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1]재중동포들의 뿌리를 알아본다<br>조중관계는 지형,역사적으로 이웃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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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2012-05-09 19:50 조회2,13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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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단동=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중국내 조선족의 정체성은 재일동포들이나 재미동포들과는 다른점들이 발견된다. 재중동포들 2백만여명 가운데 대부분은 중국공민들이다. 이들의 조국이 어디냐고 물으면 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인종이 어디에 속하느냐고 물으면 소수민족들 중 조선족이라고 대답한다. 그렇지만 조상의 나라가 어디냐고 물으면 “조선”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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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상]재중동포사회가 달라진다
[기획-중]재중동포사회가 달라진다
[기획-하]재중동포사회가 달라진다
<##IMAGE##> [기획-1]재중동포들의 뿌리를 알아본다 조중관계는 지형,역사적으로 이웃관계 <##IMAGE##> [심양/단동=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중국내 조선족의 정체성은 재일동포들이나 재미동포들과는 다른점들이 발견된다. 재중동포들 2백만여명 가운데 대부분은 중국공민들이다. 이들의 조국이 어디냐고 물으면 중화인민공화국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인종이 어디에 속하느냐고 물으면 소수민족들 중 조선족이라고 대답한다. 그렇지만 조상의 나라가 어디냐고 물으면 “조선”이라고 말한다. 심양에서 만난 손철진(55)씨라는 조선족 동포는 기자를 자기집에 초청하여 가족들도 소개하고 세상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자신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가 심양에 와서 10년째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 중국테레비죤(CCTV)과 신문, 인터네트를 통해 시사상식을 갖게 되었다면서 “요즘에는 필리핀이 중국사이에 있는 중국 소유의 황암도를 자기것이라고 우기는 바람에 중국함선이 출동했고, 일본이 이해관계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이 이곳 시사문제의 관심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러면서 자기 방에 붙여 놓은 지도를 보면서 과거에 일제에게 또는 미제에게 피해를 받으며 고생했던 나라들이 지금은 그 때의 제국주의자들이 가했던 횡포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고 일본에 붙고, 미국에 붙어 자기 줏대를 살려나가지 못하는 현상을 지적하며 안타까와 하기도 했다. <##IMAGE##> 손씨는 할아버지가 동학혁명시기에 경상도 밀양에서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주하여 이어진 3세대 자손이고 그의 부인도 밀양 박씨로 이들의 뿌리는 경상도이지만 말할 때마다 “우리는 고구려 후손으로서…”라는 말을 강조한다. 그는 또 이명박 정권에 대해 “그 사람은 한국 대통령 같지 않고 일본 대통령같다”고 전제하며 우리 조선족 동포가 한국을 방문하는 것도 까다롭게 논다며 불평하고, “이명박이도 일제에 수난받았던 과거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위안부문제, 독도문제 등을 처리하지도 못하고 일본에 붙어 반역행위를 하는자”라고 꼬집는다. 손씨는 지금 중국에서의 조선족 인구는 현재 2백만명이 된다고 말한다. 한족을 제외한 수십개의 소수 민족 가운데 13번째로 많으며 주로 중국 동북(東北=둥베이) 3성(省), 특히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조선족 인구가 분산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조선족들이 중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에 따라 취업 등을 이유로 베이징과 상하이, 칭다오 등과 같은 중국 전역의 대도시로 이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중국내 대도시에는 우리 글을 상호로 쓰는 경우들을 많이 본다. 