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36. 제5지구당 결성과 해체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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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3-13 16:34 조회1,14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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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39
제5지구당 결성과 해체에 관하여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 장기수, 통일운동가)
제 5지구당은 전남도당, 전북도당, 경남도당 등을 중앙당을 대신해 지도하는 지구당을 말한다.
이는 1951년 5월 덕유산 솔치골에서 6개도당 위원장 회의에서 결정했으나 적들의 대대적인 동기 공세로 말미암아 결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공세가 끝난 후 숨 돌릴 여유의 시간을 가진 1952년 10월 초순에야 결성을 보게 되었다.
원래 지구당 건설은 빨찌산 비합법적 투쟁체계에서 모든 지형지세를 감안하여 결성하고 모든 투쟁을 조직지도 하는 비합법적인 조직체계인 것이다.
조국전쟁 전에도 전남도는 몇 개의 지구로 나눠 도지구당 군지구당 등을 두고 투쟁했던 경험도 있다. 1950년 9.28 후퇴 후도 지구당을 결성해 투쟁을 조직지도했었다.
참고로 덕유산 송치골 6개 도당희의에서 중요하게 토의된 안건이 남부군 창설문제와 지구당 결성문제였다.
남부군 창설은 당시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판명된 리승엽의 지도하에서 결성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남조선 모든 조직투쟁은 박헌영 리승엽도당이 직접적인 책임을 지고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부군 결성문제 토의에서 전남도당 박영발위원장 동지만은 반대하여 남부군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빨찌산 무장부대는 당의 군대로서 당사업보장을 위해 투쟁해야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5지구당은 어떤 과정을 통해 결성되었는가
1952년 적들의 대대적인 동기 공세가 3월에 일차로 끝났다.
그리하여 지리산 뱀사골 이현상 동지 아지트에서 회의를 가졌는데 이현상동지, 당시 경남도당위원장인 김삼홍동지,전남도당 박영발동지, 전북도당 조병화 부위원장 동지, 전남도당 지리산 전투지구당 위원장 박찬봉동지 등이 참석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회의에서 1950년 9.28후퇴 후 적들의 대대적인 제1차공세가 끝날 때까지 투쟁총화를 가진 후 제5지구당 결성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필자는 박찬봉동지를 보위하고 3개 도당위원장 회의에 참여했었다.
당시 동기공세가 끝난 후 전남도당에서 새로 지리산 전남도당 전투지구당부가 결성되어 박찬봉동지가 지구당 위원장이었기 때문에 백운산에 동기공세를 겪고 1952년 4월에 지리산에 들어가 첫 번째로 지리산 빗점골에 아지트를 쓰고 있는 이현상 동지를 처음 뵙게 되었다.
이 총화에서 이현상동지가 비판을 받기도 했었다.
그것은 1951년 적들의 대대적인 동기 공세 때 지리산 대성골 전투에서 이현상부대 주력과 경남도당이 전폐되는 희생을 당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항일 빨찌산 투쟁 전술을 적용하지 않고 대부대 반정기작전과 토목화 작전을 주로하여 위생력량을 너무도 많이 소모했기 때문이다. 당시 아지트 주위에서 보초를 서고 있을 때 논쟁과 토론하는 목소리가 다 들리기도 했었다. 이번 회의 기간은 일주일간이었다.
공세가 끝난 직후 대성골 전투에서 살아남은 부대 성원 중 여순 14연대 출신을 주력으로 부대를 편성해 중앙당에 선을 대기 위하여 육로로 파견했으나 결국 태백산맥을 돌파하지 못하고 희생을 보았다는 소식을 그후에 듣게 되었고, 전남도당에서도 인민위 선전부장을 중심으로 5명을 국군복장을 해서 파견했으나 이마저도 성공하지 못하고 실폐를 본 경험을 상기시킨다. 그만큼 분단장벽을 육로로 뚫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남조선 사지에서 중앙당과 선을 대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끝내 선을 대지 못하고 종막을 고하는 아픈 역사의 남기고 말았다.
왜 중앙당과의 선을 대려고 했는가?
중앙당 지시문을 삐삐통신으로 다 들을 수는 있어도 남쪽의 빨찌산 투쟁의 현실적인 투쟁보고는 서로가 암호를 정해야 통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안타까움을 안고 투쟁한다는 것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제 5지구당 위원장은 이현상동지, 상임부위원장은 박영발동지, 조직부장은 조병화동지, 유격지도부장은 박찬봉 동지였던 것까지만 기억하고 있다. 선전부장동지와 기요과 연락부 동지들의 이름은 미상이다. 이렇게 제 5지구당이 결성되어 중앙당과 선 연결을 갖지 못하는 조건에서 지구당은 중앙당과 같은 역할을 다 하였다.
조성되고 있는 국내외 정세속에서 투쟁 계획과 조직은 삐삐통신을 통한 중앙당의 지시문에 입각하여 조직지도 사업을 전개 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무장 유격투쟁도 1952년부터는 항일 발찌산 투쟁전술을 공부하고 익히면서 투쟁했었다. 전과도 많이 올렸다. 영웅 용사들이 많이 배출되기도 했다.
제 5지구당 결성후 전과도 많이 있었으나 원칙을 망각한 피해도 있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임을 상기시킨다. 이는 제5지구당 투쟁뿐만이 아니라 남조선 빨찌산 전체 투쟁에서도 마찬가지였음을 역사적인 교훈으로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왜 제 5지구당은 해체의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는가.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53년 8월에 미제의 고용간첩인 박헌영 리승엽 도당들의 반혁명적 반역행위가 발각되어 합법적인 조사와 재판절차에 의한 단죄가 이루어진 후 중앙당과 공식적인 선 연결을 갖지 못한 조건에서 지시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자체 조직위를 열어 지구당을 해체하고 이현상동지를 비롯한 5명이 자진해서 평당원으로 되는 조직위 결정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 이유는 남조선 모든 투쟁은 박헌영과 리승엽이 책임지고 조직 지도 했기 때문에 그의 사상적인 영향을 받음이 없는가를 자아반성해보는 시간을 가져 본다는 의미에서였다. 그래서 각 당 기관 할 것 없이 비판사업을 대대적으로 벌리기도 했다.
이 비판사업을 통해 뜨거운 동지애와 조직적 사상적 단결력을 더욱 확고하게 제고시켰던 것이다. 어떠한 동요나 주저 당황함도 전혀 없었다. 우리는 선각자의 말씀 중에 최후의 승리 5분전까지도 혁명을 배반하는 변절분자가 나온다는 것을 항상 상기하고 투쟁했기 때문에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분발하여 투쟁의식과 사상의식을 좀먹는 행위나 발언에 대해서는 추호도 용납을 하지 않고 오로지 미제를 비롯한 16개 침략군을 물리치고 자주적인 조국통일 독립 투쟁에서 최후의 피한방울까지 바쳐 투쟁하겠다는 투지뿐이었었다.
참고 @ 해체된 후에 안 일이지만 중앙당에서는 제 5지구당을 해체하지 말고 그대로 존속해 투쟁하라는 지시 서류를 가지고 온 연락원이 먼저 적의 손을 거쳐 전북도당으로 잠입 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전북도당에서는 조사기간을 갖는 가운데 조사가 마무리되기 전에 이미 5지구당은 해체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왜 전북도당은 상급당부인 5지구당에 보고도 하지 않았는가의 의문점이 아직도 남아 있다.
2021년 3월 12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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