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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15. 조선인민군의 삼학출장소 점령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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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12-05 01:57 조회1,2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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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자 김영승 선생이 전남 영광군 고향마을에서 직접 목격한 조선인민군의 삼학출장소 점령전투에 관한 생생한 목격담이다. 김영승 선생은 이 글에서 또한 이후 9.28후퇴를 맞이하여 16개 침략군들이 그의 고향땅에 살인 강간 방화 약탈을 자행하면서 침공해 들어와 입산을 하게 되었다는 그의 입산동기를 밝힌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15

조선인민군의 삼학출장소 점령전투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삼학출장소는 전남 영광군 묘량면 삼학리 내촌마을 뒷산이다.

이 출장소에 경찰대 200여명이 주둔해 있었다.

묘량에서 함평 해보면으로 넘어가는 재를 밀재라고 한다

여기에도 경찰대가 20여명 주둔해 있었다

왜 이 두 지점에 출장소 진지를 구축했던가이다.

이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 순천 14연대 애국병사 봉기로 인하여 당시 불갑산에도 빨찌산 무장부대 30여명이 투쟁하면서 불갑산에서 장성 태청산으로 태청산에서 불갑산으로 이동하면서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루트를 차단하기 위해서 였다. 먼저 밀재 출장소가 1949초에 진지를 구축하여 빨찌산 통로를 차단하기 때문에 빨찌산들은 불갑산에서 태청산으로 가기위해서 삼학리에서 장한산을 거처 태청산으로 가는 이동통로를 사용했다. 이도 막기위해서 1949년 봄에 주위 인민들을 강제로 동원해서 구축했던 것이다

그 구조는 고지능선 둘레를 뛰어 건널수 없도록 넓은 폭에 깊이는 키 큰 대인들이 푹들어갈 정도로 깊이파고 그 위에 대우타리를 치고 그안에 돌담을 쌓고 그안에 막사와 취사장을 만들어 아주 튼튼하게 구축했던 것이다. 그리고 깊게 파인 전호 바같에는 뺑둘러서 10m간격으로 초소막을 지어놓고 민간인들을 마을 마다 강제로 동원시켜 보초를 서게하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민폐는 말로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당시는 빨갱이 소리만 들어도 벌벌떠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구축해 놓고 경찰의 발악세상이 되었다.

1950년 전쟁이 터지자 인민군대가 물밀듯이 진격하여 영광까지 왔었다. 영광읍에서 인민군데 한 조는 함평읍으로 진격하여 목포방향으로 나가고 나머지 주력은 삼학리를 거쳐 밀재를 넘고 함평월야를 거쳐 광주까지 진격을 하는 과정에 통로를 차단하고 있는 삼학출장소를 거칠 수밖에 없었다.

때는 1950년 7월 22일 밤이었다. 인민군 선발대가 먼저 도착해서 삼학출장소 정문앞까지 와서 손들고 투항하라고 외쳐댔다. 그러나 적들은 정문 포대위에 기관총을 난사하며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으면서 의기 양양하게 싸울 태세를 하였다.

그런데 왜 이출장소에 경찰대 200여명이 들어가 있었던가이다.

사실은 인민군 진격에 따라 전남 담양의 경찰대들이 함평을 통해 목포로 빠지기 위해서 영광을 거쳐야하는데 인민군이 영광에 먼저 입성하니 산을 넘고 넘어 오다보니 우리 마을 앞산을 해가 서산에 걸터앉을 시간에 능선을 타고 삼학출장소로 들어가 진주할 수밖에 없었다.

능선을 타고 가는 경찰대를 발견하고 오늘 밤 전투가 있을 것을 예상하고 저녁밥을 일찍 먹고 여차하면 뒷산으로 피신할 준비도 갖추고 있었다. 드디어 깜깜해지자 총소리가 나고 조명탄이 공중에서 터져 대낮같이 환하게 비치고 있는 마당에 콩볶듯 총소리는 그치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대기하고 있다가 포성이 울리자 부엌 속으로 들어간 사람, 방안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는 사람, 뒤산으로 올라 음폭 파인데 엎드려 있는 사람 등 각자 대피하고 있었는데 필자는 손위 형과 함께 뒤산 안개봉우리 넘어 삐유하고 총탄 날아가는 소리가 안 나는 데 까지 달리다보니 날이 훤히 새고 있었다.

