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4]재중동포들의 뿌리를 알아본다<br>“낮과 밤 차이와 빈부격차 증가될 전망” > 사회, 문화

본문 바로가기
2025년 11월 2일
영문뉴스 보기
최신게시글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사회, 문화

[기획-4]재중동포들의 뿌리를 알아본다<br>“낮과 밤 차이와 빈부격차 증가될 전망”

페이지 정보

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2012-05-12 20:09 조회2,194회 댓글0건

본문

[심양/단동=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중국의 대도시들의 낮과 밤 풍경이
다르다. 겉모습도 다르지만 그 내용들도 사뭇 다른점들을 발견한다. 베이징이나
샹하이 같은 국제도시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치는 공산당이 확고하게
틀어쥐고 일원화 구조로 사회주의식으로 가고 있으나 경제는 개혁개방의 서방식을
도입하여 인민대중들의 빈부격차는 날이 갈수록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IMAGE##>


[기획-4]재중동포들의 뿌리를 알아본다

“낮과 밤 차이와 빈부격차 증가될 전망”



<##IMAGE##> [심양/단동=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중국의 대도시들의 낮과 밤 풍경이 다르다. 겉모습도 다르지만 그 내용들도 사뭇 다른점들을 발견한다. 베이징이나 샹하이 같은 국제도시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치는 공산당이 확고하게 틀어쥐고 일원화 구조로 사회주의식으로 가고 있으나 경제는 개혁개방의 서방식을 도입하여 인민대중들의 빈부격차는 날이 갈수록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빈부격차 심화되는 중국 대도시들 풍경


심양의 한 식당에서 접대원(waitress)으로 일하는 조선족 여성(29)은 하루 8시간 일하고 중국돈 2000원(약 330달러) 가량 받는다고 말한다. 남편은 건설회사에서 막노동을 해 왔는데 중국에 돈벌이를 하여 생활하기가 어려워 해외에 나가 8년동안 돈벌이를 하여 그 수입을 저축하는 덕택에 3년전인 2009년에 방두개짜리 살림집을 중국돈 25만원(약4만달러)으로 샀는데 지금은 그것의 값이 뛰어 50만원(약 8만달러)가량 되는 주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남편이 해외에서 돌아와 건강이 신통치 않아 쉬고 있는데 “혼자 벌어서 생활 할 수 없다고 불평”하면서 “2천원 벌어 2살짜리 아이 아주머니에게 맡기는데 한달에 1천5백원에다 이 아이 먹는 음식비 8백원 주면 우리 부부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3백원이 모자란다.”고 투덜거린다. 그는 그러면서 여행사에 웃돈으로 중국돈 10만원(1만7천달러 정도) 수수료를 주기로 2주전에 계약하고 여행수속을 밟고 있다고 털어 놓으면서 부부가 미국에 관광으로 가서 눌러 앉아 돈벌이를 할 계획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미국에서의 이민자들이나 불법체류자들이 겪는 고통과 고생스러운 삶이 어떤 것인가를 전혀 숙지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IMAGE##> 중국에서 언론인으로 활약하는 한 조선족 동포는 “식당이나 편의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보통 월급이 중국돈 2천원에서 2천5백원 정도이고, 주방장이나 대학졸업한 은행원 같은 경우는 보통 4천원에서 4천5백원 가량 받는다. 공무원들 경우는 비교적 대우가 좋다. 하급 경찰들이나 시공무원 등은 월급으로 3천5백원 내지 4천원 정도 받지만 이들은 의료보장을 포함하여 과외로 생기는 돈(비공식 수입)이 크다”고 귀띔해 준다.

한국에 나가 돈벌이를 하다가 돌아 온 한 조선족은 “한국서 주유원에서 일도하고, 식당에서 잡일도 했지만 한달에 한국돈 100만원(1천달러 정도)에서 150만원 가량 벌었지만 생활비 자체가 비싸기 때문에 저축하려면 아끼고 또 아껴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심양 노변의 장마당에서 무말랭이, 고사리, 고구마줄기 말린 것, 멸치, 산더덕, 도라지, 미역 등을 비닐 봉지에 넣어 중국돈 5원, 10원 받아가며 팔아서 생활하는 이들의 삶은 고달프다고 입을 모은다. 고달파도 벌지 않으면 살기 어렵다는 것이 이들의 하소연이다.

