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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법 개정안 통과, '형제복지원'과 '코리아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사건 재조사 길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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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김백호 작성일20-05-21 13:32 조회9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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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 개정안)'이 2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형제복지원'과 '코리아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사건 등 근현대사 주요 사건 등을 재조사하게 됐다. 국회는 이날 본회의를 열어 '과거사법 개정안'을 재석 171석 중 찬성 162표, 반대 1표, 기권 8표로 통과했다. 해당 개정안은 2010년 활동이 끝난 ‘진상조사위원회’를 재가동해 일제 강점기 이후있었던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진상을 규명하게 된다. [민족통신 편집실]


https://youtu.be/VQnKAks4aMk




과거사법 통과.jpg




'코리아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사건






11사단 20연대의 함평 민간인 학살

후방지역 빨치산 토벌을 전담하기 위해 창설한 11사단이 처음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곳은 함평이다. 함평 민간인 학살사건은 1950년 11월 말부터 1951년 1월 초순까지 11사단 20연대 3중대에 의해 일어났는데, 같은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일어난 산청•함양•거창 지역 민간인 학살사건이 일어나기 1개월 전에 발생했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바로 사회문제가 되었다면 거창과 함양•산청에서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 사건에 대한 사회적 방어기제가 작동하지 않으면서도 똑같은 방식의 학살사건이 반복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함평 민간인 학살사건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전남 함평군 해보면과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에 걸쳐 있는 해발 516미터의 불갑산은 코리아전쟁 이전부터 여순사건 등에서 군경에 쫓긴 좌익세력들이 입산하여 무장투쟁을 벌였던 곳이다. 

1950년 12월 6일(음 10월 27일) 새벽 동틀 무렵,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 군인들이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장교마을(속칭 진다리)과 동촌마을을 향해 총을 쏘며 접근해왔다. 먼저, 7가구가 살고 있던 장교마을에 20여명의 군인들이 들이닥쳐 집집마다 불을 지르면서 주민들에게 “살고 싶으면 마을 앞으로 나오라”라고 소리쳤다. 사람들은 군인들의 협박과 강요에 집에서 쫓겨나와 마을 앞 논바닥에 웅크리고 모여 있었다. 그런데 이때 군인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느닷없이 기관총 사격을 하여 주민들을 학살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이때 학살된 피해자 수는 최소 9명에서 22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차별적인 총격과 함께 확인사살까지 끝낸 군인들은 같은 시각 학살 작전이 진행되고 있던 인접한 동촌마을로 향했다.

동촌마을은 80여 가구가 살고 있던 큰 마을이었다. 장교마을에서 학살사건이 시작될 즈음 5중대 또 다른 군인들은 장교마을과 서촌, 고실마을의 세 방향에서 동촌마을로 진입하였다. 군인들은 역시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불을 지르고 큰 소리로 주민들에게 동네 앞으로 모이라고 소리쳤다. 군인들은 동네 앞에 모인 주민들 가운데 여성과 어린이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논으로 몰아넣고 총살하였다. 남은 주민들에게는 성냥을 나누어 주며 미처 타지 않은 마을 집에 불을 붙이라고 내몰기까지 하였다.

“80여 가구쯤 되는 동촌마을은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대부분 초가집인데다가 초겨울 가움이 계속되던 때라 지붕이 바짝 말라 있어 비록 눈이 쌓여 있었지만 불을 대기가 무섭게 활활 타올랐다. 추수 후 미처 타작을 못한 채 마당에 쌓아놓은 볏가리에도 예외없이 불이 붙었다. 어느 할머니는 불과 몇 분 후 자신의 운명이 어찌될지도 모른 채 ‘먹고 살아갈 볏단에는 왜 불을 지르느냐’고 악을 써댔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주민들은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이집 저집에서 빠져나와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마을 앞길 아래 논바닥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50대, 60대의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가끔 할머니와 어린이도 끼어 있었고, 5,6명의 부녀자도 섞여 있었지만 젊은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일부 젊은이들은 마을 뒤로 달아나 버렸고 부녀자들은 불이 붙어 있는 집에서 살림살이를 끄집어내야 한다면서 나오지 않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이들 앞에 하사관과 장교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논바닥보다 약간 높은 길이나 논두렁 위에 선 그들은 주민들에게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느 장교가 부하에게 무어라고 외치는가 싶더니 ‘따따따’ 기관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논바닥에 서 있는 주민들을 향해 총탄이 일제히 발사된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머리와 가습에서 피를 뿜으며 모두 쓰러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 장교의 명령을 받은 10여명의 사병들은 쓰러져 있는 시체 사이를 돌아다니며 발로 툭툭 차보고 꿈틀거리면 다시 총을 쏘아댔다.”

