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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양심수에 대한 국가권력 최악의 인권침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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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0-08-28 07:44 조회9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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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양심수 김영승 선생이 페이스북을 통하여 그가 남녘 정권의 불법한 공권력에 의하여 전향하지 않고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 댓가로 겪었던 지옥같은 인권침해에 대하여 밝혔다.  현재 인천에서 거주하는 김영승 선생은 전남 영광 출신이다.  김영승 선생은 국가공권력에 의하여 수많은 동료들이 강제 전향을 당했고, 그 와중에 참혹한 고문으로 숱한 애국자들이 타살되었음을 밝혔다.  오늘도 보안관찰법에 의하여 1급감시를 받고 있는 김영승 선생은 지구상 최악의 인권탄압을 가능하게 만든 국가보안법 폐지를 강력히 요구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 감옥 속의 비전향 말살책에 의한 국가의 불법한 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 당한 실태 >

글: 김영승


사진은 필자 김영승 선생


본인은 중학교 재학 중 전쟁을 맞았고

9/28일 인민군대가 후퇴함에 따라 산에 입산하여 빨찌산 활동하다 체포 되어 무기형을 받고 대구 김천 안동 대전 목포 대전 광주 형무소를 거쳐 청주 보안감호소에 사회안전법 폐지로 비전향 출옥한 사람으로서, 국가의 비전향 말살책에 의하여 심지어 살인 폭력깡패 재소자들까지 동원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고문구타 등의 갖가지 방법과 수단에 의한 인간 이하의 열악한 환경과 처우 속에서 인권침해를 당한 사실을 아래와 같이 진술합니다.

1957년 1/27일 안동형무소에서 대전형무소로 이감왔습니다.(무기수 대전 집결에 따라) 비전향수들의 사방인 제 4사에 수감되었습니다. 인간 이하의 열악한 처우 속에 대전에서만 도합 16년을 살았습니다.

밥은 5등식인데 4등분하면 네 입에 다 먹는 적은 양의 밥덩이였습니다.

오직했으면 당소 의무과장(안상현)은

''이 오등식을 먹고 3년 살기 힘들 것이니 전향하지 않으면 죽어 나갈 수밖에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한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적은 밥덩이에 반찬은 '개가 보고 하품한다'는 소금에 절인 싱대 (대가리는 크고 고기는 적은 고기)를 밥찬으로 주면 배가 고프기 때문에 먹고 나면 목이 타 ''물을 달라''고 하면 제때에 주지 않고, ''전향하면 마음대로 먹고 마실 수 있는데 감방에 쪼그리고 앉아 귀찮게 하느냐''고 담당 교도관은 전향을 강요합니다.

''목이 타 죽겠다''고 고함을 지르면 '관에 반항한다'는 이유를 붙여 조사실로 끌어내 사방 간수부장을 위시하여 몇 명의 간수들이 달라 들어 수갑을 채우고 포승으로 묶어 몽둥이 타작을 당하고 하는 것은 일상사였습니다.

개중에는 배고픔을 참지 못해 전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름에는 한철을 빈대 때문에 밤을 설치기도 합니다. 교도소가 목조건물이라 천정에서 빈대가 떨어지기도 하고 이불은 일제 때 마대 푸대로 이불을 만든 것인데 솜은 수년을 덮었기 때문에 뭉치 솜으로 되어 있어 속에 빈대가 숨어 있다가 밤이면 기어 나와 살갗 피를 빨아 먹어 가려워 빈대 잡느라고 잠을 설치게 됩니다.

아침이면 방벽에 빈대 죽인 피가 얼룩져 있기 때문에 사방간수는 '높은 사람 순시 때 걸리면 안 된다'고 피 닦는 빼빠를 들여 보내 주면 그것으로 피 자국을 지우게 되는 것도 매 여름철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름에는 방이 통풍이 되지 않아 더위에 시달려야 합니다.

목욕탕 물은 손을 넣지 못할 정도로 뜨겁게 끓어 들고 나가는 데 10분이라 목욕탕에 때를 벗길 수 없어 감방에 들어와 때를 벗기면 '때 벗긴다'고 불러내 때려 패고 '목욕시간 적다'고 하면 '반항한다'고 때려 패며 전향을 강요합니다.

겨울이면 칠푼 송판 위에 가마니 한 장 깔아주어 그 위에 낡은 국방색 담요 한 장 깔고 일제 때 독거용 이불을 한 장 주면 그것으로는 도저히 겨울 추위를 막아낼 수 없기 때문에 '걸레 하라'고 들여 준 것을 찢어 끈을 만들어 이불가와 가마니를 묶어 침낭 속에 들어가듯 몸을 집어넣고 잠을 청하려는 순간 야간 순시에 걸려 문을 따고 가위로 끈을 잘라버리면 이불이 들려 차가운 바람 때문에 밤잠을 잘 수 없는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끌려 나가 ''주는 대로 덮지않고 변조한다''고 두들겨 패면서 ''전향만 하면 큰 이불을 덮고 편하게 살 수 있는 데 고집을 부리고 있다''고 전향을 강요 합니다.