총소리가 그치자 능선 넘어 삼학출장소가 훤히 보이는 곳에 엎드려 관찰해 보니 삼학출장소는 불에 타고 있는 장관을 보면서 동내 마을로 내려오는데 사람들은 이곳저곳 골짝에서 숨어 있다가 한둘씩 떨고 일어나 자기 마을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산 능선에서 봤을 때 도로가 약 2km보이는데 인민군대 행렬이 포를 실은 말구루마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겁없이 삼학출장소를 직접 가 보았다.

파놓은 호리가대 안에는 경찰대 시신이 널부러져 있고 대울타리도 돌담도 무너지고 제일 안쪽의 숙소는 완전히 불타 잿더미만 남아 있고 대형 가마솥에는 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경찰대들은 해놓은 밥도 먹지 못하고 전투가 벌어졌었다.

m원 칼빈 구구식 등 각종 총과 실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사실 알고 보니 인민군대는 우선 연발총만 수거해 가서 총과 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우리 리는 재빨리 치안 유지대가 조직되어 모두 완전무장했다.

그런데 당시 전투상황을 알아보니 인민군데 선발대 2명이 포대 앞 정문 가까히 가서 손들고 나오라고 외치다가 적들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는 말로써는 안되겠다해서 조명탄을 쏟고 직사포를 쏘아 명중하게 되니 그때는 적들 스스로가 한사람이라도 살아나기 위해서 대우타리를 뚫고 폐주하는 적들을 따발로 갈겨대서 많은 적들이 사살되었다고 하며 안 죽고 살아 나온 경찰대들이나 부상자들이 삼학교로 흘러내려가는 냇가 아카시아 숲에 숨어 있다가 이삼일 지나니 배가 고프고 부상자는 상처에 곰팡이가 슬게 되니 밖으로 나타났다가 우리 치안대와 싸우기도 하고 마을에 몰래 내려와 자기 고향이 어딘데 인민군 몰래 데려다 주면 돈 몇만원 주겠다고 사정하다가 신고해 사살당하기도 했었다. 당시 찍어놓은 리승만사진이 든 화폐를 경찰대 일인당 5만원 이상씩 비상금으로 소지하고 있었다. 얼마간 이 화폐를 쓰기도 했었다. 전쟁통에도 절도범들은 경찰대 시신 호주머니를 털어 리승만화폐를 훔쳐가기도 했었다.

1950년 7월 23일은 우리 고장과 광주가 해방된 날이다. 압박받고 천대 받던 농민들은 이젠 우리세상이 왔다고 인민군을 환영하며 마을에는 인민정권기관들을 비롯한 농민 여성 청년 청소년 단체들이 속속 나와서 모든 것은 전선으로! 구호속에 자치건설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런데 살아나온 패잔병들은 며칠 굶다가 배가 고프니 저녁이면 마을에 내려와 식량과 밥을 달라고 한다. 민간인들은 무서워서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준다. 그들은 그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꼭 피살시키고 간다.

당시 인민군대가 토벌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전선으로 집중해 진격작전을 펴고 있기 때문에 맘 놓고 노략질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완전무장한 치안대가 있어도 총을 쏠줄도 모를 뿐 아니라 전투훈련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먼 곳에 적들이 나타나면 위협사격할 정도 밖에 못되어 치안대가 적을 발견하고도 하나도 사살 혹은 생포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밤이면 무서워서 밤잠을 설치기도 했었다. 공중에는 미제의 쌕쌕이가 날아다니면서 민간인이 3사람만 모여도 폭격을 해서 피해를 보기도 했다.

9.28후퇴를 맞이하여 16개 침략군들이 점령해 들어오면서 살인 강간 방화 약탈을 자행하면서 침공해 들어와 산으로 입산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삼학출장소를 다시 개설하여 진주한 적들은 합법세상에서 협력한 자를 색출하는 인간 살인도살장이 되고 말았다. 그곳은 1956년도에 없어져 터 자리만 남아있다. 당시 도로가에 전사한 인민군 2명을 묻고 크게 봉을 두 개 쓰고 인민군이 지나갈 때는 반듯이 묘 앞에 서서 거수경례를 하고 지나가는 것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후 40년이 지난 후 다시 찾았을 때 국도가 확장할 때 시신을 파서 옮겼다고 하나 옮긴 사람도 죽어서 찾을 길이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2020. 12월 4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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