장교마을에서 총소리가 들려오자 몇몇 청년들은 마을 뒤로 도망갔다고 한다. 주민들은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은 며칠 전 마을 뒤에 있는 한새들 앞에서 발생한 5중대와 빨치산 사이의 전투 때문이라고 증언하였다. 이 전투에서 5중대 군인 2명이 사망했는데, 5중대장 권준옥 대위는 전사자를 화장하면서 병사들 앞에서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 더욱이 학살사건 전날인 12월 5일에는 좌익세력들이 마을 뒷산 고개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꽹과리를 치며 만세를 부르는 등 ‘한새들 전투’의 승리를 자축하며 소동을 피워 군인들을 자극하였다.(주15) 이날 동촌마을에서 학살된 민간인은 33명으로 추정되고 있다.(주16) 인접한 서촌마을에서도 주민들이 여러 명 학살되었다.

장교, 동촌, 서촌마을 등에서 각각 ‘작전’을 끝낸 5중대는 해보-장성 간 24번 도로를 따라 월야면 계림리 죽림마을과 장성군 삼서면 수해리 방향으로 나아갔다. 군인들은 수해리 2구 신죽마을 앞에서 20대에서 40대의 남자들을 선별하여 3열로 정렬시킨 후 총살하였다. 사건이 일어난 신죽마을과 월곡, 양현 마을 등 70여 가구 가운데 절반이 불에 탔으며, 신죽마을의 경우는 거의 모든 집들이 불에 탔다. 심지어 군인들은 월야면과 삼서면 경계에 있는 대도천에서 마을주민에게 냇물을 업어서 건너게 해달라고 해놓고 물을 건넌 다음에는 군인들을 업어준 주민 2명을 총살했다.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에 의한 주민학살의 전조증상은 이 사건 이전에 이미 일어나고 있다. 1950년 11월 27일 광산군 본량면 덕림리(지금의 광주시 광산구 덕림동) 주민 7명이 사전신고를 하지 않고 함께 모여서 새끼를 꼬면서 변소에 빠져 죽은 노루고기를 삶아 먹고 있다가 5중대원들에게 연행되어 학살되었다. 당시 계엄 아래서 3명 이상이 모이려면 어떠한 경우에도 사전에 군경에 신고를 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빨치산과 무관한 시골 농민들이 마을에 함께 모여서 새끼를 꼬고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죽은 산짐승 고기를 먹다가 변을 당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50여일에 걸친 ‘죽음의 공포’

11사단의 함평 민간인 학살은 12월 7일에도 계속되었다. 20연대 2대대 5중대 군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월야면 월악리 내동, 지변, 성주마을과 바로 이웃에 있는 월야리 순촌, 송계, 동산, 괴정 등 7개 마을에 들어가 전날과 동일한 방식으로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이 마을들은 월악산의 서남쪽 자락에 옹기종기 자리잡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동래 정씨와 진주 정씨가 집단으로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군인들은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총을 쏘면서 동네를 포위하고 불을 지르며 주민들을 불러냈다. 군인들의 인솔 아래 주변 마을 사람들은 남산뫼로 모였다. 영문도 모른 채 모여든 500여명의 주민들 앞에서 선무공작대장 윤인식과 5중대장 권준옥이 일장연설을 했다. 이때 권준옥은 “너희들 같으면 도저히 시국을 안정해 나갈 수 없다. 너희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어서 군인들은 주민들을 나이에 따라 분류하였다. 17세 미만과 17~45세, 45세 이상, 그리고 군경가족으로 분리하였다. 먼저, 군인과 경찰가족 또는 유가족은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 군인에게서 온 편지를 갖고 있는 사람도 나오라고 했다. 이때 정병우는 호국군 장교라고 신분을 밝혔다가 오히려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 그는 증명서를 내 보이며 자신은 “방위군(호국군) 소위인데 후퇴를 못하고 이 마을에 숨어 있다가 여러분들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2킬로미터쯤 떨어진 월야면 계림리 시목마을 사람으로 집에 있으면 공비들에게 신분이 탄로날까봐 이 마을 처갓집에 숨어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권준옥은 ‘뒤로 돌아서’라고 명령한 뒤 그가 돌아서자 뒤통수에 두발을 쏘아 사살했다.

