 종막을 고하는 아픈 역사적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그러나 그 투쟁정신은 살아남아 오늘의 반제 반미 자주와 통일전선에 빛나고 있음을 상기하면서 백운산을 찾는 통일 일꾼들에게 대략적인 것만 기술하고 있음을 참고 하기 바란다.

2021.7/21 필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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