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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미국 항공모함은 왜 긴급구출작전 포기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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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3-01-22 20:50 조회4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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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미국 항공모함은 왜 긴급구출작전 포기했나?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간첩선에 비공식적으로 승선한 승조원 7명

2. 저인망 어선들이 간첩선을 감시하였다

3. 조선의 무서운 징벌이 시작되었다

4. 나무막대기보다 못한 미국의 핵우산


1. 간첩선에 비공식적으로 승선한 승조원 7명

1968년 1월 23일 조선인민군이 미국의 최신형 신호 정보수집 간첩선 푸에블로호(USS Pueblo)를 나포하였던 때로부터 어언 55년 세월이 흘렀다. 푸에블로호 나포 전투는 조선인민군 특수작전부대 전투원 31명이 박정희를 제거하려고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했던 1.21 사건이 일어난 때로부터 불과 이틀 뒤에 일어났다. 상상을 초월하는 두 사건이 이틀 간격으로 연속 일어나는 바람에 정세는 극단적으로 험악해졌다. 1968년 당시 서울에서 살고 있었던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중학생 철부지였는데, 전쟁이 곧 터질 것 같다고 수군거리던 동네 어른들의 근심 어린 표정이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조선인민군의 푸에블로호 나포 전투에 관한 자료들이 지난 55년 동안 남과 북, 미국에서 언론매체를 통해 공개되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산만하게 보도된 자료들을 가지고 심층정보를 분석하는 것은 쉽지 않다. 푸에블로호 나포 전투에 얽혀있는 깊은 사연을 정밀하게 추적해보자.

푸에블로호

취역일 -1945년 4월 7일

재취역일 - 1967년 5월 13일 일반환경조사보조선 2호(Auxiliary General Environmental Research-2)로 위장하고, 신호정보수집 간첩선으로 재취역되었음.

배수량 - 895t

선체 길이 - 54m

선체 폭 - 9.8m

항행 속도 - 시속 23.5km

승조인원 - 장교 6명, 사병 70명

해상 정탐 장비 - 미국의 최신형 신호 정보수집 장비와 무선통신 장비가 탑재되었음.

무장 - 12.7mm M2 중기관총 2정

1967년 12월부터 미국 국가안보국(National Security Agency)과 해군은 조선인민군의 신호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해상 정탐작전을 합동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국가안보국-해군 합동 해상 정탐작전에 신호정 보수집 간첩선들인 푸에블로호와 배너호(USS Banner)가 동원되었다.

미국 국가안보국과 해군이 푸에블로호에 내린 비밀지령은 조선 동해안에 접근해 조선인민군이 발신하는 레이더 전파를 감시하고, 무선 교신을 도청하고, 조선인민군 잠수함 엔진이 돌아갈 때 발생하는 기계 동음 음파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잠수함 엔진이 돌아갈 때 발생하는 기계 동음 음파는 잠수함마다 서로 다르므로, 미국군이 음파 정보를 확보하면, 바닷속에서 잠항하는 잠수함이 조선인민군 잠수함인지 미국군 잠수함인지를 식별하고 공격 여부를 신속히 결정할 수 있다. 조선인민군의 신호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해상 정탐 지령을 받은 푸에블로호는 1968년 1월 5일 일본 요꼬스까(橫須賀) 미해군 기지에서 출항하여 1월 11일 일본 사세보(佐世保) 미해군 기지에 잠시 들렀다가 동해로 들어갔다.

푸에블로호의 공식 승조인원은 76명인데, 당시 푸에블로호에 승선한 총인원은 83명이었다. 7명이 비공식적으로 승선한 것이다. 7명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들은 푸에블로호에 탑재된 최신형 해상 정탐 장비들을 다루는 특수요원들이었다. 그들은 푸에블로호 갑판 위에 설치된, 지름이 5m나 되는 커다란 포물면 안테나(parabolic antenna)를 사용하여 자기들이 확보한 감시자료와 도청자료를 미국 본토 메릴랜드주에 있는 국가안보국에 주기적으로 송신하였다.