그런가하면 중국 부자들의 삶은 미국이나 서방세계에 못지 않다. 심양의 밤거리에는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자동차들과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석탑(시타)의 거리는 마치도 미국의 라스베가스처럼 형광등 물결이 춤을 춘다.

<##IMAGE##> 심양의 “조선백화점”과 “한백쇼핑”이라고 쓴 두곳의 풍경은 서방세계의 화려한 백화점들과 흡사하다. 없는 물건들이 없다. 세계 명품들이 진열되어 고객들의 눈을 끈다. 중국돈 몇백원, 몇천원을 척척 내며 물건을 사는 남녀 고객들이 여기저기에서 눈에 띈다.

자정가까운 시간에 이곳 거리를 둘러 보았다. KTV(‘귀빈팡’이라고 부름)라고 쓴 한 대형쌀롱에는 멋진 옷들을 입은 여성들과 남성들의 출입이 빈번하다. 입구로 다가가 우리말 하는 사람을 찾아 보았다. 그 많은 종업원들 중에 딱 한사람 내부통신망을 통해 불러준다.

26살 먹은 젊은이가 나온다. 이름은 리해준으로 소개한다. 기자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다음에 여기를 손님들과 함께 오려고 하는데 우선 이곳이 뭘하는 곳이고 가격은 얼마나 되어야 이용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혼자경우 술값은 기본이 중국돈 3백원이고 여자 팁(봉사료)은 2백원이고, 그리고 남자 봉사원에게는 2백원을 주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비용이라고 설명한다. 이 보다 낮은 쌀롱의 경우는 2백원+100원+100원으로 모두 4백원이 있어야 여성 접대원 데리고 술한잔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장래는 밝다고 세계경제인들은 전망하지만 자유시장경제 바람과 함께 들어 온 퇴폐문화의 후유증도 밝은 전망 못지 않게 심각해 질것으로 예상된다.

부동산업을 경영하는 한 조선족 동포는 서민들이 집 한채 마련하기는 점점 어려워진다고 우려하면서 “조선백화점이나 큰 기업들을 가진 동포부자들도 좀 있긴 하지만 대부분 월급을 받아 생활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하면서 “이들이 55평짜리 집을 장만하려면 적어도 29만원, 72평짜리가 45만원, 85평짜리가 65만원, 106평짜리가 88만원, 128평짜리가 110만원이고 2백만원, 3백만원 등의 돈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자세히 소개해 준다.

그는 이어 “한국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처음에는 좋은 인상들을 주었으나 지금은 투자한다는 사람들이 있으면 이 사람이 진짜 투자 할 사람인가 의심부터 시작한다.”고 말한다.

기자는 그것이 무슨 뜻인가를 물었다.

<##IMAGE##> 한국투자가들은 많은 사람들이 허풍이 많다는 것이다. 사업한다고 와서 조그만한 가게를 경영하며 적법한 일보다는 불법적인 일들을 많이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면 안마가게를 경영하며 성문란 행위를 조장하는 사업에 손대고, 한국에 데려가 좋은 직업을 준다고 하고서 엄청난 돈을 받아 놓고는 사라지는 등 한국인들에 대한 인상이 별로 좋지 못하다고 꼬집기도 한다.

그는 또 이곳에 와서 불법으로 되어 있는 선교사업을 노골적으로 하는 광신적인 기독교 신자들이 대부분 한국에서 온 기독교 목사들이나 신자들이고 비판한다. 이들이 탈북자들을 양산하는 불법적인 행위와도 연계되어 온 것으로 들어 왔다고 말한다. 중국 당국은 이러한 불법행위들이 한국정부와 미국정부의 지침을 받는 사실을 간파하고 탈북자 문제처리는 중국정부의 자주권에 관한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이들 월경자들을 북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중국의 자주적 외교권에 해당한다고 반박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중국의 평등사회 미래가 불투명하다.