권준옥은 17세 미만과 45세 이상의 주민들에게는 마을로 내려가 아직 타지 않은 집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군경 가족을 제외하고 이제 17~45세의 남녀 사람들만 남게 되었다. 구덩이처럼 움푹패인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엎드려’라는 구령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M1소총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불을 뿜었다. 3정의 기관총도 함께 불을 뿜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엎드렸으나 총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총을 맞고 쓰러진 상태에서 권준옥은 이렇게 외쳤다. “살아 있는 사람은 모두 일어나라. 여러분은 하느님이 돌봐서 살아있는 것이니 모두 살려주겠다.” 50여명의 주민들이 일어났다. 그러자 권준옥은 다시 ‘엎드려’ 소리를 외쳤고, 동시에 병사들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1차 확인사살이었다.

그런데 또 다시 권준옥이 외쳤다. “이번에는 꼭 살려주겠다. 살아있는 여러분은 진짜 명당집 자식이고 또 하느님이 돌봐준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일어나라.” 권준옥은 “정말 살려주겠다”는 말을 수차례나 반복했다. 한번 속았던 사람들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반복되는 감언에 또 다시 10여명의 사람들이 일어났다. 그러자 권준옥이 외쳤다. “여러분은 진짜 하느님이 돌봐주신 것이니 살려주겠다. 동네에 빨리 가서 불을 꺼라.”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10여명이 사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을 향해 기관총을 불을 뿜었고,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고 모두 쓰러졌다. 2차 확인 사살이었다. 그런 다음 중대장은 “살아있는 사람은 모두 확인해서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3차 확인사살이었다. 그 와중에도 생명이 붙어 있는 사람이 있었다. 사건 당일 유족 중 일부는 학살현장에서 시신을 수습하였고, 생명이 붙어 있던 몇 사람은 집으로 데려왔으나 치료를 할 수 없어서 대부분 사망하였다. 권준옥은 스스로 절대자 흉내를 내며 마을사람들의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죽였다.

학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2월 9일에는 5중대 군인들이 100여 가구가 살고 있는 함평군 월야면 외치리 외치마을과 함평군 나산면 이문리에서 주민들을 학살했으며, 12월 31일에는 함평군 해보면 대창리 성대마을에서 학살을 저질렀다. 이때 군인들은 청년방위대원을 시켜 총살한 시체를 방죽(못, 웅덩이)에 던져 넣기도 했다. 1951년 1월 12일에는 함평군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에서, 1월 14일에는 나산면 우치리 소재마을에서 주민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때 소재마을 학살사건이 발생하자 이오섭 나산면장이 강력히 항의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오섭 면장은 소재마을 학살사건 소식을 들은 다음, 이대로 가면 더욱 큰 화가 면 전체에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고 권중옥 중대장을 찾아가 항의하고 나섰다. 그는 함평경찰서 나산지서장 나병오 경위를 설득하여 그와 함께 경찰과 청년방위대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보로 8킬로미터 떨어진 5중대 본부를 찾아갔다.

“나는 나산면 면장입니다. 어제 화를 입은 우리 소재마을 주민들은 아무죄도 없습니다. 좌익도 우익도 아닌 선량한 백성들입니다. 죽임을 당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면민들을 죽이려거든 차라리 나를 죽이십시오. 면민 없는 면장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면장의 항의에 권 대위는 버럭 화를 내면서 권총을 빼어들고 “건방진 자식, 쏴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이 면장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고 외쳤다. “쏠테면 쏘시오.” 그러자 중대장과 다른 군인들이 합세하여 이 면장을 군홧발로 짓밟고 주먹으로 치는 등 뭇매를 때렸다. 나아가 군인들은 나병오 지서장이 차고 있던 권총까지 빼앗았다. 그러나 목숨을 건 이면장의 항의사건은 함평군에서 자행되던 11사단 군인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제동을 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무렵 빨치산 토벌작전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는 점도 있겠지만 나산면장의 항의는 군 당국에 자성의 계기로 작용하였다. 40일 동안 함평군 월야면, 해보면, 나산면 등 일대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제5중대의 학살행위는 이후 멈춰졌다. 더욱이 이 일이 있은 지 8일 후인 1월 23일에는 제5중대장 권준옥이 연대 병기장교로 옮겨가고 이영오 중위가 새 중대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이후 ‘공포의 5중대’는 불갑산 작전에 투입되는 1951년 2월 20일까지 단 한 건의 민간인학살사건도 일으키지 않는 ‘얌전한 5중대’로 돌변하게 된다.

