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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김대천 선생(독일) 추모식 갖고 고인의 생애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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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9-10-18 23:32 조회1,9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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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거주 파독동포로 생활하면서 이역만리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조국통일운동에 한생을 바쳐온 김대천 선생을 그리는 추모식이 10월17일 보흠에서 열렸다. 고인은 지난 10월2일 지병으로 운명했다. 향년 76세.[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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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김대천 선생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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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행사를 치르고 현지 동포가 보내온 사진들과 고인을 그리는 추모글을 여기에 그대로 소개한다.

고 김대천 동지 추모식 

고 김대천 동지는  파독 광부 이셨다. 광산 근무중 지하1000m에서 몇차레 의 사고로 죽을 고비를 넘기신 분이다.

전태일 열사 유럽지역위원 회장을 역임 하시고  노동해방 을 위하여 헌신 하며
통일운동에 적극 참여하셨다. 

박근혜 집권시 고국을 방문 하였으나 인천 공항에서 강제 추방을 당하고 
많은 정신적인 충격을 격으셨다. 

동지는 10월2일 76세로  우리곁을 떠나셨다.

한국민중문화모임 추모식에서 동지의 애창곡 “늙은노동자"를 부르며 고인의 명복 을 빌었다.

고 김대천동지!
통일조국에서 춤 추며 부활 하소서!

 
고 김대천 동지 추모식 소식 

코레아뉴스 편집실(2019년 10월18일) 보도 

지난 10월 2일 오래동안 병으로 고생하던 김대쳔 선생이 별세하였다.

10월 14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족장을 치루었고 17일 고인이 40여년간 살던 보쿰에서 친지들과 동지들이 그가 회장을 하였던 민중문화모임에 뫃여 추모식을 열어 고별인사를 하였다.

최태호 한국민중문화모임 회장의 사회로  장경옥 선생이 가야금으로 아리랑 연주를 하여 추모식이 시작되였다.

1979년 독일 광부로 함께온 장주범 장로가 고인을 위한 성경말슴과 고별 기도를 하였고 서재기 장로가 고인의 약력을 소개하였다.

추모회는 리준식 선생이 회고시를 낭독하였고 고인이 평소 힘차게 부르던 애창곡 "늙은 노동자"를 함께 부르며 그를 회상하였다.

조선해외동포원호원원회가 보내온 추모사를 이영우 선생이 낭독하였고 한국 미국 일본지역 통일운동 단체들과 지인들이 애도인사를 보내왔다. 

추모식은 참석자들 전체가 고인의 생애를 돌아보며 고별사를 하였다.

참석자들 모두가 김대천 선생이 생전에 정많고 남을위해 배풀었던 사랑과  전대일 기념사업회맡아 군사독재시절 국내에서 탄압당하던 노동자들을 위해 많은 노력하였고 분단 조국의 하나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다며 고인이 참 사람이었음을  칭송하였다.
추모식은 고인이 생전 그렇게도 원했던 조국통일을 남아있는 우리들이 계속 할것을 약속하며 폐회하였다.


추모사 :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와 김대천선생의 유가족들에게 드립니다

우리는 자주통일운동에 앞장서온 김대천선생이 오래동안 병치료를 받아오다가
갑자기 별세하였다는 뜻밖의 비보에 접하여 슬픔을 금치 못하며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와 고인의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애도의 마음을
전하는 바입니다.

김대천선생은 민족분단의 아픔을 안고 자주통일운동에 떨쳐나 자신의 모든것을
다바쳐온 열렬한 통일운동가였습니다.

김대천선생이 그토록 바라던 통일의 날을 보지못하고 비록 우리의 곁을 떠났으나
조국통일운동에 바힌 고결한 생과 애국의 넋은 해외동포들과 우리들의 마음속에
길이 남아있을것입니다.
 
주체108(2019)년 10월 12일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민족통신 보도자료(2012년 6월11일 현지취재)



[기획-14]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독일 김대천선생 뇌수술후 회복중


작성자 민족통신 2012-06-11 19:06 조회1,677



김대천선생 사진-소형.jpg
고인의 생전 모습

 

[독일 레커링=민족통신 손세영/노길남 특파원]독일 중부지역의 보흠시 근처에 위치한 레이커링에 거주하고 있는 통일운동 인사 김대천 선생을 방문했다.

 

 그는 최근 대형 자동차 사고를 입어 병원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주변 인물들과 해외동포 통일인사들에게 걱정이 되어왔다.

 

그러나 기자가 그의 자택을 방문하였을때에는 두차례의 뇌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한달간의 치료를 받는 과정에 잠시 집으로 돌아와 요양을 받는 기간이었다. 기억력도 생생했고, 때로는 농담도 하며 멀리 미국에서 자신을 찾아 준데 대해 그의 부인과 함께 무척 고맙다고 반응했다.

 

그의 집에 들어서자 정원에 높은 깃발대에 꽂힌 한반도 통일기가 바람에 날려 휘날리고 있었다. 동내에서는 김대천 선생 하면 두개의 조국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열열인사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같다. 처음 깃발을 올렸을 때부터 주변 독일인들이 깃발이 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통일운동에 열심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에는 가정에 이종현 선생, 이한경 선생부부, 선경석 선생부부도 병문환차 방문하고 있었다.

 

김대천 선생 부인은 맥주와 안주를 대접하며 그의 병원생활과 지난 두달 동안에 일어났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병문환 통일운동 인사들은 다소 안도의 마음을 갖는 표정들이었다. 이들은 김대천 선생이 뇌를 다쳤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하고 무척 걱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달만에 가정으로 돌아 김대천 선생은 두차례의 뇌수술을 받은 결과가 좋은 것으로 드러났다. 부인에 따르면 뇌수술을 부분 마취를 하여 통증이 심했던지 수술을 끝내고 병실에 있는 동안 그것을 견디기 어려워서 인지 남편은 소리를 치며 머리에 연결한 주사기들을 모두 뽑아 버리고 병원측의 허락도 없이 어디론지 나가버렸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도 병원측이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여 그를 찿을 있었다.