기자가 만난 또 다른 지식인 중 한 사람인 조선족 동포(55, 교육공무원)는 중국의 이러저러한 사회적 문제들이 존재하지만 그 미래는 줄기차게 갈 것으로 본다고 긍정적으로 내다본다.

그는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에 일어났던 혼돈의 시기(1966~1976)에 우여곡절들이 있었으나 중국 당국자들은 지혜롭게 정리하며 오늘에 이어졌다고 평가하고, 문화대혁명 자체도 긍정부분과 부정부분이 혼재되어 있지만 중국 공산당은 긍부정을 모두 결합하여 중국식 나름대로의 사회주의로 나가고 있다고 풀이해 준다.

문화 대혁명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동안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벌어졌던 사회적, 정치적 격동으로, 공식 명칭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문화 대혁명(무산 계급 문화 대혁명이며, 약칭으로 문혁(文革,중국 말로 원거)이라고 한다. 이 운동은 이 기간 동안 전국적인 혁명의 기운과 혼돈 및 경제적 혼돈을 유발했다.

<##IMAGE##> 이 운동은 1966년 5월 16일 중국 공산당의 총서기인 모택동(마오쩌둥)의 제창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부르주아 계급의 자본주의 요소가 공산당을 지배하고 있으니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중국의 젊은이들이 사상과 행동을 규합해 "혁명 후의 계급 투쟁"을 통해 이런 것들을 제거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중국 전역에서 벌어진 모택동 지지 군력인 홍위병의 움직임으로 구체화되었다.

모택동이 이것을 부르짖게 된 배경은 소련의 잘못된 수정주의가 중국에서도 재연되는 것을 방지하고 중국에서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천명한바 있었다. 그러나 모택동 주석 자신이 시도한 대약진운동에서 파멸적인 결과를 빚어 당에 대한 권력과 영향력이 등소평(덩샤오핑)과 유소기(류샤오치)에게 넘어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라는 학자들의 주장도 있다고 한다.

모택동 주석은 1969년 공식적으로 문혁이 끝났다고 선언하였으나, 사실상 1976년 그의 죽음과 사인방의 체포까지 벌어졌던 여러 혼돈과 변혁을 통틀어 문화혁명기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문혁의 공과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1981년에 이를 모택동 주석의 과오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고, 림표(린뱌오)와 사인방도 주요 책임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재중동포들은 이러한 파동이 일어났던 시기에는 재중조선족들을 포함하여 56개 소수민족들도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소용돌이 바람은 모택동 주석의 사망과 함께 새 국면으로 접어든다. 1976년 9월 9일, 모택동 주석은 서거했다. 문화 대혁명 동안 형성된 모 주석의 영상은 중국 인민대중과 항상 함께한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서거 소식은 중국인민들에게 슬픔을 안겨주었고, 사회주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서거발표가 공식으로 발표되자, 거리에서는 통곡하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공공기관은 1주일 넘게 문을 닫았다.

그러나 예젠잉과 같은 유력한 군지도자와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덩샤오핑, 그리고 인민해방군의 지지아래서 화궈펑은 사인방의 체포를 명령하였고, 같은 해 10월 10일, 8341 특수연대는 사인방 전원을 체포하였다. 역사적으로는 이것을 문화 대혁명 시대의 종말로 간주한다.