1950년 11월 말부터 1951년 1월 중순까지 사이에 함평군 인근에서 학살된 민간인 숫자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의하면 최소 249명이다. 함평군의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262명으로 비슷하게 접근한다. 그러나 1960년 제4대 국회의 「양민학살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524명으로 집계되어 차이가 크다. 제4대 국회의 조사가 단 하루만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사건이 일어난 지 9년만에 이뤄진 조사라는 점에서 가장 근접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국회조사의 원자료 등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정확한 근거를 확인하기 어려운 난점이 있다. 다만 당시의 국회 속기록을 바탕으로 마을 단위의 피해자를 합친 전체 피해자 규모는 607명으로 늘어나는 것은 확인이 된다. 따라서 11사단에 의한 함평 민간인 학살사건의 희생자 수는 최소 249명에서 최대 607명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함평 민간인 학살의 책임자들

1950년 11월 27일부터 1951년 1월 14일까지 사이에 전남 함평군 해보면, 월야면, 나산면과 광산군 본량면, 장성군 삼서면 수해리 등지에서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 군인들에 의해 학살된 사건을 보통 ‘함평 민간인 학살사건’ 또는 ‘함평 11사단 사건’ 등으로 부른다. 이 함평 민간인 학살사건은 그 후 같은 11사단에 의해 벌어지는 경남 거창과 산청․함양 등지의 민간인 학살사건의 전초전이었다. 만일 이 사건이 ‘거창사건’처럼 처음부터 널리 알려져 문제가 되었다면 그 다음 학살사건을 방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았고, 이 사건의 가해책임자들은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함평학살 사건의 직접적인 가해자는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중대장 권준옥 대위)이다. 같은 2대대 소속인 6중대와 비교하더라고 5중대는 규율도 미약했고 통제도 잘 되지 않았을 정도로 문제를 안고 있었다. 특히 민간인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5중대장 권준옥은 오히려 앞장서서 이 학살사건을 주도하며 가히 광적인 학살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었다. 중대장 권준옥과 일부 병사들은 부녀자에 대한 성폭행으로 원성이 자자했을 정도로 그 전부터 문제를 일으켰으며, 주민들의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쉽게 빼앗는 범죄행위를 일삼았다. 권준옥은 남산뫼 사건에서 젊은 여자를 연행하는 것을 막는 아버지를 총살하였고, 결혼을 앞둔 처녀를 성폭행한 다음 총살하기도 하는 등 인간으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위를 거리낌 없이 저질렀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5중대장 권준옥이 이처럼 잔혹한 행위를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저질렀던 것은 상부의 비호, 묵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1사단장 최덕신은 빨치산토벌과 관련한 사단작전에 대해 중국 고대부터 내려오던 이른바 ‘견벽청야’를 사단작전으로 언급했는데 이는 아래로 내려가면서 ‘빨치산이 출몰하는 지역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일선에서 토벌작전을 벌이던 하급지휘관들은 사단장의 이 같은 언급과 이를 받아들인 상부의 지시가 빨치산 출몰 지역 주민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것을 용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5중대 주변에서 활동했던 경찰과 병사들의 다음과 같은 증언에서 그런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건 전에 작전회의에는 3번 정도 참석하였으며, 한번은 월야와 삼서면 경계지역에 작전회의에 참석했는데, 대대에서 내려온 공문을 보고 중대장이 공산주의자라고 인정하고 부역을 한 사람은 무조건 50명씩 죽이라고 했는데, 결국은 덮어놓고 죽이라는 얘기였습니다.”

