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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12. 무적을 자랑하던 "정공대"의 비극적인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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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11-26 10:14 조회1,1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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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 장기수 김영승 선생은 이번 글을 통하여 한 나라나 정당, 사회단체가 그 지도자의 올바른 지도를 받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따라 그 운명이 천지 차이로 좌우된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말해주고 있다. [민족통신 편집실]


과거를 회고한다 

12. 무적을 자랑하던 “정공대”의 비극적인 종말


김영승 선생 (비전향 장기수, 통일운동가)


빨찌산 투쟁역사에서 100여명의 무장부대가 단 하루 만에 종막을 고하는 참패의 역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때는 1952년 1월 27일이 비극적인 운명을 고하는 날이었다.

필자는 1951년 12월 초순에 적들의 제1차 대대적인 공세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백운산 용기동골에 들어가 공세를 극복하고 백암골 민청학원에 들어가 있었다.

다시 적들의 2차공세를 앞두고 비무장성원들인 민청학원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어 각기관이나 무장부대로 편입 되는 과정에서 당시 조동만 동지가 이끄는 여천군당부에 들어갔다.

당시 민청학원생은 30여명의 10대 말의 청소년들이었다.

여천군당위원장이었던 조동만 동지는 도당 간부부에 민청학원생 한사람을 요청했었다.

간부부는 직접 찾아가 맘에 든 동지를 골라가라고 했다. 그래서 위원장이 직접 찾아 와서 30여명의 학원생 중에 내가 지명돼 여천군당부로 소환되어 갔다 당시 아지트는 옥용골의 선지골에 있었다.

여천군당부는 여수시당과 순천시 당을 빨찌산 체제로 일원화 했었다.

유격대는 10여명의 무장대가 군당부를 엄호하며 공세를 격파하고 있었다.

무장부대는 여수 14연대 출신들이 몇 명 있었다.

조동만동지의 직접 지휘하에 밤이면 고지에 토굴을 파고 들어가 있는 적들의 주둔처를 밤 중 기습작전으로 무장과 보급품을 아군의 피해 없이 로획하는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무기가 늘어남에 따라 무장할 전투요원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당시 도당학생, 민청학원 학생 군정대학생들로 무장하게 되었다. 매일 기습작전에 연승을 거듭하여 100여명의 간부군으로 무장확대했다.

애초 10여명의 무장대가 잘 싸워 무적의 무장대로 발전하자 도당부에서는 도당직속 “정치공작대“로 개칭하였고, 약칭하여 “정공대”라고 했다. 정공대는 도당산하 비무장성원들 100여명의 동지들을 보위하며 매일 전투속에 하루해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하여 1952년 1월 초순에 수도사단병력이 토벌하려 백운산 하봉과 800고지 사이의 삼각고지에 올라와 있었다.

이 때 진살골에 아지트를 쓰고 있으면서 백주에 기습작전을 전개했다.

수도사단 국방군( 당시 국군은 노랑개, 경찰대는 검은개라 불렀음)이 눈이 많이 덮힌 삼각고지에 올라와 막 짐을 풀고 있는 찰라를 이용하여 서기주 부부대장은 7명을 인솔하고 북풍바라지를 이용하여 무사하 고지에 다달아 돌격과 함께 연발총을 란사하며 돌격을 치자 기겁을 하고 몸만 뒹굴어서 폐퇴하는 것을 보고 대기하고 있던 우리부대성원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고지에 수북이 쌓인 배낭과 탄약 소총을 짊어지고 갈만큼 잔뜩 지고 하봉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하여 걸어서 마침내 하봉을 넘어 암자 있는데 까지 무사히 옮기었다.

적들은 쌕쌕이 4대가 날아와 융단폭격을 감행했으나 몇 동지의 부상자만 낼 분 무사히 백암골의 중턱에 있는 암자트에 총집결했다.

해는 서산에 걸터앉아 노획한 보금품을 정리했다. 사실 보급품이 많이 있었지만 가져올 인원이 없어 다 가져 오지 못했다.

이때 노획한 M-1 실탄 만발을 옥용골 너들강 틈에 비장했는데 비장한 동지가 희생이 되어 지금껏 찾지 못하고 주인 잃은 흑진주가 되고 있다.

이렇게 무용을 자랑하던 정공대가 왜 단 하루에 전원이 희생되고 생포돼 정공대란 이름만 남고 만 것인가.

100여명의 비무장성원들을 보호하며 계속되는 전투속에서 부대원들은 누적된 피로가 쌓여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

이러한 상황속에 1952년 1월 26일 88보초초선 능선에서 적들과 전투속에 조동만대장이 허벅다리 관통상을 입게 되었다.

적들은 매고지를 장악하고 매일 수색작전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소부대 활동을 못하고 비무장성원들의 안전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에 적들의 눈에 띄지 않게 잠복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꼬리를 멈출 수 없어 적들은 매일 꼬리를 물고 추격작전을 감행하기 때문에 전사자와 생포자가 발생하고 있고 부상자는 치료조차 안전하게 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었다.

26일 전투에서 부상당한 조동만 동지는 새벽 2-3경에 임시로 파놓은 비트에 들어가면서 부부대장에게 내일(1/27일)은 적들의 주공목표가 내각(상봉, 따르봉, 도슬봉 안을 내각지대라 하고 그 외는 외각이라했다) 지대이니 봉강능선을 넘어 봉강골로 부대를 이동시키라고 신신당부하고 비트에 들어갔다.

그런데 부대는 계속되는 전투속에 쌓인 피로가 누적되어 이기지 못하고 이동한다 한다 하다가 날이 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부대를 백암골로 이동하여 분산 잠복시켰던 것이 화근이었다.

무장부대는 아무리 잘 싸워도 집단으로 팀웍이 되어야 지휘관의 지시 명령에 따라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지 개별적으로 분산해 놓으면 물론 잘 싸우는 사람도 있지만 부대로서의 사명은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 전투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일반 상식으로 되어 있다.

정공부대는 자기 기능을 발휘 못하고 적들의 대규모 수색작전에 맥없이 무장성원 한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정공대란 이름만 남기는 아픈 역사의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우리는 정공대의 최후를 통해 한나라의 지도자나 한 단체의 올바른 지도자의 지도를 받고 있느냐가 국가나 각정당 사회단체 등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역사적인 산교훈을 깨닫게 된다. *****.... .

참고@@ 현재 정공대 출신으로 생존하고 있는 사람은 필자와 90을 바라보는 여성 빨찌산 할머님 한분뿐이며 조동만 동지는 영웅칭호를 받고 백운산의 용계산을 동만산이라 칭했다.

2020. 11월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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