 

 병원을 나간 그날 오후 늦게 거리를 배회하는 김대천 선생을 발견한 경찰들은 그를 태워 병원으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뇌수술을 받아 경과가 좋아지고 있다고 그의 부인이 기뻐하고 있다.

 

평소 그렇게 씩씩하고 정열적이던 김대천 선생은 최근에 병원생활을 탓인지 수도 적어지고 말소리도 낮아진 같다는 것이 요즘에 그를 만난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이라고 한다.

 

그는 특히 괄괄한 성격이면서 사회정의 운동이라면 만사를 제치고 참가하는 것이 그의 독특한 기질이었다. 그래서 광부출신으로 독일에 이후 초기부터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무엇 때문에 이역만리에서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환경속에서 조국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

 

김대천 선생은 1944 722 경북 상주 출생이다. 자신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무학자라고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는 아는 것이 많다는 주위 사람들의 평가이다. 그는 특히 부부관계가 좋아 가정에서는 11녀를 잉꼬부부라고 불리울 정도로 부부금슬이 좋다. 벌써 결혼생활 47돌이 되는 해를 맞고 있다. 이들은 지난 1965 한국의 충북음성에서 중매에 의해 결혼했다. 결혼한 이후 12년만인 1977 99일에 광부모집 광고를 보고 신청하여 독일에 오게되었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싫은 것도 이유가 되었고, 부정부패로 서민들의 불만이 많았던 것도 이유가 되었다.

 

 그는 초기에 한국의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열열사 돕기를 비롯하여 이후 1989 한국노동자지원운동과 함께 한국의 민주화운동, 그리고 조국통일운동에 가담했다. 1989~91년에 재유럽민족민주운동협의회(민협) 가담했고, 1990 8.15범민족대회이후 고조된 통일운동에 가담하면서 28차례 이북을 방문하면서 범민련 유럽본부 중앙위원으로 활약하며 남과 , 해외동포 3자연대운동에 참여했다. 그래서 2005 8.15 서울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광부로 이래 28년만에 최초로 남녘의 고향땅을 밟을 있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는 북을 적으로 보는 통일은 요원하기 때문에 친북소리를 들어도 동요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에 불타고 있다. 남과 북이 하나의 조국이기에 독일 땅에서 살면서도 그의 정원에는 언제나 통일기가 펄럭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서재에는 김대중-김정일 정상이 만난 사진을 표구에 넣어 벽에 걸어 놓았다.

 

김대천 선생은 이날 방문한 여러분에게 감사하다고 말한다. 한편 그를 방문한 손님들은 수술한 자리가 많이 치료되었고, 교통사고였지만 두번의 수술이 되어 다행이라면서 다시 한번 위로하고 멀지 않은 자주, 민주, 통일운동의 현장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작별인사를 나눴다.()

 

*연락처(전화): 독일 레크링하우센02361-36868

 

 

<꼬레아뉴스 2019년 10월4일 보도자료>


'고 김대천 선생을 추억 하며...  



김대천선생 사진.jpg


재도이췰란트동포협력회 창립 회원인 고인을 회고하여 이 글을 바친다.


김대천 선생은 1944년 722일 경북 상주에서 출생하였다.

 

1965년 송세원 여사와 결혼하여 1남 1녀의 자녀를 두었고 1977년 광산근로자로 독일에 욌다.

 

그는 항상 자신을 무학자라 하지만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에 대하여 박식하였으며 특히 군사독재치하에 고통당하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생각하며 전태일기념사업회 독일지부의 책임을 맡아 활약하였고 분단에서 통일을 염원하여 1991년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유럽지역위원회 중앙위원과 1996년 재도이췰란트동포협력회 상임위원 2005년 6.15 공동선언실천 유럽지역위원회 운영위원등을 맡아 통일운동 동포운동에 큰 자욱을 남겼다.

 

1990년 평양에서 열린 남 북 해외 공동의 조국통일범민족대회에 참가한 후부터 주재 공관원들은 그를 북의 앞잡이로 몰아 동포사회에 로부터 고립시키려 하였으나 김대천 선생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고 나는 우리나라가 통일만 된다면 이보다 더한 소리를 들어도 좋다며 함께하는 동지들을 격려하고 더욱 열성을 내었다.

 

김대천 선생은 언제나 낙관과 신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즐겁게 하였고 미망인 송세원 여사의 한국 토종음식과 후안 인심으로 독일은 물론 국내에서 오는 손님들을 친형제같이 맞아주었다.

 

그가 생전에 우리나라의 통일을 염원하며 집 정원에 직접 손으로 만들어 놓았던 통일한반도 모양의 분수가 아직도 눈에 선한다.

 

언제나 웃음띤 얼굴로 멎아주던 그이 모습과 걸걸한 음성을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다니 너무 애석하다.

 

김대천 동지여당신이 그렇게도 바라던 통일된 조국을 위해 남아있는 우리가 계속 노력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못 이룬 한 다 내려놓고 저세상에서 편히 쉬세요,

우린 다시 만날 것입니다.

 

고 김대천 선생을 생각하며...

 

재도이췰란트동포협럭회 올림


.유럽 민주 통일운동가 김대천 선생이 2019년 10월 2일 14시에 프랑크푸르트 대학병원에서 오랜 병환으로 고생하시다  별세하셨다.

장례식일정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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