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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19. 나는 왜 빨찌산이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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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12-17 08:38 조회7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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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 김영승 선생은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무엇 때문에 입산하여 4년여 기간 동안 빨찌산 투쟁을 하는 동안 하산하지 않고 남아서 무수한 죽을 고비를 넘기다 총상으로 중상을 입고 포로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후 비전향장기수로 35년을 복역하는 삶을 살게 되었는지 그 입산 동기를 밝힌다. [민족통신 편집실]


과거를 회고한다 19

나는 왜 빨찌산이 되었는가

김영승 선생 (비전향 장기수, 통일운동가)


1) 고향의 봄

나는 1935년 8월 7일 전남 영광군 묘량면 삼학리 신성 마을 235번지에서 7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고향마을은 빨찌산 투쟁의 전적지의 하나인 불갑산 정기 타고 뻗어내린 안개봉우리 기슭에 자리 잡은 아담한 마을이었다.

마을 어귀에는 마을의 안전과 평화를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지금도 당산나무가 고목되어 지켜보고 있다.

마을 앞 국도는 광주에서 영광읍으로 통하는 직선도로가 나 있다.

마을에는 16가구가 살고 있었다.

청년들은 20여명이 살고 있었지만 무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사회가 낳은 가난의 결과였다.

마을 사람들의 구성 면에서 땅 부자인 홍가네 지주가 살고 있었으며 부친은 지주인 홍가네 집에서 20여년 머슴살이에서 얻은 10여마지기의 소작지를 일구면서 살아 온 빈농이었다.

식구는 10여식구의 대가족이었기 때문에 일년 농사를 지어도 보리고개를 넘기는 데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어야만 했던 빈곤한 생활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사실 1950년 전쟁 날 당시까지 고무신 한컬레도 신어보지 못하고 집신을 삼아 신던가 맨발로 10리 20리 학교를 다녔으며 양복은 중학교 다닐 때 무명배로 여름 옷 한 벌이 전부였고 나의 누이동생은 펜티도 없이 검은 통치마로 일년을 입고 사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학교는 만 5년밖에 다니지 못했고 서당을 3년 다녔다. 이 과정에 1950년 전쟁이 일어나 7/23일 인민군대의 점령으로 해방을 맞이했었다.

2) 반일 의식이 싹튼 계기

일제 말 10살 때 큰형님이 유언비어로 몰려 일경에 체포돼 지서, 경찰서, 목포감옥, 대구감옥, 마지막 평양감옥에서 8.15해방을 맞이해서야 비로소 출옥할 수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 놈들에 대한 증오심이 발로되기 시작했다.

이 증오심이 해방 후에도 그대로 이어졌었다. 해방정국은 미국의 점령 통치 속에 일제 때나 하등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3) 빨찌산과의 접촉

해방 정국에서 동네 청년들이 좌익 운동에 나서게 되어 자연 청년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1948년 여수 14연대 봉기 후 불갑산에도 약 30여명의 무장대가 49년 말까지 활동하고 있었다. 이 무장부대는 가끔 부락에 내려와 밥을 시켜먹었으며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접촉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4) 빨찌산 대장과의 약속

우리 집에서도 빨찌산 대장의 밥을 지어줌으로 인하여 자연 교양을 받게 되었었다. 그때 나는 빨찌산이 되고 싶다고 하니 ”너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공부 열심히 해서 장차 우리 뒤를 따라도 된다고“ 했을 때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 때 손위 누님이 접촉하고 있어서 누님의 영향속에 심부름도 했었다. 그리고 총 쏘는 법도 그때 배웠다.

5) 동네 청소년소녀들을 문맹퇴치 했다.

가난 때문에 학교에 들어가지 못해 몇몇 집을 제외하고는 문맹자 가족들이었다. 나는 서당을 다니면서 양식 있는 훈장선생으로부터 국문을 완전 터득했기 때문에 국어와 수학(보태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등을 동내 야학 (사랑방) 선생을 해 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청소년소녀들을 전부 문맹퇴치 하는데 기여했었다. 그리고 야학을 통해 동네 청년들에게서 적기가, 농민가도 배웠었다.

6) 군경들의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은 증오와 분노를 솟구치게 했다.

우리 부친은 보리 고개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서 산에서 숫돌을 캐 다듬어 장에 나가 팔아서 호구지책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밀재 출장소에서 기동대 7명이 여자들을 전쟁 준비를 위한 죽창 훈련을 매일 삼학리 산산학교 운동장에서 시켰었다. 매일 광주에서 영광읍으로 내려오는 버스를 타고 오는 것을 알고 빨찌산들은 길목인 연암교에서 매복했다가 전복시켜 경찰 6명을 사살한 뒤 불갑산으로 후퇴했었다,1명은 부상당한 채 살아나왔으나 그 후 혼자만 살아나왔다고 총살당했다는 소식도 들었었다.

몇 시간 후 영광기동대가 출동하여 추격하는 중 부친은 바깥 총소리에 놀라 숫돌 굴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발각 되었다.

기동대는 무턱대고 빨찌산 매복을 안내해주었다고 안 죽을 만치 두들겨 팬 후 불지 않는다고 수건으로 눈을 싸매고 숲속으로 끌고 가 총살하려고 했다.

