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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 전투원 100,000 명이 희생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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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2-08-10 08:43 조회2,3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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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의 정치탐사 제29화

2022년 8월 5일

전투원 100,000명이 희생되더라도

한호석 (정치학 박사, 통일학연구소 소장)



미국의 국가권력순위 3위에 있는 연방하원의장 낸시 펠로씨가 중국의 격렬한 반대와 엄중한 경고를 무시하고 2022년 8월 2일 중국 대만에 무단진입하는 도발망동을 저질렀다. 이 엄중한 사태로 하여 동아시아정세는 전쟁위기에 빠져들었다. 사회주의 중국과 제국주의 미국의 적대관계, 그리고 중국과 민진당 반란세력의 적대관계는 금방이라도 화약고에 불이 붙을 것 같은 형세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은 민진당 반란세력을 제거하는 정밀타격능력, 미국군의 대만접근을 차단하는 작전능력, 대만해안지대를 점거하는 상륙돌격능력, 전시수송능력과 전시정찰능력 등 다양한 실전능력을 전면적으로 점검하면서 대만해방전쟁 준비태세를 빈틈없이 갖추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번 점검은 중국인민해방군에게 마지막 점검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대만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대만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는 흔한 것이 아니라, 100년에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100주년까지 앞으로 27년이 더 남았다고 해서, 대만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가 앞으로 10년 또는 20년 뒤에 다가올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판이다. 지금 미국이 대만과 일본의 무력증강을 적극 추진하고 있고, 아시아와 대양주와 서유럽의 친미동맹국들을 긁어모아 반중국군사동맹을 계속 강화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중국이 대만해방전쟁을 수행하기에 점점 더 불리한 정세가 조성될 것이 뻔하다. 이번에 펠로시의 대만방문에서 그런 사실이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중국은 대만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를 더 이상 뒤로 늦출 수 없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1949년부터 오늘까지 73년 역사의 흐름을 되집어보면, 대만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3년 전 역사현장으로 돌아가보자.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지 2개월 반이 지난 1949년 12월 16일 마오쩌둥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모스크바에서 스딸린 소련공산당 서기장을 만나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사상 처음으로 성사된 중소정상회담이었다. 정상회담에서 마오쩌둥 총서기는 1950년 중에 대만해방전쟁을 수행하려는 의사를 밝히면서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중국이 대만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를 1950년 이후로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한 이유가 있었다. 38선 이남(남조선)을 점령했던 미국군은 이승만 정권의 철군반대의견을 무시하고 1949년 6월 30일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겨두고 하와이와 미국 본토로 철수했다. 철군으로 불안해진 이승만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사한 태평양조약기구를 창설해주고, 한미상호방위협정을 체결해달라는 굴욕적인 청원서를 1949년 5월 7일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게 보냈다. 그가 트루먼에게 청원한 태평양조약기구 창설문제는, 미국을 추종하는 동아시아 종미우익정권들이 군사동맹체를 창설하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서, 트루먼을 우두머리로 하여, 이승만, 쟝제스, 퀴리노가 손을 잡고 북침전쟁기구를 설치하려는 도발적인 전략구상이었다. 엘피디오 퀴리노(Elpidio Quirino)는 당시 필리핀 대통령의 이름이다.

이승만이 트루먼에게 태평양조약기구를 창설해달라고 청원한 것은 노쇠한 종미우익정객의 망언으로 가볍게 보고 넘아갈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승만이 트루먼에게 태평양조약기구 창설을 청원한 때로부터 3개월이 지난 1949년 8월 7일 경상남도 진해에서 이승만과 쟝제스가 비공개 정상회담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진해회담에서 이승만과 쟝제스는 38선과 압록강을 넘어 만주를 침공하는 북침전쟁문제를 논의했다.

