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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34. 빨찌산 투쟁에서 잠자리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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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3-02 10:25 조회3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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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34.

빨찌산 투쟁에서 잠자리에 관하여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빨찌산 투쟁에서 잠자리에 관하여

빨찌산 투쟁에서 땅에 등을 붙이고 발을 펴고 잠을 잔 세월은 그리 많지 않다.

입산초기에 산간마을 구들장 위에서 옷을 입은 채 일주 정도 잠을 잤다. 침공한 적들은 우리가 진지로 활용하고 있다고 판단한 곳은 무조건 소각하고, 살던 인민들은 반항하면 쏘아죽이고 남은 인민들은 소개시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다. 그래서 타버린 집터 위에 일시적인 움막을 치고 구들에 불을 지펴 구들장 위에서 입은 채로 자기도 한 것이다.

적들이 침공해 또 불을 지른다. 그러면 산상 대기했다가 적들이 빠지면 타버린 집터 그 자리에 또 움막을 치곤 했다. 이와 같은 날이 계속된다.

해가 지날수록 더 산속 깊이 들어가게 된다. 그래도 1951년 봄까지 유격지구에 속했던 산간마을들에 반해방구를 쓰고 투쟁할 때까지는 적들이 침공해 들어 올 때는 산상대기 했다가 적들이 빠지면 다시 내려와 구들장을 이용했다.

1951년 여름부터는 적들의 침공이 잦고 산고지와 능선에 주둔하면서 일정한 기간 소위 토벌작전을 펼칠 때는 언제 아지트를 만들어 놓고 쓸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적정에 따라 이동하면서 임시 진지를 만들어 텐트를 치고 그안에서 밤을 샌다. 이것도 밤에 기습 맞을 우려가 없고 적들에게 노출되지 않았을 때이다.

앞뒤 능선에 적이 주둔하고 있을 때는 그안 골짝의 지점에 노출되지 않고 불빛 때문에 밥도 해먹을 수 없을 때가 많다. 그 때는 생쌀을 씹어야하고 총을 든채 눈을 붙여야 했다.

1951년 적들의 대대적인 제 1차 대공세 때 유치내산에서 백운산으로 이동해 들어오자 백운산 용지동 골에서 한 보름간 공세를 맞고 있었다. 앞서간 전우들이 썼던 아지트는 남아 있기에 그 자리에 등을 붙이고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러나 매일 밤 산동지들이 한자리에 자고 난 후 그 자리에 다시 살아 돌아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전우들이 날이 갈수록 줄어 들고 있었다. 공세가 잠시 끝나 백운산 도당 핵심기지에 들어가서도 매 마찬가지였다.

1952년 제1차 동기공세가 잠시 끝난 후 지리산 문수골에 아지트를 쓰고 있을 때는 잠시 구들장트위에 천막을 치고 그안에서 밤을 샜다. 이도 수풀이 우거진 7-8월 한 때다. 그후 피아골 대수골 문수골 등을 이동하면서 적정에 따라 많이 써야 한 1주정도 한자리에 쓰고 계속 개미체바퀴 돌듯 하루씩 쓰고 이동해 갔다. 때로는 과거 썼던 아지트나 새잠자리를 만들어 천막을 치고 자기도 했다.

이것도 좋은 상황에서이다. 그러나 밤에 적의 기습은 한번도 당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부대나 다른 지역 부대들은 적의 기습작전에 많은 동지들의 희생을 보기도 했다. 특히 생포자들을 적들이 소위 사찰유격대 또는 보아라 부대를 조직하여 이용당하는 와중에 그들은 과거 한 때 같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투쟁했기 때문에 지형지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들이 우리가 다니는 통로에 매복하거나 소조로 들어와 정탐을 해 발견되는 부대는 적들의 야간 또는 주간기습에서 많은 전우들이 피해를 보기도 했다.

특히 겨울철을 맞이하여 적들의 공세 속에 고지능선을 밤낮 장악하고 토벌작전을 펼칠 때는 땅에 등을 붙여본 적이 없다.

그럴 때는 천막을 칠 수도 없었다. 천막을 짊어진 동무가 전사 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배낭에 넣어 바위 밑에 비장한 천막을 생포자가 가르켜 주어 적들에게 뺏기는 일도 있었다. 그러니 천막을 칠 수 있는 조건이 되어도 못치고 낙엽을 긁어 모아 그 속에 총든 채로 밤을 새기도 했다.

담요는 로획한 국방색 담요였으나 이것도 짊어진 배낭을 비장했다가 뺏기지 않았을 때이고 짊어진 동무가 살아 같이 있을 때에 한해서이다.

아지트에 진지를 구축하고 며칠이라도 있을 때는 트 가운데 횡선으로 땅을 로획한 공병삽으로 파고 빙 둘러 돌을 세우고 그 안에 불을 지핀다. 다 타버린 숯이 남고 돌이 열을 받는다. 그위 납작돌을 덮고 그위에 나뭇가지를 깔고 그위에 국방색 담요 한 장을 깔고 그위에 서로 발맞춰 누워서 다리를 얹는데 여러 동무들이라 다리가 포개어 진다.

맨 아래 들어간 다리는 뜨거워 오래 지속할 수 없다. 그래서 다리들이 포개진 속에서 아래 있는 다리가 위로 올라오기가 반복된다. 이러다 보니 잠을 설치기도 한다.

여성동무들도 마지막에는 한 부대에 2-3명정도 살아 같이 투쟁했었다.남자동무들 사이에 끼여 자기도 했었다 그러나 불만을 들어 본적이 없다.

매 동무마다 담요 한 장씩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1953년 적들의 대대적인 동기 공세 때도 그렇게 마지막 백운산에서 1954년 2월까지 겪으며 지냈다.

이러한 고난에 가득찬 투쟁속에서도 불편불만을 가진 동무는 한사람도 없었다. 왜냐면 위기에 처한 조국과 인민을 위한 투쟁속에서 사랑도 청춘도 생명까지도 다 바쳐 싸우는 투쟁이기 때문에 당연지사로 생각했었다.

2021년 2/27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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