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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태일. 신은미 선생 방문을 앞두고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협곡인 그랜드 캐년. 기자는 자연 재앙의 깊은 상처를 느꼈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 |
기자가 미국을 방문해 신은미 교수댁을 방문하고 난 후 소감을 쓰기로 작정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말 우연히 정태일 선생과 신은미 교수댁을 벼락 맞듯 방문할 수 있었고 직업병(기자는 늘 기사 거리를 찾는)이 발동하여 글을 쓰게 되었고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기자가 글을 올리고 난 후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했고 독자들은 전화를 걸거나 직접 만나면 2편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
그러나 미국 방문 일정이 워낙 짧아 바쁘게 소화하고 귀국해서도 여러 가지 일정과 여독이 풀리지 않아 글을 올리지 못했다. 독자들의 속을 태운 점 정중히 사과드린다.
여하튼 미국에서 정태일. 신은미 선생과의 만남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미국에 도착하여 일정을 짜는 중 나를 안내한 손세영 선생께서 미국에 왔으니 여행을 몇일하면 좋을 것 같다고 제의했다.
사실 10여년전 LA를 취재차 방문해 안내자도 없이 헐리우드 거리와 유니버설스튜디오, 그리고 최대의 놀이동산으로 알려진 디즈니랜드, 그리고 도박과 환락, 지하 노숙자들의 소비도시 라스베가스를 방문한 적은 있지만 영국의 BBC가 꼭 가봐야 할 세계의 명소 중에서도 첫 번째로 꼽은 그랜드 캐년은 가보지 못했는데 바로 그곳 여행을 손세영 선생이 추천했다.
잠깐 미국 그랜드 캐년을 다녀오지 못한 독자들에게 그곳에 대한 기자의 느낌을 전하자면‘자연의 재앙이 남긴 상처’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이었다. 반면 우리나라의 설악산이나 금강산은 그야 말로 ‘빚어 놓은 듯한 창조’의 미가 넘친다는 것이다. 이는 기자만이 가지는 생각일 수 있으니 길게 쓰지 않겠다.
글이 옆으로 샜다.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이드가 전화를 나에게 바꿔 주었다. 손 선생이었다. 원래 일정이라면 LA에 도착해야 하는데 조금 못 미치는 다아몬드 바라는 지역에서 내려 그 곳에서 기다리면 마중을 나오겠다고 하신다. 넓은 미국 땅에서 미아가 되지 않기 위해선 시키는데로 하는 수밖에는 다른 길이 없지 않은가.
다이아몬드 바라는 지역에 내리니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남체인이라는 대형 상점이 있어 밀린 화장실 숙제를 풀고 기다렸지만 20분이 지나도록 손 선생님과 일행이 도착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고백이지만 30분이 거의 지날 때 쯤 정말 속된 표현으로 국제미아가 되는 것은 아닌지 상당히 쫄았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것인지, 교회전도지를 돌리는 한국인이 있어 전화를 빌려달라고 하니 선 뜻 빌려주었다. 역시 같은 피를 나눈 민족이 이래서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면식도 없던 사람과 같은 민족이라는 하나의 이유로 일행이 올 때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앙과 출생지, 정견이 달라도 같은 언어로 동포의 정이 담긴 대화를 나누며 아! 남북의 동포도 이렇게 만나 적대감을 버리고, 편견 없이 서로를 한형제로 대하면 통일이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마음을 조리던 끝에 만난 일행을 보니 길 잃은 아이가 부모를 만난 듯 기뻤다. 승용차에 올라 곧장 정태일. 신은미 선생댁으로 향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목적지 정문에 도달하니 마을 앞에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고 경비원이 차를 세웠다. 한눈에 봐도 부자 동네임을 알 수 있었다.
운전자는 방문지 주소를 대고, 자신의 신분증까지 보여 준 다음 경비원의 확인 끝에야 정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당시 그 곳이 신은미 선생댁을 가는 통과절차라 생각지 않고 어느 학교나. 관공서를 들어가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정문을 지나서도 꽤 긴 거리를 가서야 신은미 선생댁이 나타났다. 언덕위에 지어진 2층 주택은, 나 같은 한국 빈곤층 서민을 압도했다.
| ▲ 정태일. 신은미 교수는 내면이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정. 신 선생을 만나며 거짓된 반북교육과 이념교육이 남북 동포는 물론 같은 남한사람들 마져 진보와 보수로 갈라 놓은 것이라는 확신에 남측 독재정권 부패정권에 화가 났다. ©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 |
정태일 선생이 나와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서울에서 강연회에서 인사를 나눈 구면이라 낯이 설지는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니 집의 규모가 밖에서 본 것보다 훨씬 컷다. 나는 두 번째 쫄았다.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주택을 방문한 셈이니 말이다.
신은미 선생이 아주 오래 된 편안한 사이처럼 우리를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주택 뒤에는 수영장이 있었고 뒷 정원은 아담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내가 정태일. 신은미 선생댁을 방문하면서 큰 충격에 빠졌다는 것은 집의 규모도 규모이고 미국 사회에서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살면서도 온갖 오해와 편견, 험담과 종북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아랑곳 하지 않고 조국통일과 민족의 하나 됨을 위해 남과북을 오가며 재외 동포들과 함께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숭상하는 돈을 들여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자는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나 계급적으로 신은미 선생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민족이라는 이름 속에 모든 것이 녹아들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더 크게는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최고봉이라는 미국의 시민권을 가진 정태일. 신은미 선생 부부가 사회주의의 가장 정점에 서 있는 북을 방문하여 하나의 거리낌도 없이 북녘 동포들과 관리들을 만나 한 핏줄을 나눈 형제로 지내는 것을 보면 분명 분단의 문제와 통일의 과제를 푸는 것은 계급과 이념, 사상과 정견의 문제가 아니라 것과 이를 초월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태일. 신은미 선생의 집을 방문해 느낀 것은 항일혁명 시기 민족주의자도,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 사람도, 대지주도, 상공인도, 노동자도, 농민도, 종교인도, 지식인도 청년학생과 심지어 어린이들도 정견과 정파, 사상과 이념, 계급을 떠나 조국해방을 위해 함께 한 것처럼, 지금도 남북 해외동포 8천만 겨레가 일일천추로 염원하고 있는 통일을 위해서도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 ▲ 정태일 신은미 교수 부부를 만나면서 조국통일과 민족의 하나 됨을 위해서는 신분과 계급을 뛰어 넘어 모두가 하나가 되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신은미 정태일 선생이 내 놓은 술상은 그야 말로 전문가급© 자주민보 이정섭 기자 | |
일행이 정겨운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정돈하자 정태일 선생은 맥주를 신은미 선생은 안주를 준비해 왔다. 정태일 선생과 신은미 선생이 준비한 맥주상은 그야말로 강남의 어느 맥주집(난 가보진 않았지만)을 뺨칠 정도 였다. 특히 신은미 선생의 안주 장식은 그야말로 먹기가 아까울 정도의 환상이었다. 선남선녀에게서 받은 미국에서의 술상은 영원히 기억 될 것 같다.
기자는 맥주 한 순배로 갈증을 풀고 직업병이 발동하여 정태일.신은미 선생에 대한 질문 공세로 이어졌다. 독자들은 신은미 선생의 입담과 글 솜씨는 익히 알고 있지만 남편인 정태일 선생은 소수를 제외하고 잘 모를 것이다.
감춰진 정태일 선생의 이야기가 3편에 계속 된다. 3편은 2편처럼 그리 길게 기다리시지 않아도 됨을 살짝 알려드린다.
자주민보(11/16/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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