심양의 코리아타운 “시타(석탑)도 유명하지만 심양서 3시간30분 거리에 위치하고, 조선의 신의주와 바로 인접한 거리에 있는 2백40만명의 인구가 집중돼 있는 단동시의 조선/한국의 상가들도 관광객들로부터 관심을 모으고 있다. <##IMAGE##> 심양 북역에서 고속버스를 타면 중국돈 82원(미국돈 12달러 정도)이면 3시간 30분만에 단동을 갈 수 있다.기자는 조국반도와 붙어 있는 단동으로 내려갔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중국이 바로 옆에 인접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사람들이나 남북 동포들과 해외동포들에게 이 지역은 퍽 친근한 지역으로 여겨진다. 압록강을 끼고 펼쳐진 중국쪽의 강변도로에는 우리 민족의 치미저고리를 걸어놓고 관광객들에게 빌려주고 약간의 임대비를 받는 장사꾼들도 있고, 김일성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정숙 항일여성투사 세분의 얼굴이 들어간 우표를 넣고 북조선 돈들을 종류별로 넣어 사진첩을 만들어서 중국 돈 20원 혹은 25원에 팔고 있는 장사꾼들도 보인다. 압록강변 거리에는 또 바닥에 깔개를 펴 놓고 북조선 담배들을 종류별로 진열하고 파는 중국인 아주머니들도 눈에 띈다. 그런가하면 결혼식을 마치고 이곳에 와서 기념사진을 찍는 신혼부부들도 있고, 강아지들을 데리고 나와 산책하는 남녀노소들, 제기차기 등 간단한 운동기구들을 갖고 나와 가벼운 운동을 하는 시민들, 크고 작은 라디오를 들고 나와 음악을 틀어놓고 율동체조를 하는 단동시민들의 모습 등 강변 곳곳에는 구경꺼리도 많이 눈에 띈다. 이 강변도로에는 단동과 신의주로 연결되는 조-중우의교(朝中友誼橋=기차철도와 승용차들이 함께 건너 다닐수 있는 다리)가 보인다. 그리고 동쪽으로 30여분 승용차로 달려가면 그곳에는 베이징의 만리장성을 흉내낸 ‘호산장성’이 최근에 건설되어 외국인 관광객들과 단동시민들의 유원지가 되고 있다. 호산장성 앞쪽에는 민속촌 같은 것을 건설하기 위해 공사판이 벌어지고 있다. 호산장성을 구경하는 입장료는 중국돈 60원(9달러 50센트 정도)이다. 장성 꼭대기까지 오르내리는데 약 한시간 20분정도 걸린다. 정상에 오르면 신의주 지역의 농촌마을이 보인다. 이 곳을 내려오다가 호산장성 초입구 굴다리를 빠져나가면 조선과 중국을 가르는 강의 넓이가 5~6메터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쪽에는 중국군 2명이 관광객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는 모습도 보게 된다. <##IMAGE##> 단동시 압록강변에는 심양시에 소재한 시타(석탑)처럼 조선식당들도 보이고, 한국식당들도 함께 보인다. 최근 료녕성 통계부처에 의하면 현재 성내 소수민족 분포는 55개 민족으로 그중 만족이 534만명, 몽골족이 66만명, 회족이 25만명, 조선족이 약 24만명, 시버족이 13만명으로 조선족은 료녕성내 5대소수민족으로 집계된다는 것이다. 료녕성 소수민족인구 총수는 664만 3천명으로 료녕성 전체인구 4,375만명의 15.2%에 해당되고, 조선족은 전체 소수민족 분포에서 3.6%를 차지한다. 제6차 료녕성 조선족인구상황을 보면 5차조사때와 마찬가지로 성 산하 14개 시에 조선족이 모두 분포되여있음을 알수 있다. 인구가 1만명 이상인 도시는 아래와 같다. 심양(9만 2,114명), 무순(3만 8,688명), 대련(2만 3,268명), 철령(1만 8,057명), 단동(1만 6,974명), 본계(1만 3,599명) 등이다. 6차조사와 5차조사시 각 시별 수자를 비교해보면 대련, 본계, 단동, 영구 등 시가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단동시에서도 통일운동을 하면서 알게된 인사들을 만났다. 제1차범민족대회 재중동포대표단 단장으로 왔던 고 이철재 선생 부인과 그의 아들 리훈씨와도 만났고, 재중조선인총연합회 단동지부의 주계숙 선생, 재중동포 경제인협회의 김향옥 선생, 그리고 평양에서 그림들을 들여와 단동에서 화랑을 경영하는 리일숙 선생 등과도 만나 이 지역의 사정에 대해 이모저모를 들으며 교제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이들은 “단동은 조선과의 활발한 무역관계로 지난 수년간 대단히 발전해 왔다”고 입을 모으면서 “중국의 발전과 조선의 발전과 함께 향후 조선의 신의주와 단동시는 함께 발전하는 시들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이곳에는 조선학교 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도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압록강변을 중심으로 건설된 단동시는 관광도시로, 인천과 단동을 잇는 항구도시로서 교통중심 도시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재중동포들의 뿌리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중국내 조선족이 언제부터 중국에 존재해 왔는가를 알기 위해 자료를 찿아 보았다. <##IMAGE##> 우리나라와 중국의 교류 역사는 아주 오래되었다. 