1968년 1월 2일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 부국장이었던 러쎌 스미스(Russel J. Smith)가 1급 비밀문서를 작성했다. 1968년 1월 3일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장 리처드 헬름스(Richard M. Helms)는 이 비밀문서를 결재했다. 이 비밀문서는 39년이 지난 2007년 12월 기밀해제 조치에 따라 세상에 알려졌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미국 해군 함선 배너호(USS Banner)의 자매 함선인 푸에블로호가 신호 정보수집 함대에 추가로 포함된다. 이 두 함선은 신호 정보수집 함선들의 새로운 활동 영역인 북조선 영해에서 각각 다른 시간에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비무장지대에서 북조선이 취하는 적대적 태도를 보거나, 북조선 영해에 침입한 남한 선박들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보면, 북조선이 이 두 함선에 대해서도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다.”

위에 인용한 비밀문서를 보면, 미국은 푸에블로호를 조선 영해로 진입시켜 조선인민군의 신호정보를 수집하는 해상정탐계획을 추진하고 있었고, 푸에블로호와 배너호를 해상정탐작전에 차례로 투입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미국은 푸에블로호가 조선 영해로 들어가 은밀히 해상 정탐을 감행하다가 조선인민군에 발각되어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위험도 예상하였다. 그러나 미국 국가안보국과 해군은 그런 위험 예상을 무시하고 푸에블로호를 해상 정탐 작전에 내몰았다.


2. 저인망 어선들이 간첩선을 감시하였다

1968년 1월 20일 오후, 푸에블로호는 함경남도 신포 마양도 앞바다에 도착해 해상 정탐을 개시했다. 마양도에는 조선인민군 해군 제167잠수함대가 주둔하는데, 조선에서 규모가 가장 큰 해안 동굴식 잠수함기지가 그 섬에 있고, 해군 조선소도 그 섬에 있다. 매우 중요한 군사 전략거점들이다.

1968년 1월 20일 해 질 무렵, 조선인민군 구잠정(sub chaser) 1척이 나타나더니 푸에블로호로부터 3.7km 떨어진 해상을 지나갔다. 구잠정은 바닷속에서 잠항하는 적 잠수함을 찾아내어 폭뢰로 격침하는 전투함선이다. 푸에블로호 함장 로이드 부커(Lloyd M. Bucher, 1927~2004)는 조선인민군 구잠정이 자기들 곁을 무심히 스쳐 지나간 것으로 여기고 안심했다. 그래서 그들은 마양도 군사 전략거점에 대한 해상 정탐을 이튿날까지 계속 감행했다.

마양도 앞바다에서 해상 정탐을 마치고 거기를 떠난 푸에블로호는 남쪽으로 내려가 1968년 1월 22일 아침 강원도 원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원산은 조선인민군 해군기지와 잠수함기지가 있는 중요한 군사전략 거점이다. 푸에블로호는 강원도 원산 앞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 려도의 해안선에서 12.2km 떨어진 영해 안으로 들어가 원산 군사전략 거점에 대한 해상 정탐을 감행했다.

그런데 그날 정오경 뜻밖의 정황이 생겼다. 이에 관한 사연은 당시 푸에블로호 부함장이었던 에드워드 머피(Edward R. Murphy, Jr.)가 최근 취재기자에게 들려준 회고담에 들어있다. 2023년 1월 20일 <자유아시아방송>에 그의 회고담이 실렸다. 회고담에 의하면, 1968년 1월 22일 정오경 조선의 저인망 어선(trawler) 2척이 나타나더니 푸에블로호로부터 약 30m 떨어진 곳까지 바짝 접근하였다가 사라졌고, 얼마 후 다시 나타났다고 한다. 그런데 현장에 다시 나타난 저인망 어선 갑판에서 사람들이 푸에블로호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쌍안경으로 살펴보기도 하고 사진 촬영도 했다고 한다. 이것은 명백한 감시활동이었다. 푸에블로호를 감시한 조선의 저인망 어선은 논1호와 논2호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한 푸에블로호 함장 부커는 수로측량 활동을 표시한 위장 깃발을 돛대에 올려 걸라고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육안 관측과 사진 촬영을 계속하면서 푸에블로호를 근접 감시하던 논1호와 논2호는 오후 4시경 어디론가 사라졌다. 푸에블로호는 일본 요꼬하마(橫浜) 인근 가미세야(上瀨谷)에 있는 미국 해군기지 지휘관 해군 소장 프랭크 존슨(Frank L. Johnson)에게 조선의 저인망 어선 2척이 접근하여 자기들을 감시했다는 사실을 무선으로 보고했다. 그러나 일본에 주둔하는 미국 해군 제7함대는 푸에블로호에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이상징후에 관한 보고를 받고서도 아무런 대책을 취하지 않았다.

