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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16. 아버지를 폭행한 경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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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12-09 00:42 조회1,0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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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전쟁 직전 리승만 정권 시절의 경찰대에 의하여 아무 죄도 없는 김영승 선생의 아버지가 죽을 만큼 매를 맞고 처형당할뻔 하였던 일화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 한다 16

아버지를 폭행한 경찰대

김영승 선생 (비전향 장기수, 통일운동가)



리승만 정권은 전쟁준비에 광분하고 탄압은 극에 달했다.

우리 고장은 전쟁 전 1949년 여름부터 1950년 전쟁 날 때까지 처녀들과 청년들을 강제로 동원시켜 전쟁 준비를 위한 죽창훈련을 자행했다.

여자들은 17세부터 처녀들이고 남자들은 30세 까지다.그래서 농번기에 강제훈련에 동원되어 일할 사람이라고 어린애들과 노인들 뿐이었다. 우리 누나도 18세 처녀라 죽창훈련에 강제로 동원되었다.

주로 처녀들은 삼학리 산산마을에 묘량분교가 있었는데 이 분교에서 경찰들이 훈련시켯던 것이다.

이는 밀재 출장소에 주둔한 경찰대 7명이 광주에서 영광읍으로 내려오는 버스에 동승하여 죽창훈련을 1950년 6월 전쟁 날 때까지 자행했다. 청년들은 영광법성포에 끌어다가 훈련시켰던 것이다.

1949년 7월 초순에 밀재에서 버스타고 내려오는 것을 안 빨찌산 무장대는 연암리 연암교에 미리 잠복해 있다가 버스를 전복시켜 밀재출장소 주둔 경찰 7명중 6명이 사살되고 1명만 팔 부상을 입고 살아나왔는데 다 죽고 혼자만 살아나왔다고 총살당한 사실이 있었다.

그 후터는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내려와 죽창 훈련을 시켰던 것이다.

그날 오후에 영광읍에서 기동대가 출동해서 연암교에 도착했다.

그들은 빨찌산 무장대는 불갑산으로 후퇴했는 데 그 족적 따라 기동대와 밀재 출장소 주둔 경찰대와 합동해 추적해 가다 우리 아버지가 당시 숫돌을 뚫고 있는 숫돌굴을 발견하고 굴 안 구석에 벌벌 떨면서 앉아 있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나오라고 했다.

멋모르고 총소리가 버글버글 나니 무서워서 안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사실 총소리 날 때 나와 뒷재를 넘으면 우리집 뒤산 밭고랑에 떨어져 무사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들은 영감 할아버지를 다짜고짜 “내놈이 버스통과를 사전에 빨찌산들와 내통해서 가르준 것 아닌가고” 뭇놈들이 총개머리 판으로 두들겨 패고 발길질하면서 족치기 시작했으나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라고 솔직하게 말했어도 거짓말한다고 안죽을 만치 두들겨 패다가 결국 무고한 아버지에게 분풀이로 총살시키라고 높은 놈이 명령하니 양 눈을 수건으로 동여매고 숲속으로 대리고 가 총살하려는 순간 밀재 출장소 소장(경위)이 보고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이때 수건을 끌려 놓고 보니 이영감은 오랫동안 숫돌만 캐는 사람이고 밀재 출장소 돌담 쌓을 때 부역한 사람이라고 증언해 주어서 구사일생으로 총살을 묘면해 살아남게 되었다.

당시 밀재 출장소도 삼학출장소와 같이 민간인들을 강재로 동원시켜 부역한 것인데 아버지가 돌담 쌓는데도 다른 부역자들보다 잘 쌓고 오랜기간 숫돌을 캐는 일을 하였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일면 그 밀재 출장소 소장이 광산김씨라고도 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놈들에게 안죽을 만치 두들겨 맞아 몸을 가누지 못헤 뜀어다가 연암리 하세미 주막집에 갖다 놓고 기동대는 불갑산 쪽 능선에 올라 총소리만 내다가 후퇴해 영광읍으로 갔던 것이다. 당시는 경찰대들이 빨찌산 무장대가 나타났다고 신고해도 당장 쫓아 오지 않고 떠난 후 한참 지나서야 도착해 민간인들만 때려잡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또 떠난 후 나팔분다“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어둠이 깔린 상태속에서 큰형님과 같이 쫓아가 아버지를 담가에 실어 집으로 모셔왔다.

당시는 치료약이란 생각할 수조차 없었고 단방약으로 맞아 얼진데는 똥물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똥통을 소망이라고 했다. 이 소망에 똥덩어리를 휘휘젖고 바가지로 똥물을 떠서 마시고 하면서 달포동안 꿍꿍 알기도 했다.

몸이 좀 낳아 기동할 만큼 되니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에 숫돌 굴을 찾아 그 작업을 계속하는 과정에 1950년 7.23해방을 맞아 그만두게 되었다.

당시 불갑산 토벌은 매일 벌리고 있고 경찰들의 행패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들의 요구에 조금이라도 불평을 가지면 빨갱이라고 낙인찍히면 살아날 수 없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살아야 했으니 일제 전쟁 말기보다 더하면 더 했지 경찰과 세무직원들의 행패는 말로다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렇게 리승만 정권하의 전쟁준비 발광상은 하늘을 솟구치고 있었다.

2020. 12월 8일 후 4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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