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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42. 나는 빨찌산 투쟁에서 영예로운 조선로동당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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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5-23 06:59 조회3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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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42. 나는 빨찌산 투쟁에서 영예로운 조선로동당원이 되었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 장기수, 통일운동가)


나는 빨찌산 투쟁에서 영예로운 조선로동당원이 되었다.

이는 1951년 3월 강계 조선로동당 제 3차 전원회의에서 화선당원제가 채택된데 따른 것이었다.

화선당원제란 원래 입당연령은 만20세 되어야 당에 입당할 연영인데 이를 2살낮추어 만 18세면 입당연령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입당연령을 2살 낮추었는가이다.

조국 전쟁시기에 투쟁에서 아무리 용감하게 잘 싸워도 당원이 되지 못하고 희생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실제 투쟁에서 당원된 동무들보다 잘 싸우고 있어도 연령미달로 당원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로동당원이 되는 것은 일생 동안 투쟁의 보람과 영예로 생각해서 당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투쟁하는 모습을 직접보기도 했다.

재산시 다른 도는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전남도당은 재빨리 우리 중앙당 3차 전원회의 결과를 삐삐통신을 통해 입수하고, 당시 잘 싸운 동무들이 당원이 될 자격을 갖추었어도 연령미달 때문에 당원이 못되고 희생되는 안타까움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만18세 되는 동무들 중 입당 자격이 있는 동무들을 가려 입당 수속 절차를 1952년 가을부터 밟기 시작했다. 이 수속도 적들의 침공이 잦을 때는 할 수 없었고 빈 공간을 통해 수속절차를 시행했다.

당시 필자는 지리산 전투지구당부에 있을 때였다.

당시 지구당위원장인 박찬봉동지로부터 필자에게 당에 가입신청서를 내야한다고 하면서 우선 본인의 이력서 한통을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고 쓰는 중 적들의 침공이 잦아 마음 편안히 쓸 수 없어 틈틈이 조금씩 노트에 초안을 잡아오는 와중에 1952년을 보내고 1953년을 맞이했다.

1953년 1월에 지구당 산하 모든 단체 성원들이 광양백운산 전남도당부로 소환당하여 백운산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백운산 88도당부에 와서 도당지도부 집단보위대인 “88건위대”가 조직되어 들어가 투쟁하게 되었다. 88건위대는 1개 중대로서 부대장 참모장 정치위원 강사 중대장 대원들로 조직되었다.

88건위대에 당원은 간부들 외에는 대원중에 구빨찌산 출신 한 명뿐이었다. 대원들 모두 나보다 2살 이상인데 그 때까지도 당원은 못되고 있었다.

필자는 다시 입당 절차를 밟으라는 정치위원동지의 지시가 내려왔다. 그래서 이력서를 작성하고 당원의 생활준칙을 공부하고 다 암기했다.

드디어 적들의 침공을 피하며 투쟁하는 과정에 3월 5일에 입당하게 되었다.

보증인 두분은 중대장 권영용동지와 강사인 리영원 동지였다. 지리산에 있을 때는 지구당위원장인 박찬봉동지께서 보증을 서 주겠다고 했으나 제 5지구당 유격지도부장으로 이동함에 따라 서지 못하게 되었다.

부대당조직위원회에 이미 접수 되었으나 당조직위원회에서 비준이 나야 정식 당원이 되는 것이었는데 적들의 침공에 의해 날짜만 가고 회의를 열 기회가 여간 나지 않았기 때문에 늦춰졌다.

드디어 4월 15일에 백운산 옥용골의 선지골에 진지를 잡고 있을 때였다.

당조직위원회에서 토론과 질문들이 있은 다음 결론은 당시 도당위원장인 김선우 동지께서 내려주었다. 출신성분은 “빈농“이고 ”사회성분”은 빨찌산이었다. 전남 도당부 산하에서 영예로운 빨찌산 성분을 가진 동무는 필자와 김이호 두 사람뿐이었다.

김이호는 광양인민위원장 아들로서 구빨찌였다. 1954년 2/20일 옥용골 전투에서 생포되었다 징역5년을 받고 김천 소년감옥에서 만났다. 이 때 교무과 전향공작반에 매수되어 생활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출옥후에는 그연줄로 미국에 갔다는 말만 듣고 있을 뿐이다. 김이호는 백운산 동기공세 때 생포되었으나 그들의 허술한 틈을 타 원능선에서 탈출에 성공한 용사였었다. 물론 부친은 백운산에서 희생을 당하였다.

필자가 체포된 후 대내 밀고자에 의해서 조선로동당원이 되고 빨찌산 성분을 가진 모범전투대원임이 사형언도를 받는 사항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합법적인 생활속에서는 후보당원을 거쳐 정식 당원이 되지만 빨찌산 투쟁속에서는 후보당원제가 없었다. 소년단생활과 민청 생활 단계를 거쳐 입당할 수 있는 것도 합법적인 길로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1953-54년도에 빨찌산 투쟁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을 오래살고 비전향으로 자기 혁명적 지조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살아 생존한 사람은 필자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도 조선로동당 당원된 영예감을 잊지 않고 항상 되새기면서 투쟁하고 있다. 감옥에서 비전향을 고수한 동지들은 사업은 정지되었어도 당적생활은 그대로 존속한다고 하며, 남은 것은 재심사를 거쳐 등록하면 된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


2021년 5월 17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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