그날 밤, 푸에블로호는 자기 주변에서 18척의 선박들이 움직이는 정황을 감시레이더를 통해 포착했다. 오전 1시 45분경 푸에블로호 주변 수역에 있는 조선 선박에서 신호탄이 발사되었으나 조선인민군 전투함선은 나타나지 않았다.

운명의 날이 밝았다. 1968년 1월 23일 아침, 푸에블로호 함장 부커는 푸에블로호가 지난밤에 조선의 해안선으로부터 약 40km 떨어진 먼바다까지 밀려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 해안선으로부터 21km 떨어진 수역으로 다시 접근해 해상 정탐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국가 주권이 미치는 해역을 영해라고 한다. 원산 앞바다에서 해상 정탐을 감행하던 푸에블로호가 조선의 해안선으로부터 21km 떨어진 수역으로 들어갔던 1968년 당시 조선의 영해 범위는 해안선으로부터 22km에 이르는 해역으로 정해져 있었다. 해안선으로부터 5.5km에 이르는 해역을 영해로 인정한 미국이 자기의 낡은 영해법을 폐기하고, 해안선으로부터 22km에 이르는 해역을 영해로 인정하는 새로운 영해법을 채택한 때는 1977년이었다. 이런 사정은 1968년 당시 조선과 미국이 서로 다른 영해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1967년 12월 미국 해군 제7함대 사령부는 푸에블로호를 조선에 대한 해상 정탐작전에 동원하면서, 조선 영해의 외측 한계선은 해안선으로부터 22km에 그어졌으므로, 해안에 접근하되 해안선으로부터 24km 안으로는 절대로 들어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런 지시를 받은 푸에블로호는 강원도 원산 해안으로부터 21km 떨어진 해역에 들어갔으면서도 자기들이 조선 영해를 침범하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시각에서 보면, 푸에블로호는 조선 영해를 1km 침범한 것이었다. 만일 다른 나라의 선박이나 항공기가 조선 영해 안으로 들어오면, 조선은 그것을 침범으로 간주하고, 격추 또는 격침하거나 나포한다. 자주권을 생명처럼 중시하는 조선은 미국군이 자기 영토, 영해, 영공을 0.001mm만 침범해도 그것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그런데 조선에서 “미제의 무장간첩선”이라고 부르는 푸에블로호가 조선 영해 안으로 1km나 침범해 적대적인 해상 정탐까지 감행하였으므로, 미국은 격노한 조선의 징벌을 피할 수 없었다.

3. 조선의 무서운 징벌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조선의 무서운 징벌이 시작되었다. 20세기 세계사에 수록된 푸에블로호 나포 전투는 조선이 미국에 내린 무서운 징벌이었다.

1968년 1월 23일은 화요일이었다. 동해의 대기 온도는 영하로 떨어져 날씨는 매우 추웠다. 그날 오후 12시 15분경 동해 수평선 너머에서 갑자기 나타난 조선인민군 전투함선 1척이 푸에블로호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 전투함선은 조선인민군 해군 제155군부대 관하 전투함대에 소속된 구잠정 35호였다.