기원전 24세기 경에 이미 만주 지방에는 조선족의 조상이 되는 우리 선조들이 살고 있었다. 기원전 10세기 무렵에는 우리 조상인 예맥족이 고조선을 건국 하였고, 기원전 2세기 무렵에는 우리민족의 구성원의 하나인 부여(예맥)족이 부여를 건국했으며 기원전 37년에는 부여 출신 주몽이 고구려를 세웠다.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고구려 유민 일부는 말갈족과 연합하여 발해를 건국했다. 발해는 우리 조국반도 북부와 만주 지방, 연해주 지방 등지를 통치하였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 고구려계 발해 유민의 일부는 고려로 귀의했지만 나머지는 만주를 지배했던 북방민족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17세기 초반부터 조선인이 현재의 랴오닝 성에 정착했다는 설이 있고, 17세기 말부터 조선인의 일부가 중국 동북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청나라는 동북 지역을 조상들이 유래한 곳이라 하여 비워두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이주하기 쉬운 여건에 있었다. 이들은 화전 등으로 밭을 일구거나 인삼 등을 채집하였다. 1869년에는 조국반도 북부에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자 많은 조선인들이 건너오게 되었고 이로 인해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국경 분쟁이 자주 발생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는 두만강 건너편의 조선인 거주지를 간도라고 불렀으며 압록강 건너편의 조선인 거주지를 서간도라 불렀다. 조선인들이 청나라 영토로 유입하는 현상은 1885년 청나라 정부가 조선인의 만주 이민 금지령을 철폐하면서 크게 증가하게 된다. 1910년 대한 제국이 일본 제국에 강제 합병당하자 일제의 토지 수탈로 토지를 잃은 조선 농민, 일제의 탄압으로 조선 내에서 독립 운동을 일으키기 어려워진 사람들 등 다채로운 계층의 주민들이 만주나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김일성장군은 중국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며 자체의 무력역량을 꾸리는가 하면 중국군과 연군하여 대일투쟁 전선을 벌여 혁혁한 공을 세워왔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 역사가 깃들어 있는 중국 동북3성지역은 조선과는 떼어 놀 수 없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IMAGE##> 첫 무장투쟁대오인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식을 진행한 소사하 토기점골은 안도현에 있는 농촌마을도 역사의 한페지에 나타난다. 안도는 우리나라 북부지대와 잇닿아있으며 두만강연안의 연길, 화룡, 성청, 훈춘 지구와 무송, 화전, 돈화 지구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구는 또한 백두산줄기와 영액령산줄기에 에워싸여있는 산악지대로서 산세가 험하고 1920년와 1930년 초 당시에는 일제의 마수가 덜 미치고 있어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조직 전개하는 데서 매우 유리한 곳이었다고 한다. 1926년 6월 5일 김일성주석의 부친, 김형직 선생이 옥고를 치른 후유증으로 세상을 뜨자 김일성 주석은 바로 독립군 양성소인 화성의숙에 입학하였다가 1926년 12월 초 길림 육문중학교에 편입하면서 활동무대를 길림으로 옮긴 역사의 지역도 이곳에 있다. 그 후 김일성 주석의 강반석어머니와 두 동생은 거처를 안도로 옮기게 되고, 세상을 뜨게 되었던 1932년 여름까지 강반석어머니는 이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두 동생과 생활하며, 부녀회를 조직하여 군복을 짓는 등 김일성 주석의 유격대 창건을 도왔다는 기록도 있다. 김일성 주석이 육문중학교 시절 반일단체 비밀회의를 하던 장소도 있다. 그곳은 ‘약왕묘’ 절간인데 그 뒤편에 음식물 보관용 지하실이 있다. 그 건물 입구엔 ‘김일성주석 혁명활동지하실’이라는 깨끗한 문패가 걸려있고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 사적지에 대한 간단한 해설이 걸려 있다.