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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21. 지리산 지초봉 전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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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12-22 08:40 조회1,0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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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선생은 이번 글에서 지리산 지초봉 전투를 회고하며, 전투 가운데 지휘관의 잘못된 상황판단과 결정이 얼마나 엄중한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관하여 회고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과거를 회고한다 21.

지리산 지초봉 전투에서



김영승 선생 (비전향 장기수, 통일운동가)


조국전쟁이 한창일 때인 1952년 8월 중순경이다.

지초봉은 노고단 시암재에서 광의면 쪽으로 뻗은 능선의 마지막 봉우리다.

이 능선을 중심으로 천암사골 능선을 넘어가면 산동면 골짜기다.

여느때와 같이 지리산 대소골 돼지령 중턱에 아지트를 쓰고 있을 때다.

전남도당 지리산 전투 지구당부 산하 지리산부대는 구례군 광의면으로 보급 사업을 나갔다.

당시 나는 지구당부에 있었다. 항상 보급사업 나갈 때는 거의 빠지지 않고 나갔다.

나가서도 무장부대 엄호하에 보급부대 동지들과 같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무장부대와 같이 행동했다. 그래서 부대 동지들은 내가 나가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었다. 그것은 적들과 부닥칠 때 함께 선두에서 싸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부대장은 1소대 소대장으로 임명해 줄 것을 지구당 위원장에게 제의하기도 했었다. 나는 부대로 나가 싸우고 싶은데 당부 동지들이 나가면 지도부를 보위할 동지가 없다는 이유로 성사되지는 못했으나 기회가 있을 때는 항상 무장부대와 함께 했었다.

이날도 구례 광의면으로 보급을 나갔으나 적의 중도 매복에 걸려 본기지로 돌아오지 못하고 지초봉 중터리 길에서 날을 새었다. 하루 더 잠복하고 보급대상지를 새로 선정해서 보급투쟁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튿날 새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날이 새자 비가 조금 그치어 아침밥을 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마침 중초선에서 총소리가 울리었다.

우리 중초나간 동지가 우리 발자국을 따라 오는 적병을 향해 먼저 발사했던 것이다.

총소리를 듣고 부랴부랴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 찰라 나는 중초선에 달려가 m원총을 쏘았는데 약실에 물이 들어가 탄피가 튀어나오지 않고 막혀버렸다. 이 때의 심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뒤로 돌아서 준비한 철사로 쑤셔서 탄피를 빼고 약실을 준비한 헝겊으로 닦아 드디어 실탄을 장전하고 쏘니 정상이었다.

이때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부대를 안전지대까지 무사히 후퇴시키는 일이었다.

이 때 우리 앞 능선에 한 개 중대가 새까맣게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적들이 우리 후퇴로를 먼저 점령하면 최후 판가리 싸움을 해야하는 위급한 상황이 초래되었다.

이때 부대장동지에게 대원 한명만 부쳐주면 먼저 달려가 적들의 차단을 막아내겠다고 했다. 그래서 2소대장과 함께 둘이서 죽을 힘을 다하여 달려가 간발의 차이로 먼저 고지를 점령하고 적을 향해 발사했다.

그러자 본부대는 싸우고 있다가 우리의 총소리를 듣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고지에는 1중대장 동지와 1소대장 동지가 도착해서 4명이 방어작전을 펼쳤다. 본부대는 위험지대를 벗어났다. 이제 우리 4명은 어떻게 안전하게 후퇴하느냐가 문제였다. 1중대장 이선중(인민군 출신)동지는 바로 뒤 고지로 후퇴해야 한다고 했다.

후퇴 길은 얼마 안 되지만 적들의 직탄거리에 노출된 상태속에서 희생만을 자아내니 좀 멀더라도 중어리길을 타고 후퇴해야 안전하다고 내가 말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중대장 명령대로 나와 같이 먼저 달려왔던 2소대장(인민군출신)이 뒷 고지로 후퇴하다가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총이라도 건지려고 시도했으나 위험해 건지지도 못하고 말았다.

두 번째로 중대장동지가 후퇴하다 오른 팔 골절상을 입었다. 세 번째로 1소대장이 후퇴하다 궁둥이 관통상을 입고 말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적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중어리길을 타야 무사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 세명은 중어리 길을 돌아 무사히 본부대와 합류했다. 그런데 본부대 성원 중 한 명이 후퇴길에 우리 전투상황을 본다고 만류에도 불구하고 능선 너머로 고개를 들고 보다가 적의 탄환에 명중해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2명 희생 일명 중상 1명 경상의 피해를 입고 말았다.

본부대는 노고단 시암재 까지 후퇴한 후 집결하여 본기지로 들어가고 우리 3명만 남아 적들이 후퇴하는 것을 보고 소대장동지 희생지를 찾았다. 적들은 m원과 목을 짤라 가는 만행을 자행했다.

당시 적들은 빨찌산을 죽이던가 생포하면 훈장을 타기 때문에 전과를 부풀려서 보고하기 위해 목이나 귀 코를 베어오라고 하였다.

1952년 지리산 빨찌산 투쟁은 보급문제 해결이 제일 어려웠다. 그리고 가는 통로 여기저기에 매복전을 펴고 있어 저녁에는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산다는 말이 현실이었다.

매달 희생자 통계를 내는데 제일 많이 희생되었던 때가 23명의 동지들이었다. 이 동지들은 적구병으로 나간 희생자들이다. 당시 식량문제 해결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는 “식량문제 해결은 조국을 위한 투쟁이다”라는 구호 까지 부를 정도 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적구병을 안서려고 머리가 아프다 꾀병을 부리는 대원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투철한 혁명의식을 갖지 않고는 주어진 난관을 헤쳐나갈 수 없는 처절한 싸움이었다.

위원장 동지는 지초봉 전투소식을 보고받고 탄식하면서 얼마나 마음아파하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부대 총화에서 김영승의 말을 듣지 않은 결과로 희생을 당했다고 지적했다.

그후로는 투쟁에서 내 말발이 조금 서기도 했었다.


지초봉 답사는 한도숙 동지와 딱 한번 했다.

지금도 지리산 지초봉에서 희생된 동지들을 잊을 수 없어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2020. 12/21.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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