가족면회는 가족들이 ''전향을 권고 하겠다'' 하면 한번은 시켜주는 등 전향공작 수단으로 이용했으며 아픈 환자에 대해서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외부 진찰이나 의무과에 입원시켜주고 가족을 동원시켜 전향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무과에서는 사회 참관이다 또는 반공목사나 신부 대학교수들을 동원하여 한사람씩 불러내 설득작업을 한다거나 불의에 사회참관을 시켜주고 '감상문을 쓰라'고 합니다.

쓴 감상문이 당국의 의도대로 쓰여 있지 않으면 이를 트집 잡아 때려 패며 전향강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밥에 모래가 많아 씹을 수 없는 상태에서 '밥을 먹을 수 없다'고 높은 사람 면담을 요청하면 문제를 해결해 주기는커녕 불러 내 '선동하고 반항한다'고 때려 패는 것은 거의 일상사가 되기도 합니다.

5.16 쿠데타 후 1961년 9월 여름 4사에 복역 중 매일 감방 내 변기통을 내는데 (구형무소)

'변기통에 성경책을 넣었다'고 억지 트집을 잡아 사방 관구 부장을 비롯한 몇몇 간수들을 동원하여 일반잡범 사방 공방에 집어놓고 뒤 대각수정을 채워 ''성경책을 넣었다는 것을 고백하라''고 했다가 ''전향을 하고 나가면 이런저런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전향하라''고 고문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빈방에 들어가 아무 것도 없었음)

1963년 3월 특별사 5사에 3 방에 전방 가 있을 때에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쿠데타 정권은 반공을 국시로 하는 상황에서 형무소 수용 중인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한 전향강요가 더욱 노골화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비전향장기수들을 길들여 전향시킬 목적으로 감방에서 들고나가는데 10분밖에 주어지지 않는 조건에서 강제로 소위 재건체조를 시켰습니다.

이에 노인들은 재건체조를 반대하고 '자유시간을 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관구부장 이응하는 '관의 규율에 복종하지 않고 선동한다'고 계호과 조사실로 끌고 가 수정을 채우고 포승으로 묶어 '시키는 대로 복종하지 않고 반항한다'며 발로 차고 곤봉으로 두들겨 패면서 전향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발하자 감옥 중의 감옥(먹방)인 징벌방에 처 넣고 전향을 강요하여 도저히 당하는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점심을 먹으라고 수정을 끌러 주는 틈을 이용하여 뒤 유리창을 부수어 유리칼로 손목과 배를 가르는 순간에 담당 간수에게 들켜 15일간 죽을 고통을 당하며 전향을 강요당했습니다.

대전형무소는 일제 때 감옥 그대로이고 규율도 거의 일제감옥 규율이었습니다.

심지어 간수들은 비전향자들에게는 인간이하의 인격적 모독을 하는 것은 일반사이고 하나의 짐승으로 취급해 다루기 때문에 자기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에게 육두문자만 쓰는 못된 간수들도 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삼대 후레자식'이란 별명까지 받고 있었겠습니까?

1968년 4월 비전향수 분산조치에 다라 대전에서 목포로 이감 왔을 때도 마찬가지로 모든 처우와 일상이 전향수단으로 행해지고 있어서 집단단식도 했었습니다.

1969년 5월에 목포에서 대전으로 다시 이감 되어 대전 특사 제 5사 독거 방에 수감되었습니다. 일상적인 전향강요를 당하는 과정에서 1973년 8월에 (중앙정보부, 법무부, 내무부 합동) 국가의 계획적 조직적인 비전향 말살 책이 자행되었습니다. 당시 나의 전향 담당관은 신학운 교화사였습니다.

1973년 9월12일 경에 사방 조사실로 불러내 의자에 앉혀 놓고서 ''앞으로 전향을 하지 않는 한 물리적 방법이 동원될 것'이라고 공갈 협박을 당한지 2일 지나서 이경남 씨란 비전향 장기수가 끌려 나갔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사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젠 본격인 고문구타에 의한 비전향 말살책이 자행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이경남 씨는 전향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음)

이윽고 1973년 9/15일 대전에서 광주형무소로 20명이 이감 갔습니다.

광주 2사 (특별사동임)에 수용되었는데 총64명이 있었습니다.

광주 형무소도 8월에 전향공작 전담반이 조직돼 교무과에 6-7명의 교화사들이 있었는데 악명 높은 강철영 교무과장, 교화사는 문승호, 김무웅. 박종오, 이규연, 김영술. 정일봉 등이며 보안과에서 파견된 김홍렬과 박채옥 간수들이었습니다.

드디어 11/14일 오후에 관구부장(이름 미상)은 큰소리로 다음과 같이 선포했습니다.

“각방은 들어라! 지금부터 전방 준비하라.

각자의 소제품은 싸서 그대로 놔두고 몸만 나온다'' 하고서 ''오늘부터 운동, 목욕, 접견 서신 독서, 의무과 진찰치료 등을 중지한다“고 했습니다.

