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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31. 빨찌산 투쟁에서 희생된 동지들을 어떻게 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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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2-10 18:46 조회9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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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31.

빨찌산 투쟁에서 희생된 동지들을 어떻게 하였는가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 장기수, 통일운동가)


1951여름까지는 적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희생된 동지들의 추모제를 올리고 시신은 그대로 산속에 묻고 돌맹이들로 수북이 쌓아 올렸다. 그리고 추도가는 “산에 나는 가마귀야 시체보고 울지마라”는 노래로 대신했다.

적들의 공세가 잦고 전투 중 희생된 동지를 구출할 수 없어 그냥 후퇴하는 불가피한 상황이 되풀이되기도 했었다.

적들은 희생된 동지들의 목을 베어가거나 귀나 코를 베어가기도 했다. 특히 야간 행군에서 적들의 포위망을 뚫고 신속하게 빠져나가다 희생된 동지들을 구출하지 못하고 그냥 시간관계상 지체할 수 없어 후퇴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했었다.

그냥 두고 가는 마음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지만 살아남은 동지들의 보존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때로는 적들과 싸움에서 주둔처를 벗어나기 위한 야간 행군중 매복지점을 무사히 통과하기 위하여 지름길을 택했다가 적들의 매복에 걸려 희생된 동지들도 있었다.

5-60m 뒤따라오다 적들의 총탄에 배를 맞아 창자가 쏟아져 나온 동지를 구출할 수 없어 결국 두고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마음은 희생된 동지들 보다 자신들이 어떻게 하면 무사히 진지까지 도달하느냐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53년 9월에 야지에 나가 잠복했다가 보급 사업을 마치고 진지로 들어오는 길에서 필자가 선두에서 부대를 이끌고 들어오다 매복 지점임을 생각하고 최고의 경각성을 높이며 재를 넘는데 3m지점에서 돌맹이를 먼저 던지고 격발기를 자그닥하니까 적의 잠복소조는 수류탄 던지는 줄 알고 먼저 사격을 가하였다. 그곳을 향해 따발총을 발사하며 돌격소리와 함께 재에 도달하니 적은 패주하고 말았는데 우리부대 3중대 정치지도원 김광열 동지가 적의 유탄에 배를 맞아 창자가 나오는 중상을 당하였다.

이 때 동지를 위해 언제 마을까지 가서 가마니를 보급할 수도, 맨손으로 구원할 수도 없었다. 시간의 촉박성 때문에 어떻게 구출해 보려고 백방으로 고민 중에 아직 정신은 멀쩡한 광열 지도원동무는 “나 하나 때문에 부대에 피해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어서 빨리 나를 쏟고 가라”고 간곡히 호소하는 것을 보고 부대장은 눈물을 머금고 잠재우고 시신은 숲속의 낙엽을 긁어 덮어주고 진지를 향해 달려갔다. 이런 상황의 연속 속에서 투쟁했기 때문에 그저 보통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후 인민 정보수집에서 나무꾼들이 시체 썩는 냄새가 나서 확인한 후 경찰에 신고해 시신을 확인한 후 그대로 묻히었다는 소식만 듣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나를 비롯한 어떤 동지가 희생되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였고, 그것은 당시 투쟁하는 동지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적들의 포위속에서 산더미처럼 쓰러져 희생된 그 자리에서 한줌의 흙으로 산화하여 간 동지들이 아마도 전체의 99점 99프로는 될 것이다.

그래서 적정에 따라 골짝 능선을 넘나들며 하루밤 진지에서 밤을 새우면서 밥을 해먹기 위해 불쏘시개 나무를 하는 동안에 소능선 중간에 쓰러져 있는 동지를 발견하는 일도 있었고, 목이타서 골짝물에 엎드려서 흘러가는 물에 얼굴을 대고 물을 마신후 주위를 살펴보니 희생된 동지의 시신이 물에 잠겨있는 것을 보는 것도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1952년 2월에 백운산 따리봉 밑에서 희생된 전남도당 부위원장인 인철 동지 시신은 적들이 생포자를 통하여 누구의 시신임을 알고 목을 베고는 국방색담요로 싸서 배낭에 넣어 한재에서 상봉으로 가는 첫 고지인 민세등에 놔두고 갔다. 공세가 끝난 다음 4월에 저들이 버린 실탄을 주으려고 민새등에 올랐다가 그 배낭을 발견하고는 있는 시신을 원시신에 머리를 각목으로 붙여 매장했는데 매장한 동지가 희생되어 그 위치를 찾지도 못하고 있다.

1954년 2월 적들의 마지막 공세 때 옥용골에서 희생된 전남부대 정치위원 양순기 동지와 중상을 입고 지하아지트에서 치료를 받다 발각되어 자결한 전남도당 부위원장 염형기동지등을 목을 베어 담요로 싸서는 광양읍 연대 주둔지 까지 갖다 놓고 생포된 동지들에게 한번 보라고 강요한 것이 적들의 만행이었다.

또한 남쪽 땅 산야에서 희생된 그 많은 시신들을 민간 단방특효약으로 시신을 훼손하거나 대학 의학도들의 해부용으로 활용했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민족해방 투쟁사에서 살아 있는 동지들의 손을 거쳐 묻힌 혁명 열사들은 그래도 행복한 죽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이름없이 쓰러져 간 동지들을 생각할 때 너무도 죄스런 맘을 금할 수 없다. 그래도 내가 살아 있기에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만으로 죄스런 맘에 마지막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철전지 원쑤인 미제를 구축하는 투쟁에 마지막 생을 바쳐 투쟁할 것을 먼저간 혁명열사들에게 굳게 굳게 다짐하면서 길이길이 영생을 기원한다.

2021년 2월 11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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