구잠정 35호

배수량 - 215t

선체 길이 - 42m

선체 폭 - 6m

항행 속도 - 시속 52km

승조인원 - 30명

무장 - 57mm 함포 1문, 25mm 쌍렬 중기관총 1정, 폭뢰발사기 4문, 폭뢰 12발

푸에블로호로부터 약 900m까지 바짝 다가온 조선인민군 구잠정 35호는 “2분 내로 국적을 밝히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공포에 질린 푸에블로호 해군 병사들은 돛대에 성조기를 올려 걸었다. 바로 그때 조선인민군 P-4 고속어뢰정 3척이 나타나 구잠정 35호와 함께 푸에블로호를 포위했고, 조선인민군 미그-21 전투기 2대가 나타나 푸에블로호 선체 위에서 낮은 고도로 선회하며 위협 비행을 하였다. 잠시 후에는 P-4 고속어뢰정이 1척 더 현장에 나타나 가세했다. 푸에블로호는 독 안에 든 쥐처럼 조선인민군 전투함선 5척의 포위망에 완전히 갇히고 말았다.

푸에블로호는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려고 단말마적인 몸부림을 쳤다. 바로 그 순간, “조선인민의 철천지 원쑤 미제침략자들을 소멸하라!”라는 조선인민군 전투원들의 함성과 함께 57mm 함포와 기관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57mm 포탄 한 발이 푸에블로호 갑판 위에 높이 달린 포물선 안테나에 정확히 명중했다. 명중탄 한 방으로 5m 지름의 원형 표적을 날려버리는 놀라운 포격술이었다. 포물선 안테나 파편 조각들이 푸에블로호 갑판에 우박처럼 우두둑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구잠정 35호가 57mm 함포를 푸에블로호 흘수선으로 발사하지 않고 포물선 안테나로 발사한 것이나, P-4 고속어뢰정 4척이 어뢰를 발사하지 않고 기관포를 발사한 것은 그들이 격침 전투가 아니라 나포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푸에블로호 선실에서는 미국 해군 병사들이 조선인민군에게 기밀문서를 압수당하지 않으려고 약 1,000kg이나 되는 문서 더미를 쌓아놓고 허겁지겁 불을 질렀고, 도끼와 망치를 미친 듯이 휘두르며 선실 내부의 전자 장비들을 파괴하는 소동을 피우고 있었다. 조선인민군 전투함선 5척은 죽음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푸에블로호를 향해 기관포를 사격했다. 긴급구조를 요청하라는 함장의 명령을 받은 무전병 돈 베일리(Don Bailey)는 일본 가미세야에 있는 미국 해군 제7함대 기지에 긴급구조 요청신호를 날렸다.

푸에블로호가 항복하지 않자 조선인민군 전투함선들은 또 다시 두 차례 사격을 퍼부었다. 미국 해군 병사 3명이 비명을 지르며 선실 바닥에 픽픽 쓰러졌다. 기관총수 두웨인 하지스(Duane Hodges)는 직격탄을 맞고 한쪽 다리가 떨어져 나가 현장에서 사망했다. 포위망에 걸려든 푸에블로호는 격침당하거나 아니면 항복해야 하는 절망적 상황에 빠졌다.

구잠정 35호가 푸에블로호 선미에 달라붙었다. 조선인민군 전투원 4명은 번개처럼 푸에블로호로 옮겨 타고 습격전을 벌였다. 전투원들은 조타실에 들이닥쳤다. 조타실에서는 함장 부커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서 있었다. 하지만 조선인민군 전투원들은 누가 함장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인민군 전투원들은 손가락으로 부커를 가리키면서 서툰 로씨야 말로 “까삐딴?”이라고 물었다. 무슨 소린지 전혀 알아듣지 못한 부커는 공포에 질린 두 눈을 껌벅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조선인민군 전투원들은 조타실 작전 탁자 위에 놓인 종이와 연필을 가져가 해군 장교 모자를 쓴 사람 얼굴을 쓱쓱 그리더니 그것을 부커의 눈앞에 내밀었다. 그제야 부커는 조선인민군 전투원들이 자기를 찾는다는 것을 눈치채고 체념한 듯 손짓으로 자기가 함장이라고 알렸다.

푸에블로호를 습격한 조선인민군 전투원 4명은 함장 부커를 비롯하여 해군 장병 82명을 전원 포로로 생포했다. 조선과 미국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한 이후 전쟁을 아직 끝내지 못했으므로, 푸에블로호 해군 장병들은 전쟁포로로 생포된 것이다.