이런 사정을 살펴보면, 중국은 미국이 태평양조약기구를 창설하기 전에 대만해방과 국토완정을 실현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1949년 12월 16일 마오쩌둥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스딸린 소련공산당 서기장을 만난 모스크바 중소정상회담에서 1950년 중에 대만해방전쟁을 수행하려는 의사를 밝히면서 군사지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오쩌둥 총서기의 발언을 들은 스딸린 서기장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스딸린 서기장은 중국의 대만해방과 국토완정이 시급한 문제가 아니므로, 중국이 대만 내부에 지하당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식으로 대만해방전쟁을 준비할 것을 제의하면서, 대만에서 내전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기회에 대만해방전쟁을 수행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스딸린 서기장의 그런 제의는 대만해방전쟁시기를 장기간 연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었다. 중국이 대만 내부에 지하당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하려면 앞으로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나야 하는지 아무도 예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국이 스딸린 서기장의 견해를 따르면 대만해방전쟁의 장기간 연기가 불가피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당시 중소정상회담에 배석했던 중국측 통역관이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 서술한 바에 따르면, 스딸린 서기장이 대만에서 내전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만해방전쟁을 수행하면 될 것이라고 말하자 분위기가 냉랭해졌다고 한다. 스딸린 서기장이 마오쩌둥 총서기에게 그렇게 제의한 까닭은 당시 중국인민해방군이 쟝제스 군대를 제압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내전에서 연패하고 있었지만, 쟝제스 군대는 미국이 보내준 최신 무기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결코 호락호락한 적수가 아니었다. 지금 미국이 로씨야의 노보로씨야해방전쟁을 저지하기 위해 젤렌스끼 종미우익정권에 막대한 군사지원을 보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2차 중국내전시기에도 미국은 중국이 대만해방전쟁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쟝제스 종미우익정권에 막대한 군사지원을 보내주고 있었다. 제국주의의 추악한 본질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1949년의 군사상황은 중국에 그처럼 불리했지만, 중국공산당 지도부과 중국인민해방군 지휘부는 대만해방과 국토완정을 실현하려는 결심을 결코 내려놓지 않았다. 대만해방전쟁을 수행하려면 대만해협을 건너갈 전투함선이 많이 요구되었는데, 1949년 당시 중국인민해방군이 보유한 전투함선은 쟝제스 군대에게서 노획한 호위함 7척과 소형 경비정 9척, 그리고 중국인민해방군이 상륙정으로 사용하려고 징발한 작은 어선 600여 척밖에 없었다. 그처럼 빈약한 전투함선을 가지고서는 대만해방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은 대륙해안지대에 있는 어선들을 모두 징발했고, 선박운용능력이 있는 어민들을 동원했다. 그와 더불어 각 조선소에서 전투함선 건조를 다그쳤으며, 소련에서 전투함선을 도입했다. 그렇게 해군력 증강에 힘쓴 결과, 1950년 3월까지 각종 상륙정 1,300척을 보유하게 되었지만, 그것으로는 대만상륙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상륙작전에는 전투함선만이 아니라 전투기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1950년 당시 중국인민해방군이 대만에 상륙하려면 300~350대의 작전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1950년 2월 14일 마오쩌둥 총서기와 스딸린 서기장은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면서 소련이 전투기 280대와 폭격기 198대를 포함하여 총 586대의 작전기를 중국에 판매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중국이 그처럼 많은 전투기와 폭격기를 수입하더라도, 그것을 운용할 공군 병력이 없으면 무용지물이었다. 그래서 중국인민해방군은 소련군 고문단을 초빙해 전투비행사와 항공전문병을 속성으로 양성하는 사업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되어 1950년 5월 중국은 항공군사교육을 받은 제1기 수료생을 배출했다. 그들은 89명의 전투비행사, 20명의 항법사, 107명의 항공전문병이었다. 전투기 30대, 전폭기 30대, 폭격기 20대로 편성된 중국인민해방군 공군 제4혼성항공려단이 창설되었다. 중국은 경보병차량, 야포, 박격포, 기관총, 저격총으로 무장한 5,000명의 항공륙전병으로 중국인민해방군 항공륙전려단을 창설했다.

1950년 2월 16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인민일보>에 실린 중국인민해방군 고위지휘관의 발언을 들어보자. 발언자는 당시 대만해방작전을 담당한 중국인민해방군 제3야전군 사령관 수유(粟裕)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엇보다도 동남해안의 섬들, 특히 대만을 해방하는 것이 매우 큰 문제이며, 중국 현대전쟁사에서 가장 큰 전투로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충분한 수송수단, 적합한 무장장비, 그리고 적절한 보급이 없으면 (대만을) 점령할 수 없다. 더구나 쟝제스가 지휘하는 엄청난 규모의 육군, 해군, 공군은 본토에서 도주한 가장 비타협적인 반동분자들과 함께 그곳(대만을 뜻함-옮긴이)에 집결했다. 그들은 대만을 방어하기 위해 해안을 따라 강력한 방어시설을 구축했다. 미제국주의자들의 선동에 따라 그들은 일본군국주의자들까지 끌어들였다. (중략) 이런 점들이 우리의 전쟁수행과정에 나타난 어려움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물질적, 기술적 조건을 갖추었을 때 우리는 거창한 군사임무를 완수하여 국민당 잔재를 뿌리뽑을 수 있을 것이다."