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 그발이 발견된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조선인민의 위대한 수령, 중국인민의 친밀한 벗인 김일성 주석께서 길림육문중학교에서 공부하는 기간에 청년학생들을 조직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중국반동정부를 반대하는 투쟁을 적극적으로 조직하였으며 이 지하실에서 여러 번 비밀회의를 조직하였다.” 길림에서 청년학생운동을 전개하던 김일성 주석은 1929년 가을 반동경찰에게 체포되었다가 1930년 5월초 감옥에서 나오자, 감옥에서 구상한 당창건 사업과 항일무장투쟁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그 결과 김일성 주석은 1932년 4월 25일 토기점골 등판에서 100여명으로 구성된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식을 진행하게 되었고 그것을 본 후 몇 달 뒤 강반석어머니이 세상을 떠난 이야기도 있다. 1936년 국제공산당 7차대회에서 조선족과 한족이 연합하여 통일전선적인 항일혁명군을 조직하고 연대, 연합하여 싸우라는 결정에 따라 체계적인 항일연군을 조직했는데 3개방면군 아래 총 11개 군이 조직되었고 각 군은 여러 개의 사단과 독립사단으로 구성되었다.이 중 일부는 일제에 투항하거나 와해되기도 했지만 전성기에는 수만~수십만의 대오를 이루어 100만 관동군과 유격전법으로 맞서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는 기록도 발견된다. <##IMAGE##> 총을 든 병사들의 구성원을 보면 김일성 주석이 실질적 책임자였던 2군(초기엔 2군 6사 사장이었다고 한다.)의 경우 대다수가 조선족이었고 나머지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이끌었던 군들도 절반 이상이 조선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이런 부대들의 지휘관들은 80% 이상이 조선족들이었다. 이중 김일성 주석이 이끈 부대의 전투력이 막강했는데 백전백승이었다. 단 한번도 실패한 전투가 없을 정도로 일제가 세계 최정예라고 떠들던 100만 일제 관동군을 완전 공포에 몰아넣었던 역사는 이 지역 중국동포들도 다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주보중, 양정우, 리현록, 왕덕태, 위증민 등 중국의 공산당 간부들이 이끈 항일혁명군도 잘 싸웠지만 이들보다 김일성 주석이 이끈 항일혁명군의 위력이 대단했다는 사실은 일제가 공표한 항일 지도자들 현상금 액수 중을 통해서도 나나탄다. 다시 말하면 김일성 주석의 현상금 액수가 그 누구보다 월등하게 높았다는 사실에서도 김 주석의 활약상이 반영되고 있다. 이런 기록도 있다. “1939년 5월 18일, 장백의 5호물동으로 압록강을 건넌 항일련군(조선족들에게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도 했음) 제 1로군 제2방면군(주로 한국사람들로 구성)은 총 지휘 김일성 장군의 지휘하에 조선무산지구에서의 진공작전을 성과적으로 진행한 후 5월 말에 화룡현 광평부근에서 감쪽같이 두만강을 건너들어 오면서 바야흐로 올기강 전투가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김일성 장군은 제7련대(북에서는 오중흡 연대로 유명하다고 함)를 올기강 서쪽지대에서 활동하게 한 후 직접 경위중대와 8련대 독립대대를 인솔하고 두만강 물줄기를 따라 동쪽의 옥돌골, 휘충동일대로 이동하였다.” 1940년 초 만주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김일성 주석이 러시아 원동 기지로 거점을 옮겼다는 사실도 기록을 남아있다. 김일성 주석은 원동기지에서도 변함없이 여러 소부대를 국내와 만주 일대에 파견하여 물자를 나르는 일제 기차나 일제 통치 기관을 공격하거나 반일지하조직을 건설하는 일을 왕성하게 전개했는데 김일성 주석도 직접 소부대를 이끌고 자주 국내와 만주 일대에 진출했었다고 한다. 특히 중국 한족 출신 전우였던 위증민을 찾기 위해 나왔을 때는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곳곳에 진출했었다는 사실도 이곳 조선역사 학자들이 밝힌다. 다시 말하면 중국 동북3성 지역의 1920년대, 1930년대, 그리고 1940년대의 역사는 김일성 주석과 그의 가문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다음에 계속) <##IMAGE##> <##IMAGE##> www.facebook.com/kilnam.roh 혹은 www.twitter.com/#!/minjoktongsh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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