미국 해군 전쟁포로 82명은 푸에블로호 갑판으로 질질 끌려 나왔다. 조선인민군 전투원들은 푸에블로호 취침실에 있는 침대보를 찢어 전쟁포로들에게 나누어주고 뒷사람이 앞사람의 두 눈을 가리고 두 손목을 차례로 묶으라고 명령했다. 두 눈이 가려지고 두 손목이 뒤로 묶인 미국 해군 전쟁포로 82명은 항복의 표시로 갑판에 무릎을 꿇었다. 이 극적인 장면은 세계 최강이라고 떠들어대는 아메리카제국이 사회주의조선과의 대결에서 완패를 당하고 무릎을 꿇은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갑판에 쪼그리고 앉은 미국 해군 전쟁포로 82명은 살을 도려내는 동해의 겨울바람을 온몸에 맞으며 원산항으로 끌려갔다. 푸에블로호가 원산항에 입항한 시각은 당일 오후 7시경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두 손이 꽁꽁 묶인 그들은 바지를 입은 채 오줌을 싸는 수밖에 없었다. 세계 최강이라고 떠들어대는 미국의 자존심은 처참하게 짓밟혔다.


4. 나무막대기보다 못한 미국의 핵우산

조선인민군이 오후 12시 15분경에 개시한 푸에블로호 나포 전투는 오후 3시 45분경에 조선인민군의 완승으로 결속되었다. 미국 해군 함선이 총 한 방 쏴보지 못한 채 적국 해군에 나포된 사건은 미국 건국 이래 전무후무한, 가장 충격적인 치욕 사건이었다. 조선인민군이 미국 해군 간첩선을 나포해 원산항으로 끌어갔다는 엄청난 소식은 전파를 타고 널리 퍼졌다. 조선에서 승리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워싱턴은 경악과 충격으로 발칵 뒤집혔다. 전 세계 진보적 인민들은 “인류 공동의 적인 미제의 면상을 보기 좋게 후려친” 조선의 강용한 모습을 찬탄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과 관련하여 워싱턴에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어 원산항으로 끌려가는 위급한 정황에서 미국 해군 제7함대는 긴급구조 요청을 받았는데도 왜 아무런 대응작전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 의문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조선인민군 해군에 나포되어 원산항으로 끌려가던 바로 그 시각, 미국 해군 제7함대 소속 32,000t급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USS Enterprise)가 원산에서 남쪽으로 약 800km 떨어진 해상에 있었고, 그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F-4 전폭기 2대가 항공모함 주변 공역에서 초계비행을 하고 있었고, F-4 전폭기 4대가 항공모함 비행 갑판 위에서 무장을 갖추고 즉시 출격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초계비행 중이던 F-4 전폭기 편대가 원산을 향해 전속력으로 날아가면, 30분 만에 사건 현장에 도달할 수 있었다.

위급한 정황에 빠진 푸에블로호가 긴급구조 요청을 무선통신으로 보낸 시각은 당일 오후 12시 30분경이었고, 조선인민군 해군에 나포된 시각은 당일 오후 3시 15분경이었다. 그러므로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에서 긴급발진한 F-4 전폭기 편대가 푸에블로호 구출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시간은 약 2시간 45분이었다. 그러나 30분 만에 사건 현장에 도달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면서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는 푸에블로호 구출작전을 하지 않았다. 이런 정황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가 푸에블로호 구출작전을 사실상 포기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왜 푸에블로호 구출작전을 포기한 것일까?