“5중대 군인들이 이발소에 와서 자신들이 주민들의 집에서 금반지, 분첩 등을 가져왔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하였으며, 이중 분첩은 이발소에 주고 가곤 했습니다. 크리스마스 전이었는데, 5중대 군인들 간에 어깨에 힘을 주고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 내용은 상부로부터 하루에 공비 50명씩을 죽이라는 지시가 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함평 사건의 지휘체계는 사단장 최덕신, 연대장 박기병, 대대장 유갑열, 중대장 권준옥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5중대장의 연락병이었던 김일호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중대장이 대대장한테 무슨 명령을 받았는지 뭔지 모르지만, 저 부락에서 도망해 나올 때 나이 많은 노약자, 말하자면 나이 많은 노약자는 빼버리고, 가운데 든 사람, 중간에 든 사람은 총살범위다. 그러니까 소대장한테 연락을 해라”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함평 민간인 학살사건과 관련된 군의 작전명령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11사단 9연대에 의해 저질러진 경남 거창 신원면, 산청․함양 민간인 학살사건을 통해 이 사건의 지휘․명령계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거창학살사건 재판과정에서 9연대장 오익경은, 예하부대장에게 하달한 작전명령(작명)부록에서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라고 명령하여 비전투원의 살해를 용인했으며, 재판석상에서도 “이적행위자를 발견시는 즉결하라는 지시를 하였”다고 시인하였다. 그는 이적행위자란 “적에 가담되어 아군작전에 직접, 간접으로 (거슬리는) 행동하는 자”를 지칭한다고 설명하였으며, ‘미수복지대에도 양민이 있었지만 대대장에게 즉결처분 권한을 부여한 것’은 “조속한 시간 내에 공비를 완전 소탕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거창 신원면 사건의 경우, 연대장이 공비소탕을 위해 미수복 지역의 공비협력 가능자들을 사실상의 공비로 간주해서 사살하는 것을 용인하는 내용의 작전명령을 내렸으며, 대대장 이하 지휘관들은 이 명령을 곧 ‘이적행위자를 교전 중인 적과 동일시하여 총살하라는 것’으로 해석하여 군․경 가족과 노인, 아동을 선별한 후 주민을 집단총살하였다. 이것은 거창군 신원면 사건 발생이전에 발생한 11사단에 의한 함평 민간인 학살사건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특히 함평 11사단 사건 중 남산뫼 등에서 주민을 선별하는 과정을 보면 이듬해 2월 경남 거창 등지에서 주민총살 직전 선별과정과 대단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주민 선별 후 총살’은 공식화된 작전명령에 포함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작명부록이나 혹은 비공식화된 지침으로 하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최덕신 사단장의 ‘견벽청야’ 작전개념은 연대, 대대 혹은 말단 지휘관에게는 적의 근거지, 즉 함평지역의 경우에는 미수복지역이었던 불갑산이나 태청산 인근을 초토화시키면서 적으로 의심될만한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총살하여도 무방하다는 명령으로 해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설령 5중대의 상급부대인 대대와 연대, 사단에서 직접 주민 살상명령을 내리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특정 지역 주민을 공비 내통자로 간주하고 벌인 무리한 토벌작전을 묵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그 때문에 ‘견벽청야’ 작전개념의 토벌작전은 산간지대 인접 지역 대대와 중대에서는 주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로 나타나고 말았다. 특히 거창 신원사건이 폭로된 1951년 3월 이후 이전의 모든 작명이나 작전내용이 변조, 조작, 은폐되었다.

당시 5중대장은 권준옥 대위였고, 2대대장은 유갑열 소령, 20연대장은 박기병 대령, 11사단장은 최덕신 준장이었다. 따라서 함평11사단의 민간인 학살사건의 책임은 이들 상급 지휘관에게도 있으며, 빨치산 토벌을 위해서는 ‘전투의 필요(necessity)’를 넘어서는 민간인의 무차별적인 총살을 묵인, 방관한 국가에 최종적인 책임이 있다. 한편, 당시 「정기작전보고」(1950. 10.)에 의하면 11사단이 미9군단의 지휘를 받았으므로 미9군단도 함평지역의 민간인 집단학살에 대해 보고를 받았거나 인지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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