<##IMAGE##> 화국봉(화궈펑)은 공식적으로 사인방을 비판하고, 그들을 체포하였지만, 그도 모택동의 이름을 빌어 모 주석시대의 정책을 옹호하였다. 그는 "양개범시"(兩個凡是)(마오쩌둥이 "결정한 것"과 "지시한 것" 두 가지는 무엇이든 옳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모택동 주석이 행한 정책은 모두 옳고, 이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덩샤오핑과 마찬가지로 화궈펑의 목표도 문혁으로 야기된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좀 더 실용적이었던 덩과는 달리 화는 1950년대 소련의 통제경제를 모델로 한 정치경제 구조를 선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국봉(화궈펑)의 등장에는 재야에 있던 등소평의 도움이 절실했다. 비록 사인방에 의해 당에서 축출되었지만, 등소평은 당내에서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었다. 10월 10일, 등소평은 개인적으로 화궈펑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을 복권, 복직시켜줄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예젠잉은 등소평이 정무원에 복직되지 않으면 자신이 사임하겠다고 화궈펑에게 압력을 가했다는 뒷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압력하에서 1977년 7월 화궈펑은 등소평을 다시 정무원으로 복직시켜 부총리에 임명하였고, 당직도 복원시켜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
그 이후 등소평은 화궈펑 다음 2인자가 되었다. 8월 제11차 중앙위원회가 베이징에서 열려,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화궈펑, 예젠잉, 덩샤오핑, 리셴녠, 왕동싱이 이 서열순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등소평은 1978년 5월, 자신의 피후견인인 호요방(후야오방)을 더 승진시킬 기회를 만든다. 후는 "광명일보(光明日報)"에 기고하면서 모택동 주석의 어록을 인용하여 등소평의 이론을 높이 평가해 주었다. 이 기고문이 발표된 후, 후와 덩의 지지는 확산되었다. 7월 1일, 등소평은 대약진운동에 관한 모택동 주석의 자아비판서를 공개하고 자신의 지지기반을 넓혀가다가 1978년 9월부터 화궈펑의 정책을 비판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 결과 1978년 12월 18일, 중국공산당 제11차 중앙위원회의 제3차 전체회의에서 등소평은 "사상의 해방"이 바람직하며, 당과 국가는 "실사구시"로 운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궈펑은 자아비판을 하고, 자신의 과오를 시인하게 된다. 지난 시기 모택동 주석의 추종자였던 왕동싱도 비판받았다. 이 총회에서 청명절에 열렸던 천안문(텐안먼)사건도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또한 유배중 사망한 류샤오치의 뒤늦은 국장도 치러졌다.

1980년에 열린 제11차 중앙위원회의 제5차 전체회의에서는 문혁기간에 숙청된 펑전, 허룽 및 다른 고위 인사들에 대한 정치적 복권이 행해졌다. 호요방은 당총서기가 되었고, 또다른 등소평의 피후견자인 자오쯔양도 중앙위원회에 들어왔다. 이 해 9월 화궈펑은 사임하고, 총리직은 자오쯔양이 계승하였다. 덩은 중앙군사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이로서 실용적인 개혁파 지도자로의 권력이동은 완성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걸어 온 중국은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았으나 이와는 달리 사회주의 경제의 진수가 되는 빈부격차가 없는 평등사회, 즉 이상사회의 건설에는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이 오늘의 중국이 갖고 있는 고민 중 하나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에 계속…)

<##IMAGE##>
<##IMAGE##>
<##IMAGE##>
<##IMAGE##>

*관련 보도자료 보기



한국 정부가 자칭 <자유민주주의>라고 선전하면서도 알권리를 차단해 왔습니다. 남측 당국은 한국에 거주하는 독자들이 이 보도 자료들을 볼수 없도록 인터네트 열람을 봉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족통신>은 한국 독자들이 twitter 와 facebook을 통하여 이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 주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www.facebook.com/kilnam.roh

혹은
www.twitter.com/#!/minjoktongshin





아래 보도자료 보기--짤각눌러 열람하세요!


[기획-3]재중동포들의 뿌리를 알아본다
“남북이 힘합쳐 통일하면 다들 좋은데”


[기획-2]재중동포들의 뿌리를 알아본다
“조국분단 때문에 재중동포들도 불이익”


[기획-1]재중동포들의 뿌리를 알아본다
조중관계는 지형,역사적으로 이웃관계


[기획-상]재중동포사회가 달라진다

[기획-중]재중동포사회가 달라진다

[기획-하]재중동포사회가 달라진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민족TV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자주시보
사람일보
오마이뉴스
한겨레
경향신문
재미동포전국연합회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21세기


Copyright (c)1999-2025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