1950년 초 중국인민해방군 지휘부는 대만해방전쟁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16개 군단, 765,000명의 전투병력을 동원하는 작전계획이었다. 작전계획에 따르면, 200,000명의 전투원들이 대만 서부해안 4개 구역에 상륙하거나 아니면 360,000명의 전투원들이 대만 서부해안 8개 구역에 상륙하고, 대규모 예비전투원들이 그 뒤를 따라 상륙하여 타이베이(臺北)로 진격하며, 약 25,000명의 항공륙전병들이 대만 서부지역에 공중으로 침투하여 타이베이로 진격하고, 산악전투부대가 대만 동부해안에 상륙하여 타이베이로 진격하여 타이베이를 3면에서 포위하고 점령하려는 것이었다. 대만해방전쟁은 15일 동안 수행하는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런데 당시 중국은 소련으로부터 전투함선과 전투기를 수입하는 데 들어가는 막대한 재정을 마련하기 힘들어서 대만해방전쟁시기를 부득이 1950년 12월에서 1951년 7월로 미루었다.

대만해방전쟁 작전계획에서 주목되는 것은 중국인민해방군 전투원 약 100,000명이 대만해방전쟁에서 희생될 것으로 예견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국이 100,000명이 희생되더라도 대만해방과 국토완정을 무조건, 반드시 성취해야 할 절대적인 과업으로 여겼다는 것을 말해준다. 대만해방과 국토완정을 실현하려는 중국의 확고한 결심은 72년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흔들리지 않고 있다. 만일 중국이 대만해방과 국토완정을 실현하지 못하면, 중화민족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기 때문에 대만해방과 국토완정을 실현하려는 중국의 결심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대만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판단하는 첫번째 근거다.

그런데 중국이 전투원 100,000명을 잃을 각오를 하고 대만해방과 국토완정을 준비하고 있었던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졌다. 1950년 6월 29일 미국 제7함대 항공모함 밸리 포지호(USS Valley Forge)를 주축으로 중순양함 롸체스터호(USS Rochester)와 구축함 8척으로 편성된 항모타격단이 대만해협에 들이닥쳤고, 미국 제7함대 소속 해상작전기들이 대만해협 중간에 있는 펑후제도로 날아갔으며, 미국 해군 잠수함들이 대만해협으로 몰려갔다. 1950년 7월 하순에는 미국 해군 순양함 2척과 구축함 3척이 추가로 대만해협에 출동했고, 1주일 뒤에는 구축함 4척이 대만 북쪽에 있는 기룽항(基隆港)에 입항했다. 미국 해군은 이처럼 많은 전투함선을 중국 대륙 해안선으로부터 25~32km까지 접근시키면서 중국을 집요하게 협박했다.

중국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 38도선 이북을 점령하고 만주를 침공하려는 미국의 북침전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중국은 항미원조전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이 항미원조전쟁에서 대결한 미국은 최신식 무기와 핵폭탄으로 무장한 강적이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조선과 중국에 대한 미국의 악랄한 핵위협은 끊임없이 자행되었다. 예컨대, 2010년 6월 16일 기밀해제조치에 따라 공개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비밀문서를 보면, 1953년 정전 이후에도 미국이 핵공격준비에 얼마나 광분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비밀문서는 미국 국무부,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육해공군사령부, 중앙정보국이 참가한 가운데 1954년 3월 2일에 진행된 국가전략회의 토의내용을 중앙정보국이 정리한 것이다. 비밀문서에는 만일 조선인민군이 한국군을 공격하는 경우 미국이 조선의 군사시설들을 핵폭탄을 파괴하고, 중국의 대도시들인 지린(吉林), 칭다오(靑島), 선양(瀋陽), 텐진(天津) 등을 핵폭탄으로 파괴하고, 중국 해안을 봉쇄하고, 중국 본토를 침공하고, 중국 최남단에 있는 하이난섬(海南島)을 점령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미국의 핵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중국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중국인민해방군을 미국의 무력개입을 차단할 강군으로 육성하고 미국의 핵위협을 억제할 강력한 핵무력을 보유하는 것이었다. 지난 70년 동안 중국은 그 길을 꾸준히 걸어왔다. 그리고 2022년 8월 현재 중국은 마침내 강군육성의 종착점에 도달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어선을 타고 대만해협을 건너려던 지난 날의 군대가 아니다. 그들은 대만해방전쟁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무력개입을 차단할 강한 힘을 가졌다. 이번에 펠로시의 대만방문 직후 중국인민해방군이 실전양상으로 전개하는 일련의 군사행동은 미국의 무력개입을 차단할 그들의 우세한 작전능력을 세상에 과시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대만해방전쟁의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판단하는 두번째 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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