몇 분 후 간수들이 떼로 몰려와 각방 문을 따고 북쪽편 0.75평 방에 12-13명씩을 집어넣었습니다. 서로가 무릎을 맞대고 앉아 다리를 펼 수도 없이 앉혀 놓고 ''각자는 시찰구만 바라보고 앉아 있어야 하며 고개를 숙이거나 옆과 뒤를 돌아보지도 말며 엎 사람과 이야기도 해서는 안 된다''고 엄포를 했습니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11/15일 오후 2시 민방위 훈련이 끝나자마자 살인 폭력 강패 재소자들이 들어 닥첬습니다.

알고 보니 폭력 강패 재소자 정무종은 어깨에 떡봉이(떡을 찍는 방망이) 란 마크를 달고 손에는 감방열쇠를 쥐고 허리에는 수갑과 포승, 곤봉을 차고 심지어 담배까지 입에 물고 피우면서 악한 인상을 쓰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외 같은 부류인 원삼실, 노상기, 이준원 서원배 등의 깡패 재소자들이 설치기 시작합니다.

정무종은 ''군특무대에서 근무 중 고문경험이 있다''고 자랑하면서 각종 고문 구타를 자행했습니다.

그들은 각방을 돌아다니면서 감방문을 자그작 따고 ''왜 옆을 돌아보고 있으며, 왜 옆 사람과 말을 하며, 왜 서 있으며 왜 뒤 창문을 바라보고 있느냐, 탈옥하려고 궁상하느냐'' 하는 등의 각종 구실을 붙여 곤봉으로 때려 패고 끌어내 엎드려 뻗치게 해 놓고 곤봉으로 사정없이 타작을 자행했습니다.

매일 반복적인 타작으로 전향을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방담당은 정화선 간수였는데 점호 때나 높은 사람순시 때나 나타나고 무법천지의 깡패 세상 속에 ''아이고 죽겠네'' 하는 고함소리와 매타작 소리만으로 사방을 들끓고 있었습니다,

정무종과 원삼실은 본인을 불러내 0.75평 공방에 집어넣고 팬티만 입은 상태에서 뒤수정을 채우고 여기에 포승으로 묶은 뒤 철장과 앞 시찰구 창살에 포승줄을 연결시켜 놓고 양쪽 발 뿌리만 감방 바닥에 닿을 둥 말 둥 해 놓고서 포승줄을 당겼다 늦추었다 하면 양 어깨가 빠질 듯 아파 죽는다고 고통을 호소하면 ''전향 할래 안 할래? 교무과장 면회 할래 안할래?'' 하면서 곤봉으로 때려 패고 고함을 지른다고 재소자 옷을 찢어 입을 틀어막고 거의 2시간동안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자 '지독한 놈'이라 하면서 포승줄을 풀어주고 양어깨를 두 놈들이 주물러서 본 위치로 돌아오게 한 후 사방 지하실로 끌고 같습니다.

그때 감방 동료들은 ''주리를 트는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지하실에서는 빨가벗겨 놓고 양 손목을 포승으로 묶어 천정에 매달아 놓고 곤봉으로 타작을 하고 심지어 포승줄을 또아리를 만들어 물에 적신 후 온몸을 치고 잡아당기면 살갗이 벗겨져 피가 흐르게 됩니다.

그리고 대나무 고쟁이로 항문을 쑤시기도 합니다. 이로 인하여 치질이 발생해 현재에도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깡패놈들은 ''오늘은 내가 젔다 다음 또 보자''며 감방에 들여 보냅니다.

몸에 피멍이 들고 살갗이 벗겨져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동료중 강원도 사는 정병기 씨는

“나는 몸도 약한데 김영승이처럼 고문당하면 죽지 살지 못한다''고 하면서 이튿날 동료들의 곁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전향)

깡패 정무종은 12월 중순 쯤 다시 불러내 사방 지하실에 끌고 갔습니다.

목공장에서 맞춰 온 고문틀에 눕혀 놓고 목은 맨 위쪽에 움푹 패인 곳에 목을 넣으면 꼼작달싹 할 수 없게 곤봉으로 가로질러 빗장 지르면 머리는 뒤로 제치게 됩니다,

양손목은 널판자 뒤로 수정을 채우고 로프로 널판자와 몸을 감아버리면 전신을 요동할 수 없게 해놓고 한 놈이 배위에 올라타 물에 적신 타올 수건으로 얼굴 전채를 덮고 10리터 주전자 물을 코 부위를 살살 붓습니다.

그러면 숨이 끊어질 것 같아 몸부림치면 타올 수건을 살짝 들어 올려 한번 숨을 쉬게 한후 덮고 물을 붓는 등을 반복해 10리터 주전자 물이 다 떨어질 때 까지 물 고문을 자행하면서 전향을 강요합니다.

깡패놈들은 ''오늘은 내가 젔다'' 하고 감방에 들여보내고 다른 동료들에게 차례로 물고문을 자행했습니다.

깡패들은 ''매타작 고문은 상처가 나기 때문에 물고문만 해도 된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것도 들었습니다.

실제 물고문으로 많은 전향자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1974년 1월 초순에는 또다시 공방에 집어넣고

양 앞뒤 창문을 열어놓고 팬티만 입은 상태에서 2-3시간 동안 동태고문을 자행하며 전향을 강요했습니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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