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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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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1-01-30 12:50 조회8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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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30

빨찌산생활에서 남녀 애정에 관하여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사람이 사는 곳에는 남녀가 있고 남녀가 있는 곳에는 사랑이 있다.

빨찌산도 사람이다. 따라서 남녀 애정관계도 일반사회 생활하는 사람과 같다.

단 일반사람들 중 부조리한 사회의 모순을 먼저 깨달은 선각자들이란 차이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빨찌산 투쟁하는 사람들 간에도 확고한 투쟁의식의 차이는 천차만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각자가 처한 환경과 조건은 강약의 차이는 있어도 이땅에 점령군으로 들어온 미제국주의 자들을 구축하고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여 부강한 자주국가를 건설하여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평등한 세상을 구가하기 위해서 한 목숨 바쳐 투쟁하는 목적은 같기 때문에 함께 투쟁하는 것이다.

투쟁전선에 나선 사람들은 먼저 추구하는 세상에 대한 리론을 터득하고 나온 사람도 있지만 자기가 처한 사회제도속에서 계급적 이해관계에 결부된 압박과 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빨찌산 투쟁은 생사를 건 판가리 싸움이기 때문에 입산 초기에는 적들의 살인 강간 방화 약탈을 피하기 위해서 피난민을 포함해서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산골 민간마을에 붐을 이루고 있었다. 그 중에 각당 산하 기관 동무들이 집단으로 생활하며 투쟁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환경조건이었다.

날이 갈수록 정세전망에 따라 입산자들의 내부정리가 되어가고 적들의 대대적인 공세에 따라 전사하고 체포되는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이에 빨찌산 투쟁체계도 재정비되고 투쟁의식도 한층 높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랜세월 함께 투쟁하다 보니 남녀 사랑도 갖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남녀가 더불어 생활하는 과정에서 갖는 애정은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것이지만 단 전제되는 것은 투쟁에 지장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녀관계가 애정에 몰두하다 보면 그 결과 자기가 속한 조직에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함은 당연하다.

그래서 피해 결과에 따라 조직규율 위반으로 처벌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처벌을 받을 때 뼈아픈 자기비판을 하고 투쟁 속에서 잘못을 시정하는 과정을 거쳐 인정을 받으면 원상복귀 된다. 그러나 시정과정이 길어지는 동무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 동지를 해치고 달아나는 분자도 있었다.

남녀의 사랑은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속에서 이성을 사랑해야지 이성의 사랑속에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위와 같은 원칙을 지키면 자연스런 이성간의 사랑은 아름다운 미덕일 것이다.

항시 적들의 포화속에서 투쟁하는 대다수 전사들은 이성의 사랑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의 시간을 갖기 어렵고 오로지 이를 접고 동지적 뜨거운 사랑을 투쟁속에서 발현시키는 동지들의 확고한 투지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모래사장에 모래알 하나일 수밖에 없는 과오를 범한 동무들 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몇가지 사례를 들면 아래와 같다.

1) 1951년 전남 지리산 부대장이었던 오신택은 적들의 대대적인 동기 공세 때 전투부대와 함께 투쟁하지 않고 지하비트에서 여성동무와 같이 피신하였다. 이로 인하여 부대가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1차 적들의 공세가 끝났을 때 소수 몇십명만 살아 남는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래서 당시 도당 조직위원회에서 책벌을 받고 봉두산 연락분트 책임을 지고 갔었는데 끝까지 투쟁속에서 자기과오를 청산하지 못하고 적들에게 투항해 봉두산 연락분트를 유지못하는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2) 순천군당 위원장이었던 서정섭은 여성동무와 함께 발각될 우려를 느낀 나머지 적들에게 자수하여 군당조직을 파괴하는 피해를 남기고 말았다.

3) 그 후임으로 내려갔던 남상훈은 여성관계로 도당에서 소환을 하는데 도당부위원장 염형기동지가 직접 용기골 순천군당에 내려가서 같이 동행하여 옥용골 88도당아지트까지 오는 과정에 도슬봉 바로 밑에 샘이 있어 잠간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 눈치를 채고 소환되면 위험하다 생각하고 자기가 소지한 칼빙총을 발사하여 보위병은 즉사하고 부위원장은 중상을 입히고 달아나는 끔찍한 피해를 남기고 말았다.

4) 우리 전남부대는 1953년도 6월부터는 부대장인 리봉삼동지 이름을 따 리봉삼부대라 지칭했다. 리봉삼부대장도 엄00여성동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도당부나 우리 성원들도 다 알고 있었는데 리봉삼 부대장동지는 평소에 용감하게 전투지휘도 잘 하여 선두에서 대원들과도 잘 어울리고 선망의 부대장이란 호평까지 받을 정도로 잘 싸웠으나 남녀사랑에 너무 빠지다 보니 사업 나가서 애인에게 줄 선물을 보급하려고 진격하다가 이주일 전투대원이 적들의 매복에 걸려 부상 생포당하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었다.

부대당 조직위원회에서 필자는 당시 부대당 서기로 선출된 상황에서 부대원을 대표해 부대장의 과오 행적을 비판했었다.

결국 책벌을 결정해 도당지도부 보위대원으로 투쟁을 통해 범한 과오를 청산하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그후 일개월이 지난 후 참모장이 부대장을 하는데 그렇게 사기 왕성하여 잘 싸우던 부대가 사기가 떨어저 투쟁에서 동지를 희생시키고 위축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더구나 필자는 8/14일 옥용골 기습전에서 지뢰 50여발을 맞고 의무과 치료를 받고 있는 상황에 있었다

그래서 부상상처가 아물지 않아 붕대를 감고 만류에도 불구하고 투쟁에 동원되기도 하는 과정에 도당위원장이었던 김선우동지에 편지를 써서 리봉삼 부대장을 다시 돌려보내달고 요구했다. 도당위원장은 부대 현 실정을 요해하고 부대장을 원상복귀 시켰다.

부대장은 복귀후 고맙다는 인사말과 함께 마지막 생을 다할 때까지 사기 충천해 잘 싸웠다. 리봉삼 부대장은 우리 소조를 이끌고 경남 남해 모지서를 습격하고 등사기와 칼빙총을 회수해서 하동 섬진강을 노를 저어 건너오는 데 적들의 사격을 방어하는 가운데 노를 젓던 부대원이 허벅다리 관통상을 입으면서 강가 쐐풀에 접근했을 때 이제 다 왔다 하면서 배에서 뛰어내렸다가 물살에 휩싸여 익사하고 마는 아픈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이때가 1953년 8/29일이다. 그 후 정보수집을 통해 익사했음을 확인했다.

사실 강가 쐐풀우거진 곳도 깊은데 아마 흥분한 나머지 칼빈총 2개를 매고 희생되고 만 것이다. 이와 같이 평소에도 잘 싸웠지만 과오를 씻기 위해 용감하게 투쟁했던 리봉삼동지 이름을 따서 백운산 진상골 잣나무 부대 아지트를 리봉삼트라고 명명해 오늘에 이르기 까지 기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도 유격지구에서 있었던 것은 차치하고 우리 전남 빨찌산 투쟁에서 있었던 남녀애정관계에 대해서 필자가 지켜보고 안 몇 사례의 기록을 남기면서 이성간의 사랑은 항상 “내조국과 인민을 사랑하는 그속에서 이성간의 사랑이 이루워져야 한다“는 말을 우리 함께 유념하기 바란다.

2021. 2/1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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