미국의 해군사 연구가 케네디 힉크먼(Kennedy Hickman)은 ‘냉전: 푸에블로호 사건(Cold War: USS Pueblo Incident)'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의문을 풀어줄 단서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케네디 힉크먼의 논문에 의하면, 당시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에 함재기로 배치된 F-4 전폭기들은 공대공미사일만 장착했고, 공대함미사일은 장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F-4 전폭기들에 장착된 공대공미사일을 공대함미사일로 바꿔 달려면, 오랜 시간이 걸려서 푸에블로호 구출작전을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미국의 군사력사 연구가 세바스티엔 로빈(Sebastien Robin)은 ‘북조선의 위기: 1968년에 평양은 미국인 82명을 생포했다 (그러나 워싱턴은 공격하지 않았다(North Korea Crisis: Back in 1968, Pyongyang Captured 82 Americans (But Washington Did Not Attack)"는 제목의 논문에서 의문을 풀어줄 단서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세바스티엔 로빈의 논문에 의하면, 사건 당일 푸에블로호가 보내온 다급한 구조요청을 받은 미국 해군 제7함대는 일본 오끼나와 가데나 공군기지에 긴급히 연락하여 미국 공군에 구출작전을 요청했다. 요청을 받은 미국 공군은 가데나 공군기지에서 F-105 전폭기 12대를 긴급출격시켰으나, 그들은 원산 앞바다를 향해 비행하다가 한(조선)반도 남측 상공에서 기수를 돌려 가데나 공군기지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서술내용들은 이치에 닿지 않는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 당시 오산 미공군기지와 군산 미공군기지에 F-4 전폭기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 전폭기들을 긴급출격시켰다면, 푸에블로호 구출작전을 얼마든지 전개할 수 있었다. 이런 사정은 당시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푸에블로호 구출작전을 포기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적국에 나포된 해군 함선을 구출하는 작전을 포기하는 엄청난 정치적 결정을 내릴 권한은 최고 권력기관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만 행사할 수 있다. 1968년 1월 24일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 1908~1973)은 푸에블로호 구출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백안관 국가안보회의를 긴급히 소집했는데, 그 회의에서 푸에블로호 구출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이 분명하다. 포기 결정에 관한 백악관의 비밀문서는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날 백악관의 포기 결정에 참가한 당시 국무부 장관 딘 러스크(David Dean Rusk, 1909~1994)의 발언을 들어보면 전후 맥락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1968년 1월 24일 푸에블로호 구출문제를 논의, 결정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에 참석했던 딘 러스크는 1월 26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 비공개 청문회에 출석해 발언했다. 극도로 민감한 푸에블로호 구출문제를 다루는 비공개 청문회였으므로, 회의록은 당연히 비밀문서로 분류되었다. 회의록은 42년이 지난 2010년 7월 14일에 기밀 해제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회의록에 의하면, 당시 비공개 청문회에 출석한 국무부 장관 딘 러스크는 푸에블로호 구출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이 조선에 군사 보복을 감행하는 경우, 조선이 대미전쟁을 재개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회의록에 의하면, 비공개 청문회에 참석한 당시 공화당 상원의원 셔먼 쿠퍼(John Sherman Cooper, 1901~1991)는 미국이 윁남전쟁을 하고 있는 판에 조선전쟁도 일어날 수 있는 위기 상황이므로 푸에블로호 구출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회의록에 의하면, 그 자리에 참석한 당시 공화당 상원의원 칼 문트(Karl E. Mundt, 1900~1974)도 미국은 윁남전쟁이 끝날 때까지 또 다른 전쟁을 벌이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1968년 당시 미국은 조선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능력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은 자기들이 중시하는 최신형 신호 정보수집 간첩선 푸에블로호 구출작전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료에 의하면, 1968년 당시 주한미군기지의 핵무기 저장고에는 전술핵무기가 무려 950발이나 비축되어 있었고, 그것을 탑재할 F-4 전폭기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1968년 당시 조선은 핵무기를 한 발도 갖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이 전술핵무기를 잔뜩 쌓아놓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전술핵무기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정치적 결정 능력과 군사적 작전 능력을 갖지 못했으면, 전술핵무기는 수류탄보다도 못한 것이다.

55년 전 조선인민군의 푸에블로호 나포 전투 승리는 미국의 핵우산이 굉장한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력하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로부터 55년이 지난 지금 조선은 전략핵무력과 전술핵무력을 완비한 핵강국으로 등장했다. 이처럼 근본적으로 변화된 정세에서 미국의 핵우산은 말이 핵우산이지 나무막대기만도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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