마침 밀재 출장소장이 보고 어떤 사람인가 보자 하면서 수건을 벗기는 순간 “이 영감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밀재 출장소 돌담 쌀 때 부역도 한 영감이며 이곳에 오랜 기간 숫돌을 캐는 영감이니 총살하면 안 된다“고 해 살아났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우리가족들은 참담함을 금치 못했었다.

우선 들것을 만들어서 집으로 운반한 후 맞은 얼을 뺀다고 당시 농촌의 단방 약으로 똥통(소망) 의 똥물을 걸러 마시면서 수개월을 앓아 눕기도 했었다. 당시 처녀들과 청년들은 한청단을 만들어 죽창훈련을 시켰던 상황이었었다.

7) 토벌대들의 횡포

그 후 동내 이웃 집 청년들이 빨찌산으로 입산했는데 1949년 가을에 불갑산 용천사에서 소위 토벌대의 불의의 기습을 당하여 동내 김영하라는 청년이 산을 넘고 넘어 우리 동내에 들어왔는데 이를 추격하여 동내 뒤 동산을 완전포위하고 날이 밝아지자 각종 중화기로 집중사격을 가하면서 진입해 들이 닥쳤다. 토벌대들이 가가호를 다니면서 동내 홍가네 부잣집마당으로 총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려 영문도 모른 채 나갔었다.

토벌대는 집집마다 수색하는 과정에서 우리 집 허간 재속에서 군복과 단도 수류탄이 나왔었다, 이것을 고의로 감추었다고 솔직하게 말하라면서 큰형님을 안 죽을 만치 두들겨 팼었다. 이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어린 마음에 천불이 날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오기도 했었다. 그 옷은 이웃집 김영하의 옷이었었다.

당시 우리헛간 재속에 묻어 놓고 농민 바지저고리를 입고 소 꼴 구덕과 낫을 들고 변장한 모습으로 집합장소에 나올 줄은 전혀 몰랐었다. 결국 김영하는 체포되고 말았다.

집결한 동네 가족들 중 청년들은 두들겨 팬 다음 구루마나 니어카에 싣고 지서유치장에 일주일정도 유치시켰다가 풀려나오기도 한 사실들은 비일비재하였다. 이와 같은 탄압상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는 나로 하여금 사회 개조운동에 나서게 만들었다.

8) 우리숙부의 참상을 보고

1948년 가을 우리 막내 숙부가 경찰서 보안과장 찝차에 치어 허벅다리뼈가 부서지는 중상을 입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우리 큰형님이 나갔지만 주눅이 들어 말 한마디 당당하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우리 집안에 사람이 없구나를 절감하고 빨리 어른이 되어서 반드시 복수하고야 말겠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맹서했었다. 결국 숙부는 불구가 되었고 보상은 당시 알량미(수입쌀) 소두 한말 정도 받았을 뿐이었다. 당시는 경찰 탄압의 공포 속에 벌벌 떨고 있는 판국이었다.

9) 우리학교 교사에 대한 지서 순경들의 학살만행을 보고

1950년 6월초에 우리학교 체육담당 정병태 선생이 지서 순경과 주막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말다툼 끝에 빨갱이라고 즉석에서 쏘아죽이고 그 시신을 지서 앞 도로변에 가마니로 덮어놓고 가족들이 시신조차 찾아가지 못하게 했었다. 여름철이라 도로변을 지날 때 썩는 냄새가 코를 진동했으나 결국 7/23일 인민군에 의해서 해방을 맞이했을 때 비로소 시신을 수습하는 광경을 보고 당시 경찰 군대들의 학살만행에 치를 떨기도 했었다.

10) 드디어 해방세상에서

1950년 7월23일 인민군에 의해서 해방(우리세상)을 맞이한 우리고장은 고통 받고 탄압받았던 세기적 바람이 이제 비로소 성취되었다고 생각하여 농민들은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받았고 여자들은 남녀평등권을 갖게 되었으며 가난으로 배우지 못한 어린이나 소년들도 배움의 길이 비로소 열리게 되었다는 기쁨에 새 사회건설에 한마음 한 뜻으로 동원되기도 했었다. 이런 때 나는 소년단 활동과 리당 세포위원회에서 면당부와 연락사업을 열심히 하는 과정에서 9.28후퇴를 맞게 되었었다.

11) 9.28 후퇴 후 입산해 빨찌산이 되었다.

후퇴 후 미군을 비롯한 소위 유엔군들은 침공해 점령하는 곳마다 살인 강간 약탈 방화 등이 자행되고 있었다.

숨어 있었던 우익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판을 치고 있는 상황속에서 가족들은 동네사람들과도 함께 입산했었다.

결국 나는 하산하지 않고 남아 4년여의 빨찌산 투쟁속에서 지뢰 50군데를 맞았으며 마지막에는 총 3발을 맞고 중상 포로 되어 사형, 무기, 반공법 2년, 사회안전법13년, 도합 35년 9개월을 복역하고 비전향자로 출옥해서 오늘도 변함없이 범민족 통일운동의 가시밭길 속에서 남은 생을 바치고 있는 중